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셈플의 "어디갔어, 버나뎃" -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자마자 리뷰가 쓰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그야말로 완전한 즐거움. 그 기분이 너무 좋았다. 책을 산 지 6개월이 넘도록 손이 안 가다가 며칠 전 번뜩 생각이 나서 침대 옆에 쌓인 책 더미 중에서 골라냈다.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니 마지막 페이지에 다다를 때까지 책을 내려놓고 싶지 않을 만큼 재미있게 읽었다. 편지, 이메일, 보고서, 일기 등등을 묶은 듯한 구성도 좋고, 화자의 캐릭터가 명확하게 느껴지는 톤도 좋다.
끊임없이 햇빛이 내리쬐는 L.A.에서 끊임없는 비가 내리는 시애틀로 이사 온 버나뎃은 왕년에 천재 소리를 듣던 건축가이자 아티스트이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주요직을 맡고 있는 천재 남편, 그리고 똑똑하고 착한 딸과 함께 무너져가는 저택에서 살고있다. 그녀는 시애틀을 증오하고, 시애틀의 운전자들을 증오하고, 딸이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들을 증오한다 (아, 그리고 시애틀을 증오하는 이유 중 하나가 캐나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다. 캐나다 사람인 필자는 이 부분에서 현웃 터짐.)
버나뎃의 대인기피증은 심각한 수준이다. 가족 외의 사람들과는 접촉을 거의 하지 않고 비대면 비서까지 고용한다. 그런 그녀에게 날벼락이 떨어진다. 똘똘이 딸이 완벽한 성적표를 받아오면서 예전부터 약속된 소원권을 쓰게 되는데, 딸이 원하는 건 바로 세 가족이 함께하는 남극 여행. 그때부터 사건이 터지기 시작한다. 말도 섞기 싫은 앞집 여자(같은 학교 학부모)와의 트러블 또한 최악의 상황으로 달려간다. 딸이 다니는 사립학교의 야심 찬 이벤트(어떻게든 잘 나가는 학부모들을 더 끌어와서 학교의 위상을 높이고 기금도 모으고 학교도 증축하고, 뭐 그런?)가 준비되는 과정 또한 배꼽을 잡게 한다.
어디갔어, 버나뎃은오락성이 짙은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들여다보게 만든 책이었다. 넷플릭스에 영화도 있는데 책과 약간 다른 부분도 있지만 영화도 재미있다. 한글번역판은 아직 안 나온 듯하다. 영어로 읽는다면 난이도는 중간쯤? 말하는 투로 적혀 있어 가독성이 좋다.
원래 사립학교는 (특히 작은 학교일수록) 학부모들의 참여가 거의 강제 시 되는 게 현실이다. 행사가 있으면 나와서 노동력을 제공하고, 필요한 먹거리들을 조달하고, 체험학습을 위해 직장을 오픈하고. 한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북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나 또한 학교에 찍히지 않기 위해, 새 학년이 되면 제일 먼저 자원봉사 신청을 하고, 학교 행사가 있으면 물질이든 발품이든 한 가지는 보태려고 노력했다. (사실 자원봉사는 일 년에 딱 한 번 - 학기 초에 제일 먼저 뜨는 공고에 발 빠르게 신청해서 첫 번째 행사에만 참여했다. 일단 첫빠따로얼굴도장을 찍으면, 아무개 엄마는 무언가를 했다는 기억이 남을테니 그 한 번으로 일 년을 버틴다. 나의 꼼수랄까.) 해마다 학부모들은 돈을 퍼붓는데, 필요한 시설과 기구는 왜 계속 늘어가는지. 나도 없는 3D프린터가 고삐리들이 대체 왜 필요한 건지.
학교에서 보태지 않아도 일하는 엄마는 너무 바쁘다. 특히 아이가 저학년이었던 나의 30대는 매일매일이 업무와의 전쟁이었다. 그런 나와 달리, 학교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좋은 학부모들", 학교 일에 정말 열심인 부모들이 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버나뎃처럼 나도 그들에 대한 증오와 무시를 내 속에 품고 산다. 그것이 나만의 무기라도 되는 양. 그냥 두면 녹이라도 슬까, 때때로 나의 증오를 꺼내서 갈고 닦는다.
나의 형편없음이 드러나도 어쩔 수 없다. 집을 반짝반짝하게 가꾸고, 아이들 먹이는 것에 집착(봐라. 단어 선택에서 이미 내 생각이 드러난다)하고, 유기농 스낵과 제철 과일 등의 건강한 먹거리로 도시락을 채우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는 부모들에 대한 반감. 그 뿌리가 실은 못난 열등감과 죄책감임을 알면서도.
집이 좀 지저분하면 어때. 그런 사소한 일에 스트레스받으면서 살고 싶지 않아. 아이 간식 일일이 싸줄 시간이 어딨어? 학교에서 사 먹으면 되지. 숙제 체크라니. 스스로 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는 거 아냐?
중요하지 않은 일로 치부하면서 살았지만 사실은 나의 "엄마 노릇"이 열등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말을 제외하면 아이 저녁을 주 2회 이상 챙겨준 적은 손에 꼽힐 정도고, 숙제 체크는 저학년 때도 내 소관이 아니었다. 그 결과 우리 집 남자들은 엄마 없이 살아남는 법을 일찌감치 깨우쳤다. 고등학생이 된 아이에게 이제 와서 "숙제는 했니?" "요즘 뭐 배우니?" 묻는 것도 웃긴 일이다.
운전을 못 하는 앞차를 증오하거나, 내가 못하는 일들을 뚝딱뚝딱해내는 다른 여자들을 증오하거나, 일도 가정도 놓치지 않는 여자들을 증오하거나. 내 속에 있는 증오의 뿌리는 결국 나에 대한 미움이다. 버나뎃은 더 이상 창작하지 않는 자신을 미워했을 수도.
우리 모두 마음속에 "미친 X" 하나씩 키우며 살지 않나.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는 내 안의 미친 X에게 한번 말을 걸어보자. 그리고 한번 들여다보자. 내 증오의 뿌리는 과연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