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꼬리를 자르는 방법

7. 내가 사랑한 모든_말들 [그냥 해!]

by 정담

나는 원래부터 조금 느린 아이였다.


달리기는 늘 하위권에 밥 먹을 땐 늘 가장 늦게까지 자리에 남아 있었고 어딜 가서도 남들보다 한 발자국 씩 조금 늦는, 느긋하고 조금은 답답한 아이.


가끔은 엄마가 대답하는 데 뭘 그리 오래 걸리냐며 타박 아닌 타박을 하기도 했다. 아직 10대라는 말도 붙일 수 없는 아이에게 대답을 구할 일이래 봐야 “오늘 저녁 뭐 먹을래?”라든지 “어떤 게 갖고 싶어?”라는 일상적인 질문들이었으니까.


바로바로 나오지 않는 대답에 엄마는 종종 나의 입이 열리기를 재촉했고, 그럴 때마다 나도 조금 답답했다. 지금은 김치찌개가 먹고 싶더라도 저녁의 내가 무엇이 먹고 싶을지 단언하기 힘들었고, 또 엄마는 무엇을 먹고 싶은지, 아니면 집에 재료가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으니까.


인형 하나를 고를라고 해도 집에 어떤 인형이 있는지, 이 인형이 더 나은지 저 인형이 더 나은지 한참 그 앞에 서서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들을 잘 따져봐야 했다. 그 한 번 한 번이 나에겐 큰 기회이자 문제 같았고, 꼭 더 나은 답이 있으리라 믿었던 것 같기도 하다.


20년은 더 지난 지금의 나는, 아직도 선택이 남들보다 조금 느린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남들은 그리 빠른 결정을 내리는지 지금도 잘 이해는 하지 못한다. 이번에 노트북을 하나 샀다. 장장, 3년의 고민 끝에. 정말 지금의 나에게 노트북이 필요할지, 산다면 어떤 걸 사야 할지, 그렇다면 그걸 어디서 사야 가장 합리적 일지 고민하는 데 3년이 걸렸다.


이런 나에게 누군가 ‘알뜰하다’라고 말해주었지만 글쎄, 나는 그냥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데에 행동할 기력까지 다 써버리는 사람인 것 같다. 수많은 선택지를 늘어놓고 그 안에서 최선이자 최고의 결정을 하느라 행동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 포기해 버리는, 그런. 요즘은 회피형이라고도 부르는 유형들.


이런 성질을 쇼핑에만 썼으면 그저 알뜰한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 텐데, 나의 일상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회사에 들어와 메신저 답이 왜 이리 늦냐는 말을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남들도 다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MBTI로 모든 걸 설명하려 드는 것이 좋진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N--인 나와 달리 -S—들의 업무 방식을 보며 ‘저렇게 대충?’이라고 생각할 만큼 모든 걸 빠르게 쳐내는 걸 발견했을 때 나와 다름을 실감했다.


그리고 회사에서 ‘잘’ 다니려면 그들의 방식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도. (여기서 ‘잘’이라고 함은, 일 그 자체를 잘한다는 뜻도 내포하지만 그 사람들 사이에서 내 마음을 지키며 상처받지 않고 다닐 수 있다는 뜻도 있다.)


위의 깨달음과는 별개로, 나에게 있어 그들의 방식은 가끔 너무 매정하다. 큰 고민도 없고 낭만도 없는 삶은 나에게는 크게 의미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또 이러한 나의 개인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그 방식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나의 다름을 깨달은 후, 일을 하면서 혹은 일상을 살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과 고민들로 행동이 느려지는 순간이 자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느려지고 결국 행동을 미루는 나로 인해 더욱 힘들어졌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왜 그걸 고민하다 미루지? 아까 했으면 진작 끝났을 텐데.


하나를 하더라도 그 미래의 미래의 미래까지 생각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쳐버리는 내게 실망하고 그 때문에 또 좌절감에 빠져 잠에 드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다시 자괴감에 빠졌다.


그래서 이번엔, 고민이 꼬리를 물려할 때마다 그냥 “아, 일단 해!”라는 말로 그 꼬리를 자르는 상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상상을 하자마자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에 먼저 몸을 움직이는 법을 연습했다. 그러고 나니 정말 나조차도 놀랍게도,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그리 큰 것이 아니더라도, 힘든 평일이 지난 주말 가장 먼저 빨래를 돌리고 밥을 하고 화장실을 치우는 일상적인 일들. 그 일들이 끝나고 지쳐 쓰러져버리고 싶은 나에게 “아, 일단 해!”라고 말하며 책상에 앉히는 순간들. 혹은 수많은 업무들이 나를 짓누를 때, 리스트를 정리하고 우선순위부터 “일단 해봐!”라고 말하는 시간들. 남들은 시시하고 우습다 할 수 있지만 그건 정말 내게 생각보다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봐봐, 하니까 되잖아! 자잘한 성공 그 자체가 큰 성공으로 가진 못해도, 적어도 큰 성공으로 갈 수 있는 길 정도는 한 발씩 닦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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