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쓰고 앉아 있네", 문지혁

by 아나스

소설 쓰고 앉아 있네 (문지혁 작가의 창작 수업)

문지혁 지음, 해냄 출판사, 2024년 9월 3일 출간

2025년 12월에 읽음


연말에 싱가포르 방문 예정인 지인이 있어, 지인에게 부탁해 오랜만에 종이책으로 구매했다.

받자마자 단숨에 읽었다. 그리하여 이 책이 2025년 내가 읽은 마지막 책이 되었다.


작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뭐라도 써볼 요량으로 20년 전 사두었던 온갖 스토리텔링 작법서를 뒤져봤지만 소설에 바로 적용하기엔 애매한듯해 막막했다. 대학 때 소설 쓰기 수업을 듣고 단편 창작 과제도 해봤지만 그것도 벌써 수십 년...... 전('십수 년'이라고 적었다가 '수십 년'인 걸 깨달았다......)이 되어버렸기에, 그저 '소설? 그게 뭔가요' 싶은 멍한 상태. 그즈음, 유튜브에서 문지혁 작가님의 소설 쓰기 강좌를 만났다. 유튜브에 올라온 강좌들은 아마도 여러 강좌의 조각들이라 체계적으로 짜여있지는 않지만, 현직 작가가 직접 이야기하는 소설 쓰는 방법이라선지 나 같은 초짜가 듣기엔 딱이었다. 그러다 이 작가님이 [소설 쓰고 앉아 있네]라는 에세이+작법서를 출간하셨다는 걸 알게 되고, 마침내 종이책으로 구매해서 읽었다.


왜 글을 쓰려하는지, 이것이 재능의 영역인지 아닌지, 어떻게 영감을 얻고 어디서 어떻게 써야 하는지 등등, 본격 글쓰기에 들어가기 앞서 생각해 봄직한 것들은 1부 '책상 앞에서'에 담겨 있다.


인상적인 부분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뭐든 처음 쓰는 것은 다 쓰레기다(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shit.)" (중략) 글쓰기(writing)란 언제나 다시 쓰기(rewriting)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초고는 다 비슷하게 별로입니다. 이를 누가 더 많이, 오래, 될 때까지 끈질기게 고칠 수 있느냐가 우리를 아마추어와 프로페셔널로 나누는 기준입니다. 초고의 완성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고치기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은 결코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없습니다. (중략) 좋은 작가란 긍정적인 의미에서 직장인과 같아요. (중략) 그 길고 건조한 무채색의 지루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이 마침내 좋은 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p.28-p.29


작업량과 작업시간을 정해놓는 것이 중요하다 (중략) '지키려고 하는 동안' 무언가가 만들어집니다. -p.56

'백지에서 시작하지 않기' 파트에서는, '영감의 냉장고'라는 개념을 통해 평소 일상에서 떠오른 아이디어, 이미지, 단어, 문장 등 여러 재료를 모아놓고 그것들을 꺼내놓는 것으로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단어, 문장, 사진, 그림, 무엇이든 꺼내 눈앞에 펼쳐놓으세요. 점들을 흩뿌려놓고 이것들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를 그려보세요. 도입이든, 결말이든, 장면이든 사건이든 인물이든 대사든 플롯이든, 0에서 시작하지 않는 것이 핵심입니다. (중략) 우리에게는 수많은 점과 완결되지 않은 단어들과 부서진 문장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힘이 셉니다. 연결만 하면 돼요. 바로 지금부터. -p.57, p.58

20대에는 일기장과 싸이월드, 블로그에, 30대에는 역시 일기장과 또 다른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에 이런저런 메모들을 해놓았지만 온라인에 끄적여둔 것들은 해당 서비스 종료 및 서비스 갈아타기로 휘발되어 버렸고, 일기장은 어딘가 처박아놨기에 이 파트를 읽을 땐, 내 '영감의 냉장고'는 텅텅 비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어 울적해졌다. 하지만 뭐, 없으면 다시 하면 되니까.


초고 빨리 쓰기와 뛰어넘기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한 달째 초고를 붙잡고 이도저도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일단 글이 안 풀릴 때는 과감히 '스킵'해도 된다고 한다. (아싸! 감사합니다!)


둘이 싸움. A가 이김. B는 도망침. 그리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p.61 (중략) 초고를 쓰는 동안 우리는 단어 선택이나 문장의 완성도, 아름다운 메타포나 섬세한 묘사 같은 부분에 매달릴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은 끝까지 내지르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p.62


그 외에도 마음에 새길만한 태도.

- 독자로서 읽는 것이 아니라 작가로서 책을 읽는 것: 독자로서 누리던 독서의 즐거움을 포기하더라도, 분석적이고 심층적이고 객관적으로 읽는 것.

- 작법서 활용: 예술은 불(영감)과 수학(규칙)의 결합이며, 불은 각자 준비해야 하지만 수학은 배울 수 있으므로 작법서를 활용.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반복해서 공부할 때 효과적.



