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화 지음, 백원담 번역, 푸른숲, 2023년 9월 5일 발행
오래전에 읽고 2026년 2월에 다시, 밀리의 서재에서 읽음
위화의 [인생].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잠깐 펼쳤다가 그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2010년 무렵, 위화 작가의 [허삼관 매혈기]를 너무 재미있게 읽은 후 [인생]도 찾아 읽었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여전히 그때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위화 소설 특유의 담담하고 낙관적인 분위기가 느껴져 행복했다. 이 소설은 중국의 거장 장이모 감독에 의해 1995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중국 지역 민요를 수집하는 직업을 가진 화자는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하고 민요를 듣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늙은 소 한 마리를 데리고 밭을 갈고 있던 노인의 인생사를 듣게 되고, 화자는 중국 현대사와 궤를 함께한 노인의 기가 막힌 인생 이야기에 몰입한다. 노인의 이름은 '푸구이'.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지금은 늙은 소 한 마리와 함께 밭을 갈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
푸구이 노인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다.
쉬씨 집안 지주의 아들로 '도련님' 노릇을 하며 빈둥거리던 푸구이는 성 안 미곡상집 딸 '자전'과 결혼해 딸 '펑샤'를 낳고 부인이 둘째를 임신하고 있는 와중에 도박에 빠져 전 재산을 잃고 소작농으로 전락한다. 충격을 받은 아버지는 곧 돌아가시고 홀어머니와 부인과 딸, 뱃속의 둘째와 함께 밭을 일구며 살아가던 중, 어머니조차 위독해진다. 의사를 찾으러 성으로 갔던 푸구이는 국민당 부대에 끌려가 전쟁(국공내전)의 포화 속에서 2년을 보내고 힘겹게 살아 돌아온다.
그 사이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딸 펑샤는 열을 심하게 앓아 귀머거리가 되어 있고, 뱃속에 있던 아들 '유칭'은 훌쩍 자라 있다. 푸구이와 자전은 아들 유칭을 성 안 학교에 보내기 위해 딸 펑샤를 다른 집에 보내보지만 몇 달 만에 울면서 돌아온 펑샤를 다시 품고, 가족은 힘겹게 살아간다.
하지만 20세기 중반 중국 현대사의 한복판에서 일어난 대약진 운동 속에서 그들의 모든 재산은 인민공사에 편입되고, 빈곤한 현실은 그들을 가만두지 않는다. 아내 자전이 나날이 기력을 잃어가고 있던 어느 날, 아들 유칭의 학교 교장(현장의 부인)이 아이를 낳다 피를 많이 흘려 위독해지자, 학교 선생들은 아이들을 수혈에 동원한다. 그리고 유일하게 혈액이 맞았던 유칭이 무리한 수혈로 목숨을 잃는다. 푸구이는 그렇게 어이없게 유일한 아들 유칭을 잃고 유칭의 장례를 치른다.
아내 자전은 갈수록 쇠약해져 가고 장애를 가진 펑샤에게 신랑감을 구해주기 위해 백방으로 알아보던 부부는 성 안에 사는 머리가 한쪽으로 기울어진 장애를 가졌지만 성실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진 '얼시'라는 청년에게 펑샤를 시집보낸다. 금슬 좋던 펑샤와 얼시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푸구이와 자전, 그러나 이 행복 또한 오래가지 않는다. 펑샤가 아이를 낳다 죽은 것. 푸구이는 다시 한 번 자식의 장례를 치러주고, 자전은 펑샤가 낳은 외손자의 이름을 '쿠건'이라 짓는다. 그리고 얼마 후 자전도 조용히 숨을 멎는다.
이제 푸구이에게 남은 것은 사위 얼시와 외손주 쿠건뿐이다. 하지만 서로 의지하며 지내던 그들에게 또 한 번의 불행이 들이닥친다. 성 안에서 운송 일을 하던 얼시가 사고로 죽은 것. 얼시마저 떠나보내고 어린 쿠건과 밭일을 하며 살아가던 푸구이에게 또다시 불행은 찾아든다. 어느 날 열이 들끓던 쿠건을 집에서 쉬게 하고 생강차도 끓여주고, 죽도 쑤어주고, 콩도 삶아주고 밭 일을 하고 돌아와 보니, 콩을 너무 많이 먹은 쿠건이 죽어 있던 것. 그렇게 푸구이는 사위와 외손자마저 떠나보내고 혼자가 된다.
그리고 늙은 소를 한 마리 사서, 같이 늙어가며 지난날을 회상하며, 밭을 일구고 살아간다.
그의 노랫소리가 텅 빈 저녁 하늘에 바람처럼 나부꼈다. 어린 시절엔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푸구이 노인이 부르던 이 노래처럼, 어찌 보면 푸구이 노인의 인생은 젊은 시절 빈둥거리다 도박으로 집안을 말아먹고 국공내전, 대약진 운동, 문화 대혁명이라는 중국 현대사의 물줄기 속에서 몸을 사려가며 버티며 살아가다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아내, 사위, 외손자를 차례로 떠나보내며 운명에 마주하고 순응하고 운명과 화해하는, 생의 진리를 깨닫고 노년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때로는 운명에 맞서고 때로는 운명을 받아들이며 운명과 화해하고 머리를 맞대고 운명과 함께하는 담담하고 낙관적인 정조가 짙게 배어있어, 독자로 하여금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담담하게 살아나가는 주인공의 인생사에 몰입하게 한다.
