자정의 시간은 특별하다

8. 내가 사랑한 모든_이야기들 [자정의 영화]

by 정담

자정, 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조급해진다.


학교에 다니고 집에서 취업 준비를 할 때만 해도 열두 시라는 시간은 나에게 아직 초저녁과 같았다. 한창 과제를 하거나 이제 막 씻기도 하고 가끔은 출출한 배도 채우는. 가끔 친구들을 만날 때면 헤어질 생각도 아직 하지 않는 이른 시간이라 생각했지만, 회사에 다니고 반강제적으로 규칙적인 삶을 살아야만 하게 된 나는 이제 열두 시라는 시간이 옛 개그콘서트 마지막 밴드음악과도 느껴진다.


아직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사원 때는 그 의미가 더했다. 벌써 날짜는 바뀌어 내일이 되었고 잘 준비를 해야만 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헐레벌떡 샤워를 마치고 서글픈 마음으로 머리를 말리고 피부를 정돈한다. 다음 날 회사에 가져갈 도시락을 미리 챙겨 냉장고에 넣어두고 내일 마실 물도 브리타에 준비한다.


그리고 나선 고민한다. 바로 침대에 누울지, 책상에 앉을지, 그도 아니면 책을 읽을지. 대체로 나의 선택은, 침대에 눕기이다. 누워서 핸드폰 속 세상을 탐험하며 남들이 쓴 만화도 보고 영상도 보고 또 아이돌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이런 마무리가 죄책감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오늘 하루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렇게 마무리마저 마음대로 쉬어도 되는 건가? 싶은 때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뭐라도 끄적이고 끄적이고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직도 빈 화면은 여전하지만 마음만은 채워진 채로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대부분의 시간을 핸드폰과 함께하고 아주 가끔 울며 겨자 먹기로 시간을 때우는 시간이 늘어나자 오히려 마음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화면 속 반짝이는 커서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도 나의 시간은 여전히 자정의 애매한 시간이 얽매여 있는 느낌.


그 마음을 옥죄는 죄책감이 싫어 처음엔 주말의 루틴부터 바꿨다.

주말의 자정은 평일과 조금 다르게 더 마음이 해이해지는 시간이다. 다음 날의 나에게 피곤을 조금 떠밀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래서 이번엔, 핸드폰으로 하염없이 밑으로 밑으로 내리기보다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내일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양치도 끝내고, 형광등을 끄고 침대 옆의 조명만 켜두면 영화를 볼 준비는 모두 끝이다.


개인 취향으로 나는 딱히 드라마나 영화를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좋아하지 않는다기 보다는 시작이 어렵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집중해야 할 것 같고 끝까지 봐야 할 것 같은 그 부담감이 싫어서. 그래서 선택한 건 ‘퀸카로 살아남는 법’, ‘클루리스’ 같은 하이틴 영화나 ‘로마의 휴일’, ‘티파니에서 아침을’ 같은 옛날 영화들이다.


그 영화들의 해맑음을 좋아한다. 어떤 역경이나 시련이 있어도 담배 한 대로 눈물을 날려버리거나 친구의 위로 한 번에 털고 일어나는 그 강함을 보면 절로 미소가 나온다.


누군가는 너무 가볍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 가벼움이 도리어 힘이 된다. 낮의 하루를 살다 보면 나를 누르는 힘겨운 이야기들을 너무나 많이 듣는다. 그 이야기들을 생각하고 또 고민하고 고뇌하는 일주일을 지난 주말의 나는 이미 헤질대로 해져 너덜너덜하다. 그런 주말의 나에게 또 자정의 나에게 또 다른 고민을 선사할 영화를 택하는 것은 글쎄,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시간만은 오롯이 미소를 지으며 하루를 마무리하고 싶다.


그 영화들 속 여자 주인공들은 확실히 백이면 백 남자친구가 있거나 끝끝내 만들고, 높은 확률로 쓸데없이 입이 가볍다. 하지만 그들은 시련 속에서도 자신을 바꾸거나 강하게 만들어 극복하고 또 자신만의 강점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빠지게 만든다. 강한 자신에 대한 애정과 그것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자신감, 그게 내가 처음 그 영화들에 빠지게 된 계기였던 것 같다.


그들을 보고 있으면 나의 길게 늘어지고 이곳저곳으로 퍼지는 나의 고민들이 가벼워만 지는 것 같아서. 그저 일주일 치의 무거운 고민들은 영화 주인공들의 빛나는 미소 한 번에 덜어내고 영화를 시작하기 전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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