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유진 지음, 한겨레 출판사, 2025년 4월 15일
2026년 1월에 밀리의 서재에서 읽음
몇 달 전 '청소년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호기심이 일어 여기저기 검색을 하던 중 범유진 작가님의 이름을 발견했다. 2012년 창비 아동 청소년 문학상을 받으면서 데뷔하셨고, 계속해서 청소년 소설과 판타지, 호러 소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 작가님이라고 한다. 연초에 [작가의 루틴]이라는 책에서 '운동'과 관련한 작가님의 생각을 읽고 마음에 담아두었다가 언제고 한번 이 작가님의 책을 읽어야지 했었는데, 이번에 밀리의 서재에서 [호랑골동품점]이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와 읽기 시작했다.
책 소개 페이지에 따르면 장르는 '힐링호러소설'이라고 한다. (청소년 소설은 아니다.) 어딘지 모르게 신비롭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오래된 동네, 시장 골목 구석 끝에 자리한 '호랑골동품점'을 배경으로, 그 주인인 이유요와 그를 지키는 영적인 존재들, 또 오랜 사연을 가진 물건들과 연을 맺는 손님들의 사연이 여섯 개의 챕터로 이어진다.
챕터마다 '외로움'에 잠식된 우리 주변의 인물들이 등장해 골동품과 연결된 자기만의 처연한 사연을 풀어가는 기담 형식으로, 책은 술술 읽힌다. 무엇보다 '호랑골동품점'이라는 설정이 촘촘하게 설계되어있고 챕터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인물들의 사연이 우리 주변에 있을법해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판타지나 호러 장르를 좋아하거나 사회성 짙은 주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호랑골동품점'은 밤 11시에서 새벽 4시까지만 문을 여는 곳으로, 하얀 호랑이 눈썹을 한 가닥 가진 '호미(虎眉)'의 가게를 뜻한다. 이곳에는 한이 깃든 오래된 물건들이 가득한데, 호미이자 가게 주인인 '이유요'는 이곳에서 이 물건들을 보관하고 정화한다. 정화된 물건은 손님에게 팔기도 하지만 아직 정화되지 않은 물건을 잘못 가져갔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다. 여섯 챕터에 걸쳐 등장하는 사연을 품은 손님들은 대부분 아직 정화되지 않은 물건에 이끌려 그 물건을 가져갔다가 위기에 처한다.
1.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
콜센터에서 일하는 주인공 김규리는 어서 1년을 채워 퇴직금을 받아 콜센터를 그만두고 싶다. 퇴직금으로 버티며 취업 준비에만 전념하고 싶은 것이다. 이전 직장에서 정직원 전환에 실패하면서 깨달은 교훈대로 튀지 않고 무리 속에 섞여 들기 위해 담배를 배웠지만, 어느덧 금연은 쉽지 않다. 야간 근무를 마치고 유달리 피곤했던 어느 밤, 평소에는 너무 어두워 다니지 않던 시장 골목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길에 김규리는 '호랑골동품점'에 들러, 홀린 듯 'BRYANT&MAY'라고 쓰인 성냥갑을 집어 들고 도망쳐 나온다.
