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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테나 Dec 23. 2022

여자를 살리는 여자들 - 최은영의 소설 "밝은 밤"


84년생 여성작가의 책을 (심지어 베스트셀러가 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소설이 소비된다는 것이 얼마나 희망을 주는 일인가.


누군가의 추천이나 서평을 읽은 건 아니었는데, 운 좋게 고른 책 중 #밝은밤 이 있었다. 2022년 초, 한국을 방문했을 때 열흘의 자가격리 중 읽은 책이다. 당시 오미크론의 등장으로 해외입국자는 무조건 열흘의 자가격리를 견뎌야 했다. 격리기간동안 해야 할 일거리를 챙겨갔지만 열흘 내내 일만 할 수는 없으니 읽고 싶은 책 리스트를 만들어 언니에게 배송을 부탁했다.   


삼천이새비. 이 책은 그 두 여자가 서로를, 그리고 각자를 지켜낸 이야기다. 삼천과 새비의 이야기는, 그들의 딸들 '영옥'과 '희자', 영옥의 딸 '미선', 그리고 미선의 딸 '지연'의 이야기로 이어져 나간다.

새비와 삼천 - 그 둘의 관계는 '우정'이라는 평면적인 단어로는 표현이 불가하다. 상대에 대한 깊은 사랑과 (고된 삶을 잘 살아내길 바라는) 염원이 있다. 피가 물보다 진하다지만 이들 사이엔 피보다 더 끈끈한 무엇이 있다.


백정의 딸이라는 이유로 사람 취급도 못 받은 삼천에게 그저 사람대접을 해준 새비. 그리고 삐쩍 마른 모습으로 개성에 나타난 새비를 보고 진심으로 마음 아파한 삼천이.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격동의 시대를 살아내며 둘은 서로에게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단단한 디딤돌이다.


새비 아주머니는 그런 사람이었다. 사람의 노력을 알아보고 애쓴 마음을 도닥여주는 사람. 겨울에 빨래를 하고 있으면 손이 시리지 않은지 물어보고, 장을 봐오면 다녀오는 길이 힘들지는 않았는지 물어보는 사람. 예전처럼 자기 마음을 살피는 새비 아주머니의 모습을 보니 할머니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여자를 살리는 것은 여자다. 여자의 적 또한 여자라지만, 난 여자를 살리는 여자들이 더 많다고 믿는다.


아기 엄마가 되고도 어른은 아니었던 내가 황망한 정신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때, 그저 엘리베이터 앞에서 인사 몇 번 나눈 것이 전부였던 옆집 백인 아줌마가 우연히 마주친 나에게 "어떻게 지내니? 넌 괜찮니?"라고 한마디 물어오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날을 기억한다. 내 아들은 이제 겨우 생후 2-3개월이었고 그 집 아들은 딱 한살이 더 많았는데, 나와 옆집 아줌마의 나이 차이는 어마어마했다. 그녀는 결혼도 출산도 매우 늦게 한 축이었으니.


남편이 눈치채지 못했던 (또는 모른 체했던) 나의 정신 상태를 그녀는 당연하게 물어왔고, 먼 친척 언니인 듯 나를 다독여주었다. 지금도 나는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한다.

아깝다고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되지 않갔어. 기냥 충분하다구, 충분하다구 생각하구 살면 안 되갔어? 기냥 너랑 내가 서로 동무가 된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주면 안 되갔어?


격리가 끝나고 친정을 떠나 서울의 언니 집으로 올라갈 준비를 하면서 새삼 마음이 쓰였다. 언니네서 다 같이 북적거리고 있다가, 내가 떠난 후에 부모님이 다시 시골집으로 오시면 허전하시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엄마 화장대 서랍에 편지를 하나 써서 숨겨두었다. 공항에서 마지막 통화를 하면서 내가 선물을 남겨뒀으니까 집에 내려가시면 화장대 서랍을 보시라고 살짝 말씀드렸다. 허전한 마음보다는 약간 들뜬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시길 바라며. (말씀드리고 나서 살짝 걱정은 했다... 혹시 돈봉투를 기대하시면 어떡하지... 돈도 좀 넣어둘 걸 그랬나? 하고...)


#밝은밤 에서 빌려와서 나도 저렇게 썼다. 아쉽다고 허전하다고 생각하시지 말고, 함께 있는 동안 충분히 즐거웠다고 생각하자고. 이렇게 온전히 열흘을 서로에게만 집중해서 함께 지낼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이냐고.


몰래 편지를 써서 남기며 괜히 실없는 눈물이 나서 혼났다. (물론 정확히 이틀 후에 겨울무가 몸에 좋다며 생무 조각을 권하는 엄마에게 한번 그리고 두 번 거절한 뒤, 그래도 먹으라고 무를 주시는 엄마께 "아, 안 먹는다고!!!!" 소리 지르는 딸로 돌아왔다.)


사실 책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글이 너무 길어질까 두려워진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렇게 긴 글을 누가 읽나. 그렇지만 아무도 읽지 않아도, 이건 나의 기록이니까. (내 글을 가장 많이 읽는 사람은 단연코 나다.)


"너무 상처받아서, 아파서 소리를 지른 게 죄가 될 수는 없어요."


밝은 은 옛날이야기만 있는 책은 아니다. 여자들이 사는 이야기다. 힘든 시절을 견딘 우리네 할머니도, 현재를 사는 우리도, 저마다의 고통을 견디며 산다.


아프면 "악"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게 맞다. 나쁜 사람은 미워해도 되고, 화나면 표현해도 된다. 나에게 잘못을 한 모든 이들을 지금 당장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복잡하고 아프고 상처받고 상처 주는 것이 우리니까.


나를 아프게 하는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말해보자. 아프다고. 나는 상처받았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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