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소설

by 아나스

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문학동네, 2011년 11월 10일 발행

2025년 12월에 읽음


오래전 한강 작가님의 멘부커상을 수상 소식을 들은 후 [채식주의자]를 읽었었고,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 후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읽었었다. 아마도 한강 작가님의 가장 유명한 세 작품인 듯한데, 서늘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가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최근엔 요즘 작가(?)들의 소설작품들을 밀린 숙제 하듯 읽고 있는데, 우연히 이동진 기자와 김중혁 작가의 대담을 담은 유튜브를 보다, [희랍어 시간]이 읽고 싶어 졌다.


말을 잃어가는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희랍어 시간을 통해 만나는 이야기다.


여자는 어린 시절 실어증을 앓다 낯선 언어를 배우며 실어증을 극복한 적이 있다. 그래서 다시 실어증이 찾아왔을 때 더 낯선 언어인 '희랍어'를 통해 이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한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배운다. 그녀의 삶은, 문학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으나 실어증이 다시 찾아오고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의 양육권마저 뺏겼다.


남자는 청소년 시절 가족과 독일로 이민을 갔다가 그곳에서 희랍어를 전공하고 돌아와 한 아카데미에서 희랍어를 가르치고 있다. '인생과 언어와 문화가 두 동강 나버린' 이민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병으로 점차 시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곧 완전히 시력을 잃을 것이다.


둘 다 세상과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세상의 기준에서 정상이 아니라고 여겨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나아갈 수밖에 없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인생이다.


어느 날, 희랍어 강의를 들으러 온 여자는 아카데미 건물에 들어온 새를 발견하고 밖으로 나가게 해주려고 했지만, 남자가 다가오자 그냥 교실로 들어가 버린다. 남자는 새를 향해 다가가지만, 뿌연 시야 때문에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고 만다. 남자의 안경이 깨지고, 여자는 남자가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남자를 돕는다. 늦은 시간이라 안경을 새로 구할 수 없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남자를 도와 그의 집까지 데려다준다. 남자도 여자가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처지를 여자에게 이야기한다. 여자는 손바닥에 글자를 써서 남자에게 대답한다. 서로를 이해하고 다가가는 두 사람. 소설은 그렇게 끝난다.


이 소설에서 '희랍어'는 중요한 상징으로 쓰인 듯하다. 희랍어는 이미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죽은 언어다. 하지만 언어를 잃어버린 여자는 언어를 되찾기 위해 그 죽은 언어를 배운다. 남자는 청소년기에 이민을 가 한국인도 독일인도 아닌, 세계가 두 동강 나버린 경험을 하고 이제는 시력마저 잃어가는 중이다. 그는 요즘 세상에서 옛 학문으로 치부되는 '철학'과 '희랍어'를 공부했다.


소설에서는 여러 번 희랍어의 문법인 '중간태'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능동태와 수동태만 존재하는 현대 언어와 달리, 고대 희랍어는 '주어가 행위를 하면서 동시에 그 행위로부터 영향받는' 상태인, '중간태'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소설의 두 주인공의 처지를 설명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완전한 능동적 주체도, 완전한 수동적 존재도 될 수 없는 그들의 삶. 언어를 잃고 시력을 잃는 피해를 '당했지만'(수동태), 여자는 희랍어를 통해 언어를 되찾으려 하고 남자는 어떻게든 빛을 간직하려 한다(능동태). 수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인 중간태적 존재로서 두 주인공을 표현하고 있다.


한강 작가님의 여러 소설 속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서늘하면서도 정적인 이미지다. 소설이지만, 모든 게 굉장히 감각적으로 느껴진다. 한강 작가님의 소설을 읽을 때면, 모든 장면들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고, 그 서늘하고 정적인 감각들이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신기하다. 어떻게 이런 소설을 쓰는 건지 모르겠다. 작가님의 세계가 궁금하다. 다른 작품들도 차근차근 읽어봐야겠다.