그리고 다시 콜센터. 성냥갑은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듯, 콜센터 흡연실에 제멋대로 놓여있다. 그걸 쓴 '박'과 동료들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죽은 동료 '이미선'을 본다. 이미선은 경쟁적인 콜센터 근무환경에서 남다르게 인간적이었으나, 얼마 전 뇌출혈로 죽은 인물. 몸이 안 좋다며 김규리에게 휴가 날짜를 바꿔달라고 부탁했으나 김규리가 거절했었고, 그날 뇌출혈로 쓰러져 죽었기에 김규리는 이미선의 죽음에 부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미선은 콜센터 직원들의 건강을 위해 공식적인 체조 시간을 달라고 회사에 요청했었으나 회사에 밑 보이고 싶지 않은 동료들의 무관심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래서인지 다른 직원들 역시 이미선의 죽음에 부채감을 갖고 있던 상황. 한편 성냥갑은 버려도 버려도 김규리의 주변을 맴돌고 흡연실에 제멋대로 놓여 있다. 직원들은 점점 흡연실을 피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김규리는 성냥갑에 깃든 '한(恨)'을 마주한다. 흰 무명천으로 턱을 감싼 흉측한 얼굴들이 김규리에 다 불태워버리라며 자꾸만 속삭인다. 성냥갑을 수거하기 위해 콜센터를 찾아온 이유요는 김규리에게 성냥갑에 깃든 원혼에 대해 알려준다. 19세기 영국, 중독 증상이 없는 '적린'이 개발된 후에도 원가 절감을 위해 강한 독성을 지닌 '백린'을 성냥 원료로 쓰던 브라이언트앤메이 성냥 공장에서 일하던 소녀들은 인중독으로 점점 아래턱의 뼈조직이 괴사해 치아가 빠지고 근육이 흘러내리는 병에 걸려 죽어갔다. 그 원혼이 성냥갑에 깃들어 어쩌면 비슷한 환경(비인간적인 노동 환경)에 놓인 콜센터 주변을 맴돌며 다 불태워버리라고 외쳤던 것이다. 하지만, 성냥 공장에서 일하던 여자들은 총파업을 통해 백린 사용 금지 협약을 이끌어냈었다. 지금, 이곳 현실에서 김규리가 일하는 콜센터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노동자들의 연대를 통해.
요약하자면,
- 골동품: 성냥갑(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
- 골동품에 깃든 한(恨): 원가 절감을 위해 뼈와 근육 괴사를 유발하는 '백린'을 사용하는 성냥 공장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의 한. 비인간적인 노동 환경
- 주인공: 콜센터에서 일하는 김규리. 학창 시절부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하느라, 스펙도 학점도 챙기지 못하고 계약직을 전전했다. 제대로 취업하고 싶지만 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일단 콜센터에서 '임시로' 일하고 있다.
- 주인공의 사연: 불평등한 시작점. 경쟁만이 남은, 연대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가난한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불안함.
2. 19세기, 그림자인형 와양쿨릿
- 골동품: 19세기, 그림자인형 와양쿨릿. 막 하나로 이승과 저승이 갈리는 연극에 쓰이던 인형(=와양쿨릿)으로, 웃는 것인지 우는 것인지 모를 얼굴의 못난이 인형을 닮은, 머리가 분리되는 인형이다. 등장하는 인형은 그중에서도 특별한 '바이트렉'.
- 골동품에 깃든 한(恨): 아기 머리를 가진, 커다란 메뚜기 형태의 귀신(=바이 트렉)으로, 자신을 죽게 한 대상을 원망해 그 대상을 유인해 메뚜기 떼에게 갉아 먹히게 한다.
- 주인공: 김택구(65세).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다 망해 지금은 쪽방에 혼자 살며 퀵 배달을 하고 있다.
- 주인공의 사연: 늘그막에 아내와 자식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3년 전 아내를 떠나보냈고 젊은 시절엔 임신한 아내의 배를 발로 걷어차 첫 아이가 유산된 이후, 두 번이나 더 유산이 되어 자식도 없는 신세다. 아이를 잃은 게 자기 탓이 아니라 아내 탓이라고 생각한다. 김택구는 대학까지 나온, 왕년에 좀 잘 나갔던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초라함 사이에서 자격지심과 열등감으로 삐뚤어진 욕망을 내뿜는다. 자식을 못 낳고 먼저 죽어버린 아내를 탓하며,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네에서 본 열한 살 여자 아이(소하연)를 유괴해 시골에 내려가 같이 살 궁리를 하고 있다. 소하연을 쫓아 골목을 , 골목 끝 '호랑골동품점'에서 와양쿨릿 인형을 훔친다.
