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소설

by 아나스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

이기호 지음, 문학동네, 2025년 7월 17일 발행

2025년 1월, <밀리의 서재>에서 e-book으로 읽음


이기호 작가님의 책은 처음이었다.

찾아보니, "웃음과 비애"가 주 종목인 작가라고 한다. 흥미가 돋는다.

"웃음과 비애가 주 종목인 작가가, 그간 집요하게 포착해 온 불량 해도 한심해도 인간다운 인간(최순덕, 강민호, 전진만…) 너머 악도 선도 없는 한 비인간적 존재의 서사를 좇아, 스스로 지금껏 내놓은 가장 긴 장편(528쪽)이다." - 한겨레 기사, 2025.7


[명랑한 이시봉의 짧고 투쟁 없는 삶]은 작년에 발행된 따끈한 신작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님들의 작품을 고루 읽으려고 하는 요즘, 요 근래에 발간된 2,30대 작가들의 신작들 속에서 1972년생, 1999년에 데뷔한 연식 있는(?) 작가님의 책을 발견해 반가웠다. 꽤 긴(528쪽) 소설이었음에도 책장은 후루룩 넘어갔다. 3-4일에 걸쳐 틈틈이 읽었다.


'이시봉'은 주인공 이시습이 키우는 개의 이름으로, 실제 작가님이 키우는 개의 이름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작중에서 '이시봉'은 비숑 프리제, 특히 소설 속 가상의 품종인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인 개다.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는 나폴레옹 시대, 스페인 왕실의 역사 속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아 프랑스에서 비밀리에 엄격히 관리되고 있던 품종으로, 정채민 일당에 의해 한국에 들어오게 된, 아는 사람만 아는 고귀한 품종이다.

이야기는 '이시봉'이 길고양이 형집행인에게 희생당할뻔한 아기 고양이를 구하는 영상이 인스타그램에 퍼지고 그 영상을 본 비숑 프리제 전문 케어 회사 '앙시앙 하우스' 사람들이 시습을 찾아오면서 시작된다. 그들은 '이시봉'이 '앙시앙 하우스' 대표 정채민이 그토록 찾고 있던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의 후손임을 알아보고 '이시봉'을 데려가려 하고, 이에 맞서 '이시봉'과 계속 살고 싶은 시습의 투쟁과 모험이 펼쳐진다. 동시에 무기력하기만 했던 그의 내면에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 메인 줄거리와 엮여서, 처음 '이시봉'을 데려온 시습의 아빠의 이야기, '이시봉'이라는 이름이 붙은 사연, '이시봉'의 부모 비숑을 한국에 들여온 정채민, 박유정, 김상우의 이야기, 그리고 박유정의 아들인 김태형의 이야기 등 '이시봉'을 둘러싼 인간들의 역사가 한 편에, 다른 한 편엔 '이시봉'의 조상 격인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의 역사가 교차되어 펼쳐진다. 때문에 조금 정신없기도 하지만, 결국 서로 이해하지 못해 '오독'하고 '오해'하는 인간과 개가 역사가 과거에도 현재에도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습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차 사고로 떠난 아빠가 남긴 '이시봉'이라는 비숑을 돌보며, 매일 술을 마시는 것으로 하루를 버티는 무기력한 인물이다. 동네 친구들인 정용, 수아와 나 홀로 좋아하고 있는 리다와 종종 어울리긴 하지만, 아빠의 차 사고가 이시봉 때문이었다는 걸 알고 난 후 어쩐지 이시봉에게 눈길 한 번 안주는 엄마를 피해 새벽마다 이시봉과 산에 올라 술을 마시고 내려오는 것이 그의 하루 일과의 전부다.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일을 겪는 것'이라던 아빠의 말을 떠올리며 이시봉을 알고 이해하는 일, 사랑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지만 쉽지 않다. 그런 그에게 앙시앙 하우스 사람들이 찾아와 이시봉 입양계약서를 내밀고, 무엇이 이시봉을 위하는 길인지 고민해 보지만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가 어렵기만 하다.


결국 인간과 동물 사이, 비동물과 동물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일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시습이 개 이시봉을, 그리고 그의 아빠, 엄마, 동생, 할머니, 친구들, 정채민 대표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이야기.


다소 장황하지만, 위트 있게 써 내려간 문장들 덕에 지루할 틈은 없었다.


