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지음, 문학동네, 2025년 6월 5일 발행
2025년 8월에 읽음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은 가족의 하나의 농담과 하나의 비극을 빌려 태어났다고 한다.
“우린 정말 하와이에서 만나 제사를 지내야 해.” - 작가 어머니의 형제들이 북미나 중남미에 흩어져 살고 있어 작가 어머니가 종종 하시던 농담과 한국전쟁 중 국군의 손에 돌아가셨다는 작가의 작은 할아버지의 비극.
그 농담 하나와 비극 하나를 출발점으로, 작가의 할머니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바꿔 심시선이라는 인물을 지어내고 심시선에게서 뻗어 나온 자손들이 심시선이 죽은 지 10년 되는 해에 하와이에서 그녀의 제사를 지내기로 하면서 각자의 방식으로 그녀를 추억함과 동시에 딸, 아들, 손녀, 손자 각자의 현재가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작가의 할머니가 가질 수 없었던 삶을 소설로나마 드리고 싶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자, 한국 사회에 떠도는 혐오, 제국주의와 생태주의, 친밀감과 이해에 관한 이야기로 설명한다. 그 시대에 없었을 인물, 그래서 죽은 지 10년이 지난 뒤에도 세상을 여전히 놀라게 하는 인물, 심시선이라는 인물과 그녀의 조각을 품은 자손들, 심시선의 가계 이야기.
먼저 심시선의 남편과 아들, 손자 등, 이 소설에 등장하는 심시선의 곁에 섰거나 심시선으로부터 뻗어 나온 남자들은 하나같이 색이 옅다. 여자들의 내조 혹은 희생을 양분 삼아 사회적 성공을 이루고 그렇게 얻은 권위를 집으로 가져와 가정 내에서도 권력을 공고히 하던, 전통적인 가부장의 모습은 이들에게서 찾을 수 없다. 대신 기센 여자 형제들 사이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자기만의 예술 세계에 빠져 있는 듯한 명준(시선의 아들)이나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힌 자기 자신에게서 상처입을 줄 아는 규림(시선의 손자, 경아의 아들)이 있을 뿐이다. 심시선을 예술의 세계로 끌어들인 작가 마티아스라는 인물이 꽤나 치졸하게 묘사되기는 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들만 있다면 세상이 평화로웠을 것 같은, 작가가 만들어낸 판타지가 아닐까 싶은 인물 설정이다.
반면에 심시선에서 뻗어 나온 딸들과 손녀들, 심지어 며느리는 흐릿한 남자들과 달리 자기 색이 분명하다.
명혜(시선의 첫째 딸), 명은(시선의 둘째 딸), 경아(시선의 막내딸, 친딸은 아니다)는 시선의 딸답게, 일단 말이 많고, 말이 많고, 말이 정말 많은…… 깨어있는 여장부들이다. 난정(시선의 며느리, 명준의 부인)은 말수는 적지만, 어린 시절 아팠던 우윤을 돌보며 불안을 이기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해 책을 쌓아놓고 읽는, 심시선도 인정한 다독 가다. 화수(명혜의 큰딸)는 어릴 때부터 똑 부러지고 착한 모범생이었으나, 회사에 앙심을 품고 찾아온 거래처 남자가 불특정 다수의 경영지원팀 직원들에게 뿌린 염산을 맞아 얼굴에 상처를 입고 아이도 유산한 이후 PTSD에 시달린 채, 방황하는 인물. 지수(명혜의 작은 딸)는 모험심이 강하고 오픈 마인드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DJ를 하고 있다. 사촌인 우윤과 절친이다. 우윤(명준과 난정의 딸)은 어린 시절 많이 아파 병원 신세를 졌지만 늘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괴물 크리에이처 디자이너로 미국에서 일하고 있다. 해림(경아의 딸)은 조금은 병적으로 딱새에 집착하는 새 연구가. 학교에는 잘 적응하지 못한 듯하다. 하나같이 독립적이고 자기 색이 분명하다.
이 인물들이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심시선이 예술과 연을 맺기 시작했던 하와이로 가, 세상에 없던 방식으로 - 시선에게 각자 가장 멋진 것을 선물하기 - 그녀의 첫제사를 준비하며, 자신이 현재 가진 상처를 극복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이 책은 몇 년 전에 한번 읽고, 이번에 두 번째로 읽었는데 이번에는 처음 읽을 때와 다르게 좀 더 술술 읽혔다. 처음에 읽을 때는 마치 김수현 드라마를 보는 듯 인물들이 말이 정말이지 너무 많아 조금……피곤했는데, 이번에는 작가에 대입해 작가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을 심시선을 빌려, 심시선에게 뻗어 나온 여자들을 빌려하고 있구나 싶어 좀 더 너른 마음으로 술술 읽을 수 있었다. 특히 ‘예술가'에 관한 말들이 인상 깊었다. 말이 많으셨고 똑똑하셨던, 12년 전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도 떠올랐다.