과거, 아내는 아이가 유산될 때마다 나무토막을 깎아 인형 비슷한 것을 만들어 보자기에 싸 상자에 소중히 보관했었고 죽기 전 그 인형들을 함께 묻어달라 유언했었다. 쪽방으로 급히 이사 오면서 어딘가 처박아 뒀던 그 인형들을 태우던 날, 와양쿨릿 인형의 저주를 받아 교통사고로 죽는다. 죽은 아내와 자기가 발로 차 유산되었던 첫 아이를 보면서.
3. 1977년, 체신 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
- 골동품: 공중전화기.
- 골동품에 깃든 한(恨): 1970년대 이리역 폭발 사고 때 무너진 극장에 설치되어 있던 것으로, 폭발 사고가 났을 때 그 주변 사람들이 자기가 무사하다는 걸 알리려고 찾았던 공중전화기였다. 누군가를 안심시키려는 그 마음이 전화기에 깃들어 영물이 된 것. 어린 시절, 박서현의 아버지가 구해온 것이다.
- 주인공: 정지운
- 주인공의 사연: 정지운은 극본가 박서현, 배우 이다은과 함께 극단을 꾸리다 교통사고로 둘을 한꺼번에 잃고, 벚꽃이 피면 친구들을 따라갈 결심을 한 채, 게스트하우스에 홀로 머물고 있다. 이다은과 결혼하겠다는 박서현에게 쓴소리를 하고 크게 다툰 후 박서현과 이다은은 먼저 서울로 올라가고 그 길에 교통사고가 났기에, 친구들과의 마지막이 그렇게 된 것에 대한 후회와 자책에 괴로워한다.
어느 날, 게스트하우스 구석에 놓여 작동하지 않는, 오래된 공중전화기를 수거하러 이유요가 찾아오고, 하루 머물고 가겠다는 이유요와 저녁을 함께 한다. 이유요는 지운에게 일본에서 떠도는 '사토루 괴담'에 대해 얘기해 준다. 공중전화에 10엔을 넣고, 자기 번호로 전화를 건 후에 사토루 군, 하고 세 번 부르면 스물네 시간 안으로 사토루 군이 찾아온다는 이야기. 사토루 괴담을 찾아보다 어린 시절 외로웠던 정지운에게 사토루가 되어줬던 정체불명의'서현'이란 아이를 떠올리고, 중학교 1학년에 만나 친구가 된, 같은 이름을 가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친구, '박서현'을 떠올린다.
그날 밤, 오랜만에 박서현이 등장하는 꿈을 꾼 지운은 공중전화기로 가 다이얼을 돌리고 '박서현'의 이름을 세 번 부른다. 그렇게 시작된 박서현과의 통화. 진솔한 대화를 통해 둘은 서로를 보듬고 화해한다. 그리고, 어린 시절 지운이 만났던 정체불명의 친구 '서현'이 진짜 '박서현'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지운은 다시 살아갈 결심을, 이야기를 이어나갈 결심을 하게 된다.
4. 1950년대, 럭키 래빗스 풋
- 골동품: 럭키 래빗스 풋 (가죽고리에 연결된 오링에 털 뭉치 세 개가 달린 고리. 털 뭉치는 토끼 발로 만든 럭키 참). 처음에는 행운을 가져다주지만 행운의 자격이 없는 자가 소유하면 일주일 안에 불행을 가져온다.
- 골동품에 깃든 한(恨): 살아있는 토끼의 왼쪽 뒷발을 잘라 만든 것으로, 학대받은 동물의 한이 서려있다.
- 주인공: 심길용. 고등학교 때부터 왕노릇을 했던 문정열의 호출로, 문정열과 권병욱이 운영하는 채널의 영상 편집을 맡아하고 있다.
- 주인공의 사연: 셋이 운영하던 반려동물 채널을 폐쇄할 때, 문정열의 주장대로 토끼들을 파묻으려 했으나 도저히 그냥 두고 가지 못해 몰래 한 마리를 구덩이에서 꺼내어 집에서 키우고 이름도 '롭'이라 지어준다. 파묻혀 있던 한 마리는 끝내 구하지 못해, 죄책감을 갖고 있다.
