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의 증명", 최진영 소설

by 아나스

구의 증명

최진영 지음, 은행나무 시리즈 N 7, 2023년 4월 26일 출간

2026년 1월에 읽음


강렬한 소설이었다.

이틀에 걸쳐 읽었지만 한번 펼쳤을 때 멈출 수 없는 그런, 강렬함을 가진 소설.


제목은 '구의 증명'

책을 덮을 때쯤이면, 왜 제목이 '구의 증명'인지 납득된다.


소설은 끊임없이 사랑을 얘기한다. 담과 구의 사랑.

죽어버린 구를 먹어 내 안에 담아 끝까지 함께 살아나가는 것. 계속해서 구를 기억하는 것. 그리하여 구를 증명하는 것.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

메인 화자는 담이지만, 가끔 구의 시점으로도 서술되는 이야기.

죽어버린 구를 집으로 데려와 그 몸을 닦아주고 이내 그 몸을 먹어버린 담의 이야기로 시작되어, 그들의 만남과 사랑의 역사가 각각의 시점에서 펼쳐지는 이야기.


이렇게 주인공의 내면이 직접 주인공에 의해 서술되는 이야기는, 영상화하기 참 어렵겠다 싶었다.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떨어질 수 없는, 뼈와 뼈 사이의 연골처럼 딱 맞아떨어져 버려, 죽을 때까지 함께하고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존재.


담과 구의 처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태어날 때 주어진 그들의 삶의 디폴트값에 대해. 그들의 부모, 가족, 그들이 살던 동네, 처지, 그런 것들.

결국 거기에 단 하나, 서로의 존재가 더해진 삶. 그래서 서로밖에 없는 그런 삶.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옮겨본다.


(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너를 먹고 아주 오랫동안 살아남을 거야. 우리를 사람 취급 안 하던 괴물 같은 놈들이 모조리 늙어 죽고 병들어 죽고 버림받아 죽고 그 주검이 산산이 흩어져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도, 나는 살아 있을 거야. 죽은 너와 끝까지 살아남아 내가 죽어야 너도 죽게 만들 거야. 너를 따라 죽는 게 아니라 나를 따라 죽게 만들 거야. 네가 사라지도록 두고 보진 않을 거야. 살아남을 거야. 살아서 너를 기억할 거야.


(담) 애고 어른이고 우린 도통 아는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활의 지혜 같은 것은 기가 막히게 잘 알면서도, 자기 삶을 관통하는 아주 결정적인 사실은 모른 채로, 때로는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로도 우리는 그럭저럭 살았던 것이다.


(담, 학교에 가지 않은 날 구와 마주쳤을 때) 너 왜 여기 있어? 넌 왜 여기 있어? 구와 내가 서로에게 물었다. 그 질문에는 의문보다 반가움이 더 짙게 묻어 있었다. 여기에 마침 네가 있어 이제야 말을 걸 수 있게 되었으니 설레고도 기뻐하는 마음이.


(구, 죽은 구의, '담과 자신의 세계'에 대한 서술) 겹치지도 포개지지도 않고 미끄러지는 세계


(담) 구에 대한 생각이 서서히 옅어지고 그 자리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자,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구는 엄청나구나. 구 대신 들어온 다른 것들이 터무니없이 옅고 가벼워서 구의 밀도를 대신하지 못했다. 구에 비하자면 친구나 공부나 학교 따위 너무도 시시했던 것이다.


(담) 처음 만났을 때, 구와 나는 다른 조각으로 떨어져 있었다. 함께 하던 어느 날 구와 나 사이에 끈기 있고 질펀한 감정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우리의 모난 부분을 메워주는 퍼즐처럼, 뼈와 뼈 사이의 연골처럼, 그것은 아주 서서히 자라며 구와 나의 모나고 모자란 부분에 제 몸을 맞춰가다 어느 날 딱 맞아떨어지게 된 것이다. 딱 맞아떨어지며 그런 소리를 낸 것이다. 너와 나는 죽을 때까지 함께하겠네. 함께 있지 않더라도 함께하겠네. 그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담) 입시로 시작한 이야기는 늘 취업으로 끝났다. 어떻게 하면, 어느 길로 가면 빨리 돈을 벌 수 있느냐의 문제. 빨리, 안정적으로 벌 수 있는가의 문제. 대부분 그 답을 찾고 있었다. (중략)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실패는 예정되어 있는 것 같고, 할 수 있는 일은 정해져 있는 것 같고, 그래서 이미 진 것 같았다.


