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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테나 Dec 13. 2022

예일 법대 출신 변호사의 비밀스러운 어린 시절

Beautiful Country를 읽고

좋은 책을 읽으면 빨리 기록하고 싶어서 바로 리뷰를 쓰게 된다. 그런데 Qian Julie WangBeautiful Country는 끝까지 읽고도, 그리고 작가의 말까지 읽고 나서도 내 감정을 쉽게 정리할 수 없었다.


며칠 멍한 기분으로 내가 느끼는 감정이 과연 무엇인지, 조금 더 생각하고 들여다봐야 했던, 그런 책이었다.


중국에서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있던 7살의 '치안 Qian'은 어느 날 갑자기 미국에 가게 된다. 중국 정부의 독재와 탄압에 회의를 느낀 아빠는 벌써 2년 전에 국으로 넘어갔고, 그런 아빠와 함께 하기 위해 치안과 엄마는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가게 된다.  아빠는 이미 불법체류자 신세.  방문 비자조차 겨우 받았던 치안과 엄마 또한 불법체류자 신세가 된다. 그때부터 세 가족의 고생길이 시작된다.  


'고생길'이라고 하니 왠지 상투적이다. 치안은 어린아이가 겪어서는 안 될 고통을 겪었다. 7살부터 엄마와 함께 봉제공장으로, 생선 공장으로, 옮겨 다니고 겨우 1학년의 나이에 혼자 지하철을 타고 학교를 다닌다. 아침은 굶고, 배가 고파서 다리 힘 빠질 때 즈음 학교 급식으로 허겁지겁 배를 채우지만, 이상하게 미국 음식은 돌아서면 또 허기가 진다. 학교가 파하면 엄마가 일하는 봉제공장에 가서 엄마를 따라 실밥을 잘라내는 일을 한다.  


부모의 고생은 또 어떠한가. 중국에서는 교수였지만, 미국에서는 그저 불법 이민자다. 꿈의 나라, 미국에 왔지만 신분이 불안정하니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다. 남들보다 덜 받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중국에서 책까지 펴냈던 전직 교수 엄마는 봉제공장, 생선 공장, 식당 서빙, 미용실 시다 등등, 닥치는 대로 일한다. 낯선 나라에서  두려움에 떠는 엄마는 점점 어린 딸에게 의지한다. 새로운 일거리가 생겼는데, 여기로 옮길까? 이걸 해야 할까, 저걸 해야 할까? 이걸 살까, 저걸 살까? 엄마가 물으면 아직 코흘리개인 딸은 조잘조잘 조언을 해준다.


불법 이민자 가족은 좋은 물건, 좋은 가구를 들이지 않는다.  물론 살 돈도 없지만. "쇼핑데이"는 치안의 가족이 남들이 버린 물건을 주워오는 날이다. 오래된 쇼핑카트를 끌고 동네를 돌면서 쓸만한 물건을 주워온다.  아빠가 정한 3가지 룰에 따라.  


1. 옮기기 쉬운 물건일 것 (차가 없으니 쇼핑카트에 실을 수 있거나 들고 갈 수 있어야 한다.)

2. 필요한 물건일 것 (좁은 집에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면 허용할 공간이 없다.)

3. 애착심이 생기지 않을 물건일 것 (언제 추방될지 모르니 미련 없이 버리고 갈 수 있는 물건이어야 한다.)


어린 치안은 제복만 보면 등골이 서늘해진다. 경찰은 물론이고 구급요원조차 두렵다. 제대로 된 의료시스템을 이용할 수도 없고, 부당한 일을 당해도 경찰에 신고조차 할 수 없다.  유년시절, 중국에서 친척들과 동네 어른들의 애정을 듬뿍 받던 치안이 미국에서는 더럽고 해진 옷을 입는 아이가 된다.


무려 1994년이다. 내가 캐나다로 이민 온 것이 1993년이니 그다음 해다.  나도 넉넉하지 않은 이민자 가정에서 자랐고 청소년 시절부터 성인이 되어서까지, 나와 친구들을 비교하면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렸는데 치안이 말한 가난은 겪어보지 못했다.  나의 부모는 내가 밥을 굶게 하진 않으셨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해피엔딩을 기다렸다.  표지에서 이미 작가의 어린 시절을 담은 실화임을 알고 있었고, 그녀가 예일대 법대를 나와 지금은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는 작가 소개를 이미 읽은 터였다.  엄마와 치안은 성공적으로 캐나다로 이주하게 되고 캐나다에서 합법적인 이민자 신분을 얻게 된다. 캐나다 국경에서 랜딩 서류를 제시하자 웃으며 "Welcome home!"이라고 말하는 역시나 친절한 캐나다 출입국 검사관.  이제 캐나다에 왔으니 가족들이 행복해지겠지. 곧 해피엔딩이 나오겠지.  


하지만 미국에서의 시간은 치안의 가족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애정이 넘쳤던 엄마와 아빠는 서로를 증오하게 되고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겨우 6년 정도의 시간을 보냈을 뿐인데.



굳이 뽑자면 이 책의 해피엔딩은 작가가 오랫동안 숨겨온 비밀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순간이다. 흙속에 묻어놓았던 더러운 꼬마 아이를 다시 파내서 세상에 꺼내놓는 순간이다.  이 부분에서 살짝 울었다.  법원에서 clerk*일을 하다가, 당시 모시던 판사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처음으로 털어놓자 판사가 말한다.


"Secrets.  They have so much power, don't they?" "비밀은 정말 큰 힘을 가지고 있어. 그렇지 않니?"


*미국이나 캐나다에는 Clerking 제도가 있다. 법대 졸업 후 법원에서 일종의 수습직을 하면서 일을 배우는 프로그램이다.  판사 밑에서 서기나 시보 같은 역할도 하고 그날 맡은 사건을 정리하거나 판사의 판결을 기록하기도 하고 판결문을 위한 리서치까지, 많은 일을 한다. 경쟁률이 높기 때문에 성적은 당연히 좋아야 하고 글도 잘 써야 한다. Clerk를 한다고 해서 판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캐나다는 판사로 임명되려면 10년 경력이 필수다.) 그러나 후에 로펌에 들어갈 때 짱짱한 스펙이 된다.


치안의 이야기를 읽고 내가 느낀 건 울분과 비애였다.  혼란스럽고 애통다. 마음이 아팠다.


언젠가 글로 자세히 담아볼 기회가 있겠지만, 이민 1.5세의 아이들은 부모의 짐을 어깨에 이고 자란다. 언어의 장벽을 넘지 못하는 부모 대신, 부당함에 맞서 싸워야 하며 정당한 대우마저 쟁취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권리나 혜택도 알아야 행사할 수 있고, 알아야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은 공격을 먼저 배우고 방어가 본능이 된다. 이민을 가지 말란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말이 안 통해도 부모는 어른의 역할을 스스로 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의 번역본이 한국에 나왔으면 좋겠다. 어쩌다 보니 요즘 변호사들이 쓴 책을 많이 읽었다.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 또한 전직 변호사가 쓴 책이다.) 언젠가 그런 말을 본 적이 있다.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한 자들이 변호사가 된다고.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말이라 생각했다. 변호사들 중에는 어릴 때 책벌레였던 사람들이 많고,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너무 현실적이었던 자들도 변호사가 되겠지. 나는 작가보다는 그저 평생 책이나 보면서 살고 싶은 사람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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