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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테나 Dec 13. 2022

제5도살장 - 커트 보니것이 전쟁을 말하는 법

망가진 자의 눈으로 보는 전쟁

전쟁 이야기란 바로 이렇게 쓰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전쟁을 그리는 방법은 많이 있겠지만,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은 다른 전쟁 이야기들과 좀 다르다.  작가는 전쟁을 묘사하기보다 전쟁으로 인해 망가진 자의 눈으로 그 잔혹한 실상을 보여준다.  


첫 챕터부터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반쯤 자서전의 형식을 띠는 이 책의 화자는 작가이고, 주인공은 빌리 필그림이라는 사람이다.  책의 첫 줄에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모든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대체로는.  전쟁에 관한 부분은 어쨌거나 거의 사실이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은 정말로 드레스덴에서 찻주전자를 훔친 죄로 총살당했다. 다른 한 사람은 실제로 전쟁이 끝난 후 청부살인업자를 사서 자신의 원수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그 외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름은 다 바꿨다.

All of this happened, more or less.  The war parts, anyway, are pretty much true. One guy I knew really was shot in Dresden for taking a teapot that wasn't his. Another guy I knew really did threaten to have his personal enemies killed by hired gunmen after the war. And so on. I've changed all the names.

미국인 빌리 필그림(Billy Pilgrim)은 2차 대전에 참전용사로 유럽에 보내졌다가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히게 된다. 사실 그는 이렇다 할 전투에 참여하지도 못했는데 어쩌다 전쟁 포로 신세가 되고 고생 끝에 그림처럼 아름다운 독일의 남동부 드레스덴의 포로수용소로 옮겨진다. 하지만 도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름다운 도시 드레스덴은 영미 연합군의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다.


작가 커트 보니것은 실제로 2차 대전에 참전했으며, 드레스덴이 폭격을 맞을 때 전쟁 포로로 그곳에 있었고, 포로수용소로 전환된 가축 도살장에서 지냈으며, 빌리 필그림처럼 정육을 보관하는 창고에서 폭격을 피했다.



책의 앞부분에서 작가는 이 책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말한다.  전쟁에서 돌아온 후 작가는 자신이 드레스덴에서 겪은 일에 대해 엄청난 책을 쓸 거라며 떠들고 다니는데, 그 이야기를 쓰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시간이 흐르고 이젠 정말 써야겠다며, 전쟁 당시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같이 참전했던 전우이자 친구 오헤어 (O'Hare)를 만나러 가는데 (오헤어는 검사가 되었다), 오헤어의 와이프가 작가를 싫어하는 티를 팍팍 낸다. 남편이 친구랑 이야기하는데 부엌에서 괜히 쿵쾅거리면서 '나 심기 불편하다고' 티를 내는 식이다.  그 이유가 드러나는 부분에서 친구의 와이프가 말한다.


"You were just babies then!" (당신들은 그저 아기들이었어)

"What?" (뭐라고?)

"You were just babies in the war - like the ones upstairs!" (전쟁에 갔을 때 당신들은 아직 아기들이었다고 - 위층에서 놀고 있는 저 아이들처럼!)


이 부분에서 울컥했다.  그녀는 작가가 전쟁을 미화하는 책을 쓸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남자라고 하기엔 아직 앳된 소년들이 전쟁터에 가서 참혹한 가해자가 또는 피해자가 되는 이야기를 영웅담으로 써낼 거라 생각한 것이다.  작가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거라며 그녀에게 약속한다 - 이 책을 "소년십자군"이라고 이름 짓겠노라고.  그래서 원제가 "Slaughterhouse-Five - The Children's Crusade" (제5도살장 - 소년십자군)인가 보다.  



작가는 자신의 책에 대해 출판사의 Sam (에디터쯤 되지않을까)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무 짧고 뒤죽박죽이지만, 그건 학살에 대해서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야.

It is so short and jumbled and jangled, Sam, because there is nothing intelligent to say about a massacre.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자기가 "시간"에서 풀려났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일생 중 한 부분을 랜덤으로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시간여행이나 타임슬립 같은?)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빌리가 자신에게 일어났다고 믿는 외계인 납치이나 타임슬립은 소설이라는 장치 속에서조차 선뜻 빠져들기 어렵다.  오히려 읽을수록 빌리의 위태롭고 황폐한 마음, 전쟁이 남긴 상처, 이런 것들만 보일 뿐이다.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없었던 일'이 될 수는 없는 빌리의 병든 마음만이 가슴속에 남는다.  그래서 놀라웠고, 전쟁 이야기는 이렇게 쓰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그곳에 있었던 사람의 무너진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 마음을 후벼 팠던 다른 한 부분을 옮겨본다.  이 대목이 다른 사람의 마음에도 진한 흔적을 남기기 바라며.


난 내 아들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학살에 참여하지 말 것이며, 적군들이 학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만족스러워하거나 기뻐하지 말라고 했다.  또한 학살을 위한 기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지 말 것이며, 그런 기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경멸하라고 했다.


I have told my sons that they are not under any circumstances to take part in massacres, and that the news of massacres of enemies is not to fill them with satisfaction or glee.  I have also told them not to work for companies which make massacre machinery, and to express contempt for people who think we need machinery like that.



단연 위스키가 가장 어울리는 장르다. 묵직하면서 또 향기로운 버번위스키에, 오렌지 비터의 씁쓸함과 시럽의 달콤함을 추가한 Old Fashioned 한잔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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