< 시습 주변 인물 >

- 시습 아빠: 타이어 공장에서 오래 일하다 노조에 깊게 가담해야 하는 상황에서 공장을 그만두고 나와 퇴직금으로 아파트를 마련하고 피자집을 차렸다. 대신 노조에 가담해 실형까지 산 공장 동료 '이시봉'씨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개의 이름을 '이시봉'으로 지었던 것이 밝혀진다. 개 '이시봉'이 도로로 뛰어든 것을 보고 따라갔다가 차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 시습 엄마: 학습지 선생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남편이 이시봉 때문에 불의의 사고로 떠나자 이시봉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시봉을 예전처럼 대할 수가 없다. 시습과 시현을 지지하고 돌보는 와중, 모친의 병간호를 위해 시습과 시현을 광주에 남겨두고 가평으로 올라가 지낸다.

- 시습 동생(시현): 시습과 달리 공부를 잘하는 T성향이 강한 여중생. 시습이 알아듣지 못하는 유식한 말로 시습을 위로하곤 한다.

- 시습 외할머니: 암에 걸려 투병 중이지만 병원은 거부한다. 병세가 위중해져 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병간호를 하러 온 시습은 할머니에게 제 속에 있는 말을 다 꺼내놓고,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

- 리다: 시습 엄마가 학습지 선생으로 일할 때 만난 학생.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고 하는데 제대로 준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시봉 영상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 것도 리다다. 같이 사는 아빠한테 폭력을 당하며 집을 떠나려 하지만 아빠가 데려온 데리다라는 강아지를 돌보느라 쉽지 않다. 결국 데리다를 데리고 집을 떠난다.

- 정용: 시습의 친구로 고양이 집사로 살며 고양이와 서로 의지해왔지만, 고양이가 고양이 나라로 떠난다.

- 수아: 정의감 넘치는 시습의 친구. 편의점 알바를 한다. 운전을 할 줄 알아 시습과 친구들을 태우고 서울과 용인의 '앙시앙 하우스', 나주의 강아지 농장 등을 누빈다.

- 이시봉 아저씨: 시습 아빠의 옛 직장 동료. 시습 아빠가 퇴사하고 난 후, 시습 아빠를 대신해 노조 홍보부장을 맡아 회사 합병 반대 시위에 앞장서다 실형을 살았다. 그때, 교도소에서 김태형을 만나 김태형의 부탁으로 강아지 '이시봉'을 시습 아빠에게 맡긴다.

- 김태형: 박유정의 아들. 어린 시절부터 박유정의 키우던 수십 마리의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들과 함께 살아왔다. 마약에 빠져 소년원과 교도소까지 갔다 왔지만 엄마 박유정의 죽음 이후 배관일을 배워 성실히 살아가고자 한다.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경계한다.


< 앙시앙 하우스 주변 인물 >

- 정채민: 앙시앙 하우스 대표. 함바집을 운영하다 부동산 부자가 된 할머니의 지원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다. 프랑스에서 박유정과 김상우를 만나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를 한국에 들여오게 된다. 순진한 사람이지만 그래서 무서운 인물.

- 박유정: 평범한 집안의 첫째 딸로 미술을 전공했다. 대학에서 김상우를 만나는 바람에 집에 절연하고 땡전 한 푼 없이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한 학기만 다니고 펫시터 일을 하며 버티다 정채민을 만나게 된다. 프랑스에서 데려온 비숑들을 끝까지 맡아 키우던 인물.

- 김상우: 꽤 재능 있었던 미술학도. 하지만 프랑스에서 생활비만 벌다 결국 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현실을 비관한다. 정채민의 부탁으로, 비숑 프리제 두 마리를 데리고 한국에 들어온다. 임신한 박유정을 돌보기 위해 예술은 포기하고 일을 하지만, 결국 박유정과 헤어지고 떠난다.

- 미셸 브리더: 앙시앙 하우스의 브리더. 험한 일을 맡아한다.

- 남궁상민 브리더: 앙시앙 하우스에 입사한 걸 행운으로 생각했지만, 정채민의 실체를 접하고 결국 그만둔다.

- 권성희 수의사: 앙시앙 하우스의 전속 수의사. 시습에게 정채민 대표의 무서움을 경고하는 인물.



이 소설 관련 이기호 작가님의 인터뷰를 찾아봤다. 작가님이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이 소설을 쓰시게 됐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스토리텔러] 이기호가 사랑한 존재들, 그 이름은 이시봉


책을 읽으며 밑줄 그었던 문장들을 덧붙여본다.

뭔지 모르겠는데 되게 중요한 일이라면...... 그러면 뭘 좀 알아보고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


나 또한 내가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중략) 술을 마시면 더 긴장하게 된다. 술을 마시면 생활에 대해서 더 생각하게 된다. (중략) 시현의 아침 밥상을 차린다. 술이 그나마 나를 생활인으로 만든다는 것, 내 친구들은 그 사실을 알까? 내가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그러면 모든 것이 무너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것, 그 마음을 알까? 그러나 나는 한 번도 친구들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은 없다.


