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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로로 Sep 04. 2024

<소설> 그 남자 그 여자의 사정 1

 - 그 남자

  엄창!     


  엄마가 창녀다.라는 걸 줄여서 엄창이라 부른다.

  이 말을 외칠 때는 대한민국만세를 외칠 때 양팔을 하늘을 향해 드는 것처럼 특정한 동작을 취해야 한다. 엄지손가락을 이마에 갖다 댄 상태에서 새끼손가락을 하늘로 가리키며 엄창이라고 소리친다. 주로 자신의 말과 행동에 믿음을 줘야 하는 상황에서 쓰인다. 내 말이 거짓이면 우리 엄마가 창녀다. 아이들 사이에선 이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수긍됐다. 반대로 상대방에게 확신을 얻기 위해서 엄창을 요구하기도 했다. 네 말이 진짜면 너희 엄마가 창녀라고 말해봐라. 말하자면 이것은 아이들 버전의 사상검증이었다.

  이 행위의 기원이 언제인지 전국적인 유행인지 지역색을 띠는 비속어인지 확실한 건 없지만 엄창이냐 엠창이냐의 차이일 뿐 비슷한 의미로 전국에서 두루두루 쓰였다. 어찌 됐든 엄창이라는 말이 수위가 높은 비속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유년 시절의 남자는 엄창이 얼마나 심한 욕인가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심지어는 그 말이 욕인지조차도 몰랐기 때문에 더 자주 사용했다. 동작이 재미있었고 단어 자체가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뜻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 말이 얼마나 나쁜 말인가에 대해서 가르쳐 준 건 남자의 아버지였다. 남자는 지금까지도 그 가르침을 잊지 못한다. 그러니까 남자는 아버지가 성적표에 수를 다섯 개 이상 받아 오면 현대슈퍼컴보이를 사 준다는 약속을 했을 때 기쁨의 환호성을 내지르는 동시에 아버지에게 엄창을 요구했다.


  “아빠 진짜죠? 엄창 찍어 보세요.”


  이제 막 10살이 된 아들이 해맑게 웃으며 엄창을 요구한다면 아버지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게 옳을까. 창녀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알려 줄 것인가. 섹스도 모르는 아이에게 어떻게 창녀를 가르칠까. 그렇다고 섹스를 가르쳐 줄 것인가. 아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바람직한 성생활이 어떤 것인지. 남자의 아버지는 성교육의 모든 프로세스를 훑어보다 결론에 도달했다.

  아버지의 가르침은 간단하고 명료했다. 남자가 몰래 학원을 빼먹고 오락실에 갔다가 학원을 다녀왔다고 거짓말을 했을 때 구둣주걱으로 종아리 두 대를 때렸었다. 남자의 종아리에는 선명하게 붉은 피멍이 두껍게 두 줄 그어졌다. 엄창을 요구했다는 죄로는 구둣주걱이 부러질 때까지 때렸다. 매의 강도 횟수까지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차이였다. 남자는 그해 여름이 다 지나갈 때까지 반바지를 입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어린아이는 생각했던 거다. 엄창은 세상에서 제일 나쁜 말이구나. 그 때문이다. 남자가 창녀에게 근원을 알 수 없을 만큼 심한 반감을 갖게 된 이유가 말이다. 이후 남자가 접하는 창녀에 관한 정보는 늘 부정적으로만 인식되게 된다.     

  그들은 신성한 성을 찰나의 유희로 팔면서 부정하게 돈을 번다. 노동을 부정하고 그 대가를 부정한다. 그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저버렸다. 그들은 그러니까 나쁘다. 하여튼 나쁘다. 대체 뭐 하는 인간들이기에 팔 게 없어서 몸을 파나. 어떤 사람들인가. 어떤 기구한 삶에 봉착했기에 그런 삶을 사나.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도 살인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처럼 창녀 역시 마찬가지다. 생활이 곤궁하고 어려워도 버티고 이겨내는 방식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불법으로 정해져 있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나쁜 년들. 더러운 년들.


  남자는 자신의 성적 가치관이 공개된 곳 어디서든 목소리를 높여도 부끄럽지 않다고 자부했다.     

  그런 생각을 품고 보낸 세월이 20년에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 적절한 시기에 여성과 인연이 닿아 건전하게 교제했더라면 아마 그 생각이 온전하게 평생을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남자는 서른에 가까워지는 나이에도 연애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살과 살이 닿는 느낌은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에 짝 맞춰 추던 율동뿐이었다. 그마저도 연습 때는 손 대신에 짝이 내민 나뭇가지를 잡아야 할 때가 많았다.

  길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죄다 사랑과 이별에 관한 내용이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사랑을 자신만 빼고 모두 다 하는 것 같았다. 나쁜 남자들도 너무 많았다. 군대를 기다려 준 여자를 차버리거나 여자에게 함부로 대하는 남자를 보게 되면 내가 더 잘해줄 수 있는데 하며 속을 끓였다. 외로움에 지친 남자는 치마를 입은 그 어떤 누구에게라도 심장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며 보이는 무수한 커플 중에 자신보다 키가 작고 못생겼다고 판단되는 남자를 볼 때면 의문을 넘어서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고는 돈이 많겠지 하고 여우가 자기 키를 훌쩍 넘긴 포도나무를 지나치듯 애써 무시했다. 그 경험치가 쌓일수록 비참함은 상승곡선으로 올라갔다. 곡선이 수직으로 치솟을 때 남자는 폭발해 버렸다. 펑. 나도 사랑(섹스)하고 싶다.

  남자는 정말 사랑(섹스)하고 싶었다. 살과 살이 닿는 느낌을 품고 싶었고 자신의 성기가 오른손과 왼손이 아닌 다른 감촉도 느껴보기를 갈구했다. 사랑이 필요한지 성욕을 채울 행위가 필요한지 분간하기 어려웠지만 삼십 년을 가까이 살면서 경험해 보지 못한 느낌은 사랑이든 섹스든 마찬가지였다.

  솔직해지자.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다. 오죽하면 그걸 못하고 죽은 남녀는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겠는가. 남자는 총각귀신의 심정을 누구보다 더 절실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욕정을 달래기 위해 야한 동영상을 보던 남자는 왼손으로 열심히 피스톤운동을 하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리고 자기 고추를 부여잡고 증오하는 대상의 목을 조르듯이 양손에 힘을 줬다. 할 수만 있다면 고추를 바사삭 물어뜯어 버리고 싶었다. 이미 이성은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자지에게 자리를 내줬다. 남자는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갔다. 정신을 차린 건 길음역 10번 출구의 떡볶이집 앞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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