언제나 그렇듯, 책을 읽으며 표시해 두었던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적어본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할머니와. (중략)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가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계속된다는 말은 좀 미묘하지만, 육체의 죽음을 받아들이자 육체가 아닌 부분은 지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할머니는 강렬한 인물, 보편적이지 않은 인물이었다. 성격상 쉽게 분쟁에 휘말리는 편이었고, 그럼에도 자기 의견을 좀처럼 굽히지 않았으며, 대중의 가벼운 사랑과 소수의 집요한 미움을 동시에 받았다. 쉽사리 희미해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 p.16
“어떤 자살은 가해였다. 아주 최종적인 형태의 가해였다. 그가 죽이고 싶었던 것은 그 자신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도 나의 행복, 나의 예술, 나의 사랑이었던 게 분명하다.” - p.216
“그 모든 걸 꿰뚫어보던 사람이 왜 자기한테 일어난 일을 소화하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렸지? (중략) “가스라이팅, 그루밍 뭐 그런 것들. 구구절절 설명이 따라붙지 않게 딱 정의된 개념들을 아는 것과 모르는 건 시작선이 다르잖아.” - p.219
“수집가나 애호가가 되어 욕구를 해소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운이 좋지 않습니다. 결국 일에도 뜻이 없어지고 주변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저보다 훨씬 가난한 예술가들 곁에서 머물며 소비만 하다가 자기 자신도 소모해 버립니다. 주로 술과 도박과 별의별 파괴적인 것들이 끼어들어 소모를 가속시키고요. 차라리 예술을 편히 시작할 수 있었을 나이에 시작했더라면, 그 성취나 결과가 형편없었을지는 몰라도 나았을 겁니다. 물론 언제든 시작할 수 있기야 하지만 취미가 아닌 직업으로서의 예술은 대개 너무 늦지 않게 시작해야 하니까요. 예외적으로 뛰어난 몇 사람이 사십에, 오십에 시작하는 경우에도 진입구 자체는 훌쩍 좁아진 후입니다.” - p.266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불리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중략) 일이 아닌가? 그런데도 대가들일수록 질려하지 않았다. (중략) 즐거워했다는 게 아니다. 즐거워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드물다. 질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하다.” - p.352 - p.353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었던 거야, 그 사람이 죽고 없어도. 우윤은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건조한 답을 택했다. “속상하면 울 수도 있지.” - p.363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손맛이 생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무것도 당연히 솟아나진 않는구나 싶고 나는 나대로 젊은이들에게 할 몫을 한 것이면 좋겠다. 낙과 같은 나의 실패와 방황을 양분 삼아 다음 세대가 덜 헤맨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 p.365
“ “선셋이라는 단어 좋지 않아? 에스 자가 두 번이나 들어가잖아.” 화수가 말했고, 오랜만에 그 옆모습이 좋아 보였으므로 상헌은 누그러지고 말았다. 대답은 이미 알지만 한참 끌다가 말해줘야지, 마음먹었다. 심술에도 시옷 자가 두 번 들어가니까.” “ - p.374
“픽션은 존재하는 사람들과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대화” -p.380
“우윤과 규림과 해림은 각자의 이유로 시선에게서 뻗어 나온 가지의 끝이 되기로 조용히 마음먹었고 말이다. (중략) 화수는 멈추고 끊겨 전달되지 않을 것들을 헤아려보았다. 어릴 때 엄마들이 머리를 묶어주던 여러 방식, 변형된 자장가들, 절판된 그림책들, 배앓이를 할 때의 민간요법, 카나페 레시피들, 냉동실의 미니 눈사람, 잔 흠집으로 뒤덮여 그것이 무늬처럼 된 반지, 함께 제야의 종소리를 듣기 위해 모이던 습관, 카드놀이의 이례적인 규칙, 죽고 없는 사람들이 가득한 사진 앨범들, 무겁지만 시원한 대나무 돗자리, 변색된 병풍, 마흔 살짜리 화분, 우표 부분이 다 뜯겨나간 편지들, 홀수로 남은 잔들……“그렇지만 상실감도 물려주지 않을 수 있겠네.” 화수가 중얼거리자 우윤도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건 그것대로 좋겠다.” 생략된 부분도 전해진다는 점에서 안도감이 들었다.” - p.397 - p.397
“ “노란색을 입었어, 내가 몰래 넣어놓은 걸 입었어"하고 기뻐하면서 속삭였다. 해림의 티셔츠 색깔 말고도 무언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앞서 짚기보다는 천천히 발견해나가기로 마음먹고 등을 기댔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냈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 p.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