아빠, 아빠가 만든 게 더 나아요. 나는 아빠가 세상을 뜬 지 근 일 년 만에 처음으로 아빠에게 말을 건넸다. 피자가 너무 커서 맥주를 계속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곤 좀 취한 상태로 빈 술병을 치운답시고 재활용품 수거장까지 가다 말고, 놀이터 우레탄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갑자기 터진 울음이었다.


아빠는 어느 편이었는가 하면 시위대 옆에서 노조 깃발을 들고 말없이 서 있는 사람, 마이크를 잡는 사람이 아닌 앰프 선을 정리하는 사람이었다. 아빠와 친하게 지내던 동료들이 대부분 그랬다. 대열의 세 번째나 네 번째 줄에 서서 구호를 외치는 노동자들, 그러다가 파업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컨베이어 벨트 앞이나 발표 작업장에서 타이어와 고무를 뽑아내는 아저씨들이었다.


"너는 신이 보낸 아이야." 누이의 그 목소리만 머릿속에서 계속 떠올랐다. 그 말이 그에겐 수치심을 이기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나도 정용도 수아도 내내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우리가 서울을 보러 간 게 아니라, 서울 사람들에게 우리를 보여주러 간 거 같았다.


"생각보다 멍청하게 생겼네." 그녀는 분명 이시봉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지만, 나는 어쩐지 나를 보고 하는 말인 것처럼 들렸다.


나도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치 영화가 모두 끝난 후 비좁은 출입구로 한꺼번에 몰려든 사람들처럼 빽빽하고 더디게, 식도를 타고 자꾸 위로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그 감정을 모른 척하고 싶어서 나는 화를 내고 있는 게 아닐까? 화를 내는 게 차라리 편하니까.


쫑이에 대한 미안함이나 안쓰러움 보다는 자신의 실수와 잘못이, 그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가 더 컸다고 했다. 나는 그때 왜 미안해하지 않고 억울해했을까? 아빠는 살면서 그 말을 자주 떠올렸다고 한다. 미안한 것과 억울한 것을 뒤섞지 말 것.


"사랑은 예측 불가능한 일을 겪는 거야." 아빠는 무덤덤하게 말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 건 더 그래."


분명 나 역시 같은 자리에 서 있었지만, 나는 어쩐지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물건을 막 전달한 다음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는 택배 기사처럼, 나 자신이 애매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는 돈도 많고, 커다란 집도 갖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불쌍하기만 했다. 누군가 별안간 떠나가버리고 홀로 남은 마음, 그 마음이 나로 하여금 예정에 없던 말을 하게 한 것이었다.


"아니요. 나는 그냥 좋은 게 아니구요, 마음이 아플 정도로 좋았어요." 나는 그 말엔 대꾸하지 않았다. 그건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었다.


박유정은 일 년 넘게 단 한 번도 카페에 앉아 크루아상과 함께 커피를 마시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무심결에 그 얘기를 김상우에게 했다. 그러자 돌아온 답은 이런 것이었다. "너는 정말 나랑 출신 성분 자체가 다르구나." 그 말을 듣고 김상우가 감정에, 타인에 인색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춥고, 퍼석퍼석하고,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는 마음. 그 마음은 마치 냉동실에 오랫동안 넣어두었던 빵과 비슷했다. 이미 겉이나 속이 꽝꽝 얼어버린 빵. 전자레인지에 돌린다고 해도 금세 허물어지고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빵.


나는 일부러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엄마의 말들이, 그 단어들이, 마치 젠가처럼 차곡차곡 내 몸 위에 쌓이는 기분이 들었다.


할머니는 똑같은 표정, 똑같은 자세로 누워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할머니의 말이라고 여겼다. 여전히 나를 궁금해하는 할머니의 말. 나는 그제야 말을 멈추고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는 학생처럼, 할머니의 침대에 이마를 댔다. 두 눈은 여전히 뻑뻑했지만, 나는 무언가 평범해진 느낌이었다. 평범한 하루,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투쟁도 없고, 변화도 없는 삶. 단지, 나폴레옹 앞에서 약간의 치욕과 수치, 모욕과 모멸을 감당하기만 하면 될 뿐.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인간은 늘 그런 것들을 감당하면서 사는 존재들인걸 뭐......


고도이는 마구간에 갇혀 있는 그 순간까지도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터무니없는 감상과 그에 따른 상심으로 받아들였으나, 후에스카르 비숑 프리제의 혈통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그 후 고도이의 삶은 오로지 베로의 후손들, 그 아이들의 평화로운 성장과 번식에 바쳐졌다. 인간은 그런 식으로 오해하고 오독하면서 동물들의 삶에 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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