한편, 채널 주제를 심령 스폿 촬영으로 바꾸자는 문정열의 주장으로, 셋은 저주받은 가게로 알려진 호랑공동품점을 찾아 찍기로 한다. 골동품점 주인인 이유요는 문정열, 심길용과 고등학교 동창으로, 문정열의 눈치를 보던 심길용과 달리 고등학교 때도 문정열에게 당당하게 맞섰었다. 카메라를 들고 호랑골동품점을 무작정 방문한 날, 2층에서 내려오는 '동'을 보고는 놀라서 달아나던 그들은 얼떨결에 럭키 래빗스 풋을 들고 나오고, 전리품처럼 세 개의 털뭉치를 하나씩 나눠가진다.
그때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문정열은 강원도 카지노에서 큰돈을 따고, 권병욱은 TV쇼에 출연할 기회를 얻는 등 행운이 찾아들었던 것. 하지만 심길용은 토끼 발 부적이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알고는 질색하고 다시 호랑골동품점을 찾아가 돌려주려 한다. 그리고 며칠 후, 권병욱은 교통사고로 다치고, 문정열은 카지노에서 돈을 다 잃고 호랑골동품점을 찾아와 난동을 피우다 토끼 그림자에게 먹혀 쓰러진다. 다행히 심길용은 '롭'이 지켜주어 토끼 발 부적의 저주를 피한다.
5. 17세기, 짚인형 제웅
- 골동품: 짚인형 제웅(액막이할 때 쓰던 인형으로, 누군가 아프면 병자의 사주를 적은 동전을 제웅 안에 넣은 뒤 집 밖으로 던지면서 가져가라고 외치는 식)
- 골동품에 깃든 한(恨): 17세기 '경신대기근'이 끝나고 몇 년 후, 몇몇 양반집 아이들이 걸귀 들린 증상을 보인다. 경신대기근 때 죽은 아이들의 혼령이 붙었던 것. 제웅을 만들어 거지들에게 던진 후 제웅을 주운 거지들을 배불리 먹여 걸귀를 성불시켜 아이들을 낫게 했는데, 한 아이만 낳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 걸귀는 부모가 자신을 나무에 묶어놓고 버려뒀던 것. 배고픔만이 아닌 외로움도 사무쳐있었던 것이다. 아이가 묶여있던 나무와 같은 나무를 제웅에 꽂았더니 걸귀가 제웅으로 옮겨와 부모가 다시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 주인공: 채주연. 남편의 외도로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는 친정 엄마가 있는 미국으로 유학 보낸 워킹맘
- 주인공의 사연: 채주연은 회사에서 곧 론칭하는 브랜드의 팀장이 될 것이 유력하지만, 언젠가부터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파 점점 살이 찌고 있었다. 브랜드 팀장이 되려면 언론 노출이 많아져 외모 관리가 필수임에도 계속되는 허기에 괴롭기만 하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채주연 대신 다른 직원을 팀장에 앉힌다. 주연은 그 이유가 본인의 자기 관리 실패 때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회사가 영향력 있는 인플루언서였던 주연 남편의 내연녀의 눈치를 살폈던 것이었다.
한편, 미국에서 유학 중인 딸 '세리'는 엄마 주연의 이혼 소식을 들은 이후로는 영상 통화를 내내 거부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생일 축하를 해준 친구와 함께 들른 호랑골동품점에서 셀프 생일 선물로 짚인형 하나를 집어 든다. 그날부터 채주연은 짚인형을 말동무 삼아, 다른 곳에서는 하지 못하는 속 마음을 짚인형에게 털어놓으며 짚인형을 의지하게 되고, '구원'이라는 이름도 붙여준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친정어마에게서 연락이 온다. 딸 세리가 의지와 관계없이 폭식을 하고 몽유병 환자처럼 한 밤 중에도 냉장고 문을 열고 음식을 퍼먹고 있다는 것. 친정 엄마가 유명한 보살에게 물으니 엄마가 곁에 흉한 것을 들였다고 했다고 연락해 온 것이었다. 주연은 얼마 전, 짚인형 구원에게, 엄마 맘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딸에 대한 원망을 털어놓았던 것이 문득 떠올랐지만 설마 하고 있는 차에, 살려달라는 세리의 전화를 받고 호랑골동품점으로 향한다. 짚인형 제웅에 깃든 원혼의 실체를 알게 된 주연은 짚인형이 '정'에 고파했었고 마침내 주연이 주는 정을 받아들여 주연을 부모처럼 생각하고 주연의 말을 들을 거라는 이유요의 말을 믿고, 세리를 아프게 하는 걸 그만두라고 짚인형 구원에게 타이른다. 그리고, 계속해서 구원과 함께한다.