(구) 아버지가 주는 술을 마신다는 것이...... 수긍의 악수처럼 느껴졌다. 당신이 내게 넘기는 짐을 잘 받겠다는 악수. 당신을 이해한다는 악수.


(구, 누나와의 대화에 대한 서술) 캐치볼이 아닌 핑퐁을 하는 느낌이었다. 서로의 말을 받아치는 것에만 집중했다.


(구, 변해버린 누나와의 관계, 누나를 통해 알게 된 자신에 대한 구의 서술) 그런데 나에게는 그러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진짜 살아 있는 마음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생생하게 숨 쉬며 시시각각 변하는 생물을 대하는 것 같다고, 말라붙지 않은 심장이 느껴져서 좋다고 말하곤 했다. 그런 게 좋았는데, 그런 게 피곤해진 것일까. (중략) 누나는 봉인된 내 감정의 염통을 풀어주었고, 덕분에 내 안에 얼마나 시뻘건 핏덩어리가 담겨 있는지 알게 되었다. 모르고 살았다면 훨씬 편했을까? 나를 지배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표현하게 된다는 건 과연 좋을 일일까? 폭군. 억울한 아이. 겁 많은 소년. 냉혈한. 섹스광. 독 같은 불안. 불만으로 달궈진 인두. 호탕한 웃음. 사랑받고 싶은 욕구. 그 끝없는 욕구. 내 안에는 그런 것이 있었다.


(담, 이모가 죽고 나서) 할아버지도 이모도 죽고 이제 구마저 없고, 나만 살아 있다. 나는 이 문장의 의미에 대해 매일 생각한다.


(담, 구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그럼...... 그냥 무로 돌려주세요.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모든 것인 상태로. 싫어. 그것도 죽는 거잖아. 죽는 거 아니야. 그냥 좀 담대해지는 거야.


(담, 이모가 남긴 엠피쓰리 라디오에 대해) 그 라디오를 아껴가며 들었다. 아끼고 아꼈다가 쉬고 싶을 때, 힘들 때, 죽고 싶을 때, 잠들기 전에 기도하듯이 들었다.


(담) 네가 있든 없든 나는 어차피 외롭고 불행해. 나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행복하자고 같이 있자는 게 아니야. 불행해도 괜찮으니까 같이 있자는 거지. 다시 구를 기다리며 살 자신이 없었다.


(담, 구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만약 네가 먼저 죽는다면 나는 너를 먹을 거야. 청설모가 되기 위해 들어온 이곳에서, 구가 말했다. 그래야 너 없이도 죽지 않고 살 수 있을 거야. 나를 먹을 거라는 그 말이 전혀 끔찍하게 들리지 않았다. 네가 나를 죽여주면 좋겠어. 병들어 죽거나 비명횡사하는 것보다는 네 손에 죽는 게 훨씬 좋을 거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 채 모로 누워 팔과 다리와 가슴으로 상대를 옭매었다.


(담, 구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지금도 있지 않을까...... 지금도 있지. 죄책감 없이. 당연하게. 쭉 그래왔으니까. 약한 놈만 골라잡으면서. 잡힌 놈이 등신이지, 생각하면서. 애들도 그렇게 키우고. 응. 잘 잡아먹는 게 능력이라고 가르치고. 후회한다면, 힘이 세지 않은 걸 후회하고. 죄책감을 갖는 게 오히려 비정상이고. 응....... 담아. 응? 우린 그렇게 키우지 말자. 뭘? 우리 애. 우리 애? 나는 웃었다. 웃으며, 우리가 무슨 애야, 하고 중얼거려다. 구는 웃지 않고 말했다. 언젠가 저절로 생길지도 모르잖아. 언젠가, 좀 안정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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