책을 읽으며 밑줄 친 구절들을 옮겨본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 -p.6


어느 곳에서건 사진은 찍지 않았다. 풍경들은 오직 내 눈동자 속에만 기록되었다. 어차피 카메라로 담을 수 없는 소리와 냄새와 감촉들은 귀와 코와 얼굴과 손에 낱낱이 새겨졌다. 아직 세계와 나 사이에 칼이 없었으니, 그것으로 그때엔 충분했다. -p.7


허락받은 담배를 가능한 한 오래 피우는 죄수처럼, 볕이 좋은 날이면 집 앞 골목에 나가 앉아 긴 오후를 보낼 뿐입니다. -p.47


두 눈은 침묵 속에, 시시각각 물처럼 차오르는 시퍼런 정적 속에 담가둔 채. 나는 당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p.56


자라면서 그녀는 이 일화를 반복해서 들었다. 고모들, 외사촌들, 오지랖 넓은 이웃집 여자로부터. 하마터면 넌 못 태어날 뻔했지. 주문처럼 그 문장이 반복되었다. / 자신의 감정을 잘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린 나이었지만, 그녀는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섬뜩한 차가움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녀는 태어나지 못할 뻔했다. 세계는 그녀에게 당연스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수많은 변수들이 만나 우연히 허락된 가능성, 아슬아슬하게 잠시 부풀어오른 얇은 거품일 뿐이었다. -p.69


그 명석하고 아름다운 결론의 어딘가가 그녀를 불편하게 했다. 여전히 그녀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싶지 않았고, 자신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왔다고도,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억누르며 지내왔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p.72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사람이라기보다 어떤 물질이라고, 움직이는 고체이거나 액체라고 느낀다. 따뜻한 밥을 먹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밥이라고 느낀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할 때 그녀는 자신이 물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자신이 결코 밥도 물도 아니라고, 그 어떤 존재와도 끝끝내 섞이지 않는 가혹하고 단단한 물질이라고 느낀다. -p.78


세계는 환이고 산다는 건 꿈꾸는 것이다,라고 그때 문득 중얼거려 보았다. / 그러나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다. -p.95


고백하자면 , 학생들을 지켜보다 보면 문득 부러워질 때가 있어. 우리처럼 인생과 언어와 문화가 두 동강나본 적 없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을 어떤 확고함 같은 것이. -p.102


형편없는 악기인 네 육체와, 이제 곧 불러야 할 노래 사이의 정적이 벼랑처럼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중략) 우리가 그토록 연하고 부서지기 쉬웠을 때, (중략) 우리는 한 바구니에 담긴 두 개의 달걀, 같은 흙반죽에서 나온 두 개의 도자기 공 같았지. 네 찌푸린 얼굴, 우는 얼굴, 깔깔 웃는 얼굴 속에서 내 유년은 금이 가며, 부서지며, 가까스로 무사히 모아 붙여지며 흘러갔지. (중략) 내가 너보다 강해서 너를 돌볼 수 있었던 짧은 시간. -p.108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더듬더듬 커튼을 걷고, 유리창을 열고, 방충망 너머로 어두운 하늘을 봐야 하니까. -p.112


이를테면 너는, 그렇게 말할 자격이 스스로에게 있다고 믿고 있었던 거지. 세상의 어떤 불행이든 스스럼없이 대해도 될 만큼 고통을 겪어보았다고 -p.148


그 이마에 힘을 주어 주름을 더 깊게 하며 너는 나에게 말했지. / 고백하자면 말이야...... 내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책을 내게 되면, 그게 꼭 점자로 제작되었으면 좋겠어. 누군가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끝까지 한 줄 한 줄 더듬어서 그 책을 읽어주면 좋겠어. 그건 정말...... 뭐랄까, 정말 그 사람과 접촉하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p.149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p.152


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그러니까, 너에게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였찌. 햇빛이 끓어 넘치는 트램 정류장이었지. 세차게 뛰는 심장, 부풀어 오르는 허파, 아직 따뜻한 입술, 그 입술을 누군가의 입술에 세차게 문지르는 거였지. -p.167


입국장을 빠져나온 순간 깨달았어요. 가족이며 친구들을 마중 나온 한국 사람들의 사이를, 어깨를 헤치며 나아가면서...... 이제야 내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이제 모르는 사람에겐 웃거나 인사하지 않는 문화 속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걸. / 알 수 없었어요. 그 사실이 왜 그때, 그토록 뼈저린 고독감을 나에게 안겨주었는지. -p.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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