책의 2부는 시점, 서술과 플롯, 묘사와 디테일, 대화와 대사, 합평과 퇴고 등 본격적인 글쓰기 테크닉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이야기에 깊이 부여하기'파트의 서술이 와닿았다. 주인공의 목표는 외면적 목표(external goal)와 내면적 목표(internal goal)가 있을 수 있는데, 이는 늘 이중적이어야 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둘 다 이루면 '동화적 엔딩', 외면적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내면적 목표를 이루었다면 '해피 엔딩'(희극), 반대의 경우엔 '새드 엔딩'(비극), 둘 다 이루지 못했다면 그저 우울한 엔딩.


진정한 깊이는 동화처럼 우리를 구름 위로 날게 하거나, 우울한 엔딩처럼 끝없는 구덩이 속으로 떨어뜨리지 않습니다. 모순과 역설과 어긋남 속 어딘가 새로운 곳에 우리를 도착하게 해 줍니다. - p.75

3부에서는 작가가 되기까지, 그리고 되고 난 후의 개인적인 스토리, 즉 작가로서의 여정을 풀어내고 있다. 유튜브 강의에서도 언뜻 말씀하셔서 알고 있지만, 오랫동안 글을 써왔고 포기할 뻔도 했지만 계속 해낸 덕분에 책을 내시고 작가가 되시고 여전히 글쓰기를 사랑하고 해내시는 분. 그 과정이 담담히 그려져 있지만, 나라면 같은 상황에서 해낼 수 있었을지...... 대단하다는 말밖에. 그래서 한편으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일정한 시간에 앉아서(제목의 '앉아 있네'의 의미이기도.) 일정하게 써내는, 노동자처럼!! 쓰라는 그 태도를 가슴에 새기며.


가볍게 읽기 쉽게 쓰여있지만, 소설 쓰기 입문자에게는 아주 알찬, 그런 책이었다.

노트북 옆에 꽂아두고 틈틈이 꺼내 뒤적이게 될 작법서가 될 것 같다.


사실 아직 문지혁 작가님 소설은 안 읽어봤는데...... 이 참에 읽어봐야겠다!



<목차>

프롤로그 | 소설을 쓰고 앉아 있는 사람


1부 책상 앞에서


1장 글쓰기를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ㆍ 글쓰기는 예술일까?

ㆍ 글쓰기는 재능일까?

ㆍ 글쓰기는 단번에 하는 것일까?

ㆍ 영감을 얻는 방법


2장 작업실 만들기

ㆍ 물리적 공간: 어디서 쓸까?

ㆍ 내면적 공간: 무엇을 준비할까?

에세이 #01 라이팅-스페이스-타임


3장 작가의 독서

ㆍ 작가의 눈으로 읽기

ㆍ 작법서 활용하기


2부 책상에서


1장 ‘나라는 이야기: 사라진 보물선은 내 안에 있다

ㆍ 경험에서 시작하기

ㆍ 자서전, 자전적 소설, 오토픽션의 차이

ㆍ 재현의 윤리, 윤리의 재현


2장 시점과 목소리: 바라보는 지점이 모든 것을 바꾼다

ㆍ 시점이라는 장치

ㆍ 1인칭: 세상을 ’나‘로 필터링하기

ㆍ 3인칭: 멀리, 더 멀리서 지켜보기

ㆍ 2인칭과 다중 시점: 너를 부르거나, 여럿의 목소리를 듣거나


3장 서술과 플롯: 이야기의 구슬을 꿰는 법

ㆍ 이야기, 서사, 플롯

ㆍ 스토리텔링의 힘과 법칙

ㆍ 좋은 플롯의 조건

ㆍ 이야기에 깊이 부여하기


4장 묘사와 디테일: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기

ㆍ 묘사, 시제, 디테일

ㆍ 디테일의 좌표와 실제

ㆍ 디테일의 층위와 아웃포커싱


5장 대사와 대화: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ㆍ ’말‘을 쓴다는 것

ㆍ 대사, 대화, 회화

ㆍ 좋은 대화를 쓰는 법

ㆍ 몇 가지 예문과 연습들


6장 합평과 퇴고: 듣고, 고르고, 다시쓰기

ㆍ 합평이라는 공포

ㆍ 퇴고라는 선택


3부 책상 밖으로


1장 실패를 기록하기

ㆍ 실패한 작가 지망생의 짧은 이력서

에세이 #02 『비블리온』 창작 일기


2장 문학적 소설과 그 바깥세상

ㆍ 등단과 데뷔, 문단과 문학 사이

ㆍ 순수문학 혹은 장르문학

에세이 #03 우동 거리 밖에서


3장 작가 되기와 작가살이

ㆍ 습작기를 보내는 법

ㆍ 21세기에 작가로 살아간다는 의미


에필로그 | 소설을 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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