위화 작가도 서두 '작가의 말'에서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 인생에 대한 태도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말이다. 때로는 이런 태도가 너무 순응적이거나 소극적으로 여겨질 수 있겠으나, 운명에 치열하게 맞서 싸우는 주인공들이 가득한 소설이라는 세계에서 운명을 받아들이고 그저 살아내는 주인공의 담담한 태도를 함께하며 독자 자신의 삶이 환기되는 효과도 있는 것이다.
[허삼관 매혈기] 역시 주인공이 가진 삶에 대한 태도는 비슷하나, 좀 더 유머와 해학이 깃들어 있던 기억이 난다. 조만간 다시 [허삼관 매혈기]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책을 읽으며 밑줄 그은 대목들을 옮겨 본다.
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의식하는 것뿐만 아니라 의식하지 못한 것까지도 이야기한다. 독자는 바로 이러한 순간에 일어나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 작가의 말 중
진정한 작가는 언제까지나 마음을 향해 글을 쓴다. 마음의 소리만이 그의 이기심과 고상함이 얼마나 두드러지는지를 그에게 솔직하게 말해줄 수 있다. 마음의 소리는 작가가 진실로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자신을 이해하면, 곧 세계를 이해한 것이다. (중략) 따라서 글을 써야만, 쉬지 않고 글을 써야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고, 자기르 발견할 수 있다. 마치 떠오르는 태양빛이 어둠을 비추듯, 영감은 이런 순간에야 불현듯 떠오르는 법이다. 마음은 결코 아무 때나 열리는 것이 아니며, 더 많은 경우 오히려 문을 닫아버리기 때문이다. - 작가의 말 중
작가는 독자에게 고상함을 보여줘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고상함이란 단순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을 이해한 뒤에 오는 초연함, 선과 악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 그리고 동정의 눈으로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중략) 글을 쓰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사람은 살아간다는 것 자체를 위해서 살아가지, 그 이외의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내가 고상한 작품을 썼다고 생각한다. - 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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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푸구이 노인처럼 잊히지 않는 사람은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자기가 살아온 날들을 그처럼 또렷하게, 또 그처럼 멋들어지게 묘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말고는 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었고, 자기가 젊었을 때 살았던 방식뿐만 아니라 어떻게 늙어가는지도 정확하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중략) 그의 이야기는 새의 발톱이 나뭇가지를 꽉 움켜잡듯 나를 단단히 사로잡았다. - 작중 화자가 푸구이 노인에 대해 한 말이지만, 마치 작가가 삶을 그릴 때 이래야 한다고 얘기하는 듯했던.
생각해 보니 그것도 다 운명이더구먼. 다만, 그 쓰디쓴 운명을 쑨 선생이 당한 것뿐이지. 자전은 우리가 쑨 선생한테 재앙을 밀어낸 거라고 여겼다네. 나도 그랬고 말이야. 하지만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네. "재앙이 그를 찾아간 거지, 우리가 그 사람한테 밀어낸 거라 할 수는 없소."
잠시 후에 우리는 또다시 나무 그늘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그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계속 들려달라고 청했다. 그가 하도 고마워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꼭 내가 그를 위해 뭐라도 해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는 자기 신세타령을 다른 사람이 관심 있게 들어준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나타냈던 것이다.
우리는 한평생 제법 많은 일을 겪으며 살았지. 사람도 때가 되면 익어야 하는 법이라네. 배가 다 익으면 땅으로 떨어지듯 우리도 그렇게 가야 하는 것이지.
사람이란 말일세, 살아 있을 때 아무리 고생을 많이 해도 죽을 때가 되면 자기를 위로할 방법을 찾는 법이라네. 자전도 그때 그랬던 거지.
쿠건은 콩을 너무 많이 먹어서 죽은 거라네. 그 아이가 게걸스러워서가 아니라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해서 그리 된 거지. 다른 집 아이들은 다 쿠건보다는 형편이 나았거든. 쿠건은 콩도 양껏 먹을 수 없었다네. 내가 정신이 나갔던 게지. 쿠건한테 그렇게 많은 콩을 삶아주다니. 내가 늙어서 바보 같고 멍청해진 탓에 쿠건을 죽게 한 거라네.
이 생각 저 생각하다 보면, 때로는 마음이 아프지만 때로는 아주 안심이 돼. 우리 식구들 전부 내가 장례를 치러주고, 내 손으로 직접 묻어주지 않았나. 언젠가 내가 다리 뻗고 죽는 날이 와도 누구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니 말일세. 나도 편히 생각하기로 했다네. 내가 죽을 차례가 되면 편안한 마음으로 죽으면 그만인 거야. 내 주검을 거둬줄 사람을 구태여 바랄 필요가 없단 말일세. (중략) 나는 말일세, 바로 이런 운명이었던 거라네. 젊었을 때는 조상님이 물려준 재산으로 거드름을 피우며 살았고, 그 뒤로는 점점 볼품없어졌지. 나는 그런 삶이 오히려 괜찮았다고 생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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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삶이 지나치게 미화되어 있다. 주인공 푸구이의 삶이 평범하다는 것, 그것이 원래의 자기 운명이라고 하는 언표는 작품 전체의 주제에 해당하는 것이지만 자기 일신, 혹은 가족의 안녕이라는 덕목은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가족주의적으로 삶을 재편하는 또 다른 욕망의 표현일 수 있다. - 역자의 작품 해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