6. 연도 불명, 콩주머니
- 골동품: 콩주머니
- 골동품에 깃든 한(恨): 어린 이유요가 들고 있던 것으로, 사부가 안갯속에서 이유요의 혼을 데리고 나올 때 함께 들고 나왔다. 사부도 사라지고 영영 혼자가 되길 무서워하는 이유요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 주인공: 소하연
- 주인공의 사연: '그림자인형' 챕터에서 김택구가 유괴하려고 했던 동네의 아이 소하연이 주인공이다. 소하연의 아빠는 가정폭력을 일삼다 소하연의 엄마를 죽이고 자신도 죽었다. 소문은 온 동네에 퍼졌고, 학교 아이들도 소하연을 귀신 들린 애 취급했다. 밤이 되면 죽은 아빠와 엄마가 소하연에게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아빠의 폭력은 반복되었다.
어느 날, 동네 원룸촌에 불이 났다. 어느 미친놈이 불을 질러놓고는 건물 입구를 지키고 서 있다 나오는 사람들을 칼로 찔러댔단다. 그 소문을 듣던 이유요는 점차 커져가는 소하연의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부에게 자신의 울음소리가 닿았고 사부가 자신을 발견해 안갯속에서 자신의 혼을 구했던 것처럼, 이제는 이유요가 소하연을 구할 차례임을, 이유요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사부가 말했던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온 것임을. 소하연은 불길 속에서 할머니를 구하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가 나타나 방해하고 있었다. 엄마도 나타나 소하연을 지켜내려 아빠와 싸웠다. 그리고 무한 반복되는 이 상황. 이때 이유요가 나타나 콩주머니를 소하연에게 건네고 마침내 소하연을 구해낸다. 사부가 이유요에게 건넸던 콩주머니가 소하연에게 건네지며, 언젠가 소하연이 이유요를 이어 '호미'가 될 것을 암시한다.
읽다가 밑줄 그은 대목들은 옮겨본다.
그 시장은 시간의 미로였다. 과거를 품은 물건들이 곳곳에 쌓여 현재를 잊게 만드는 골목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걷다 보면 시대를 뛰어넘은 듯한 착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중략) 고급스러움과 천박함, 익살스러움과 날카로움, 생에 대한 미련과 포기. 그 모든 것의 경계가 오래된 지우개로 벅벅 문질러져 느슨해진 곳.
