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사는 재미'를 찾고 싶었다. 무언가에 열중하고 빠지고 싶었다. 덕질을 해 본 적 없는 나인데 덕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내 심장을 뛰게 할 것이 뭐가 있을까? 문득 오랫동안 혼자서 쳐 온 피아노를 제대로 배워볼까 싶었다.
아빠는 내가 음악적 재능이 있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잠깐이지만 바이올린도 시켜보셨고, 피아노학원도 보내주셨다. 바이엘 상하를 뗄 정도로 쳤고, 체르니와 소나티네를 치기 시작할 때쯤 때려치웠다. 그다지 열심히 하지 않았고, 열정도 없었다. 나는 피아노 선생님들을 싫어했고, 그들도 나를 그다지 예뻐하지 않았다. (연습을 더럽게 안 해서...) 음악에 소질도 없고 끈기도 없었다. 그런데도 독립해서 집을 나온 후, 주위에 피아노가 없는 게 답답했다. 그래서 학자금 대출과 약간의 장학금, 그리고 과외비로 연명했던 법대생 시절에 중고시장에서 야마하 키보드를 샀다. 언제든 치고 싶을 때 뚱땅거릴 수 있는 건반이 필요해서.
십여 년을 끌고 다니던 건반을 몇 해 전에 처분하고 전자 피아노를 들였다. 혼자서 두세 개의 피아노 책으로 돌려 막기 하면서 십여 년간 치고 있는데 이 참에 레슨을 받아볼까 싶어 인터넷 서치를 해봤다. 대충 아무나 골라서 전화를 걸어 성인인데 레슨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어릴 때 좀 배운 이후로 계속 혼자 쳤다고 설명했다. 시간이 많은 편은 아니라 주말에 한번 정도 레슨을 받고 싶다고. 전화를 받은 피아노샘은 레슨 경력이 10년이 넘는다고 했다. 클래식을 주로 치지만 다른 장르도 가능하다고.
레슨을 어디서 받냐고 물으니 요즘은 비대면으로 진행한단다 (2022년 오미크론이 확 퍼졌을 때였다). 피아노 레슨을 대체 어떻게 비대면으로 진행한다는 건지, 옛날 사람인 나는 짜증부터 올라왔다. 물론 코시국 이후로 모든 악기레슨이 비대면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다른 학부모들에게 들었던 터였으나 비대면 수업 시스템 자체에 믿음이 없는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별로 땡기지 않아서 솔직하게 이야기했더니 비대면레슨도 충분히 효율적으로 배울 수 있다며 일단 한번 시도해 보라며 설득했다. 그래, 한번 해보지 뭐. 이 참에 나도 신문물을 받아들여보자. 요즘은 애들도 모조리 비대면으로 악기수업을 한다는데.
그렇게 화면으로 만난 피아노샘은 중국계 캐내디언이었고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레슨 전에 예의상의 스몰토크를 나누며 자기소개를 하는데 이 친구는 학부를 졸업하고 의대를 다니다가 그만두고 쉬는 중이라고 했다. 진로를 고민 중이라고. (이 집 엄마도 속 어지간히 썩고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나만큼 길을 잃은 자들이 많다. 나보다 어리긴 해도 먹을 만큼 먹은 친구가 힘들게 들어갔을 의대를 계속 다닐까 말까 고민 중 이라니.
캐나다에서도 의대는 들어가기 어렵다. 땅은 큰데 학교 수가 적어서 경쟁률이 세다. 캐나다 전체에 겨우 17개의 의대가 있다. 법대가 23개니까 법대보다 적은 숫자다. (맥락 없는 이야기지만 의대에 가려다가 좌절하고 법대를 간 사람들이 꽤 있다. 학부 때 유기화학 수업에 들어갔는데 첫 수업에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자네들 중 몇 명은 이 과목 때문에 법대로 진학하게 될 거야". 그때는 나도 다른 애들과 함께 웃어넘겼다. 그 몇 명 중 한 명이 내가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비대면 수업은 핸드폰으로 화상통화를 켜놓고 진행하는 식이었다. 구글 행아웃(카톡 비슷한 앱)이었나, 구글 클래스룸이었나. 핸드폰 화면으로 내가 보이도록 세팅을 하고 내가 치면 선생님이 코멘트를 해주는 식이었는데, 이건 뭐... 악보를 스캔해서 미리 올려줘야 하고... 악보에서 내가 묻고 싶은 부분이 있으면 마디마다 숫자를 매겨야 하고... 늙고 고집스러운 40대 아줌마 마음에는 안 들었다. 피아노는 무슨. 재빨리 포기했다.
자, 그럼 뭘 배우지? 끝도 없는 나와의 질의응답이 다시 시작됐다.
일렉기타? 고딩 때 어쿠스틱 좀 튕겨 본 이후로 기타는 건드린 적이 없다. 밴드 프로그램 보니까 일렉이 멋있긴 하더라. 그런데 앰프랑 선이랑 다 어디다 두지? 생각만 해도 귀찮다.
술? 오.... 이건 괜찮은데... 난 술을 사랑하니까... Spirit (증류주) 교육과정을 들어볼까? 찾아보니 WSET (Wine & Spirit Education Trust)라는 국제기관에서 관리하는 교육프로그램이 있다. 레벨 1, 2, 3까지. 가까운 곳에 연락하니 다음 수업은 몇 달 후나 돼야 들을 수 있다고... 그런데 나 술 끊어야 하는데, 이거 들어도 되나? 이거 들어서 어따 써먹게? 일단 몇 달 후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코딩? 코딩을 배워두면 좀 쓸모가 있지 않을까? 이거 배워서 변호사일 그만두고 업계에서 쓸 수 있는 앱이나 만들어서 은퇴할까? 근데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너무 허황되지 않냐? 앱 만드는 게 쉽냐? 아무래도 바보 같은 생각 같다.
'뭔가를 해볼까'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이유 백가지가 떠오른다.
순전히 재미를 위한 걸 배워야 할까? 그래도 뭔가 도움이 될만한 걸 배워야 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거 배워서 뭐 하나. 특별히 땡기는 것도 없는데... (실리적인 나의 자아와 뭐라도 해보려는 나의 자아가 늘 부딪힌다.)
그럼 돈이 될만한 걸 배워야 할까? 기왕이면 뭔가 용도가 있는 걸 배워야지. 하찮은 자격증이라도 나오는 걸로? (그렇다고 변호사 자격증보다 쓸모 있는 자격증을 딸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쯩"에 연연하냐?)
모르겠다. 결국 배우는 것도 포기했다. 대신 이 정신세계를 파헤쳐보기 위해 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