"그런데 그 애가 딱 어떤 얼굴이다, 하고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니까. 눈 코 입이 다 흐릿해. 꼭 도깨비처럼! 그게 귀신이 아니고 뭐야. 자기를 길러준 사람을 잡아먹고 자리를 차지했다는 귀신, 딱 그거지." - '이유요'에 대한 시장 사람들의 말
모든 것이 적당히 분위기를 맞출 줄 몰랐던 자신의 탓인가 싶었고, 재취업 기간이 길어지며 서류 심사에서 탈락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자학도 깊어졌다. 다음 직장에서는 무리를 벗어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래서 김규리는 담배를 피웠다. - "1.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 중
그러나 정확하고 빠르게! 친절과 신속이 공존하기 어렵다는 걸 매뉴얼 작성자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 "1.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 중
이미선은 뇌출혈로 죽었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이미선은 타 죽었다. 저 성냥처럼, 자기 자신을 끝까지 태우다가 소지되어 죽었다. - "1.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 중
타인의 체온이 온기로 느껴지지 않게 경쟁과 분열이란 이름의 냉기를 적절하게 불어넣는 것. 부당함과 착취를 골조로 세워진 회사일수록 효과적으로 냉기를 생성해 냈다. - "1. 19세기, 영국 브라이언트앤드메이 성냥>" 중
제아무리 100세 시대이니 뭐니 해도 환갑을 넘기면 큰 변화를 도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무언가를 해볼까 망설이다가 살던 대로 시들어가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내 결심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 "2. 19세기, 그림자인형 와양쿨릿" 중
김택구는 중절모가 영 탐탐지 않았다. 중졸에 도배일이나 하며 먹고사는 주제에 감히 대학 나온 자신의 눈치도 보지 않고 이것저것 아는 척을 하는 게 언죽번죽하단 것이 김택구의 본심이었다. - "2. 19세기, 그림자인형 와양쿨릿" 중
"먹고살게 해 주면 상냥한 건가." "먹고사는 게 제일 중요하지. 그 뭐야, <운수 좋은 날>인가. 마누라 죽은 날에 설렁탕 사 들고 가는 이야기. 그 소설 속 여편네가 왜 두들겨 맞으면서도 김 첨지랑 살았겠어. 불만스러워도 김 첨지가 먹여 살려주니까 그런 거지." (중략) 김택구는 이 무식한 작자야,라고 중절모를 퉁 쏘았다. "그게 비극이 일어났을 걸 예감한 남자의 슬픈 몸부림이야. 당신에 그 뭐야,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들이 어째서 모던 보이가 되어 풍류를 쫓았겠어. 서민들도 하루 먹고살기에 바쁘니 독립이고 뭐고 기모노 차림의 기생에게 돈을 받아도 어이구 마님 감사합니다, 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 그 비참한 현실! 이미 일어난 비극에서 눈을 돌려야 살아남을 수 있었던 남자들의 슬픔! 그게 작품의 핵심이지." (중략) 소설 한 편 읽지 않은 무지렁이와 무슨 말을 하겠는가. 마침 설렁탕이 나와서 김택구와 중절모의 논쟁은 중단되었다. - "2. 19세기, 그림자인형 와양쿨릿" 중, 김택구가 <운수 좋은 날>에서 김첨지가 아내가 아픈데 술집에 들러서 떡을 처먹고 설렁탕을 사 들고 가는 이유에 대해 중절모에게 설명하는 부분
돈도 벌고 공짜 음식까지 생긴 날, 이거야말로 운수 좋은 날 아닌가. 아무래도 오늘 저녁 거사가 잘될 징조이지 싶었다. - "2. 19세기, 그림자인형 와양쿨릿" 중
그 시절의 기억은 정지운에게 흐릿했다. 아마 그다지 즐거운 일도, 충격적일 만큼 슬픈 일도 없었던, 밋밋한 날들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렇지만 단 하나 서현이란 이름은 선명하게 기억했다. - "3. 1977년, 체신 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 중
노래 속 아이는 외로운 것이었다. 외로운 아이는 '상상 친구'를 만들게 마련이었다. 자기에게만 보이고 자기 하고만 놀아주는 절대적인 나의 편. 당연히 다른 사람에겐 보이지 않았다. 주소를 들었다고 해도 기억해선 안 되었다. 자기 집 주소일 테니, 그걸 기억하는 순간 친구가 가짜라는 걸 인정해야 하니까. - "3. 1977년, 체신 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 중
즐거웠다. 오랜만에 타인과 함께한 식사가, 이유요와의 대화가, 밍밍한 찌개가 맛있게 느껴질 정도로. 그 사실에 견딜 수 없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 "3. 1977년, 체신 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 중
수화기 너머의 박서현과 대화하는 동안 죽음이 점차 마음에 스며들었다. 새로운 이야기가 생겨나지 않는 것, 그것이 죽음이었다. 정지운은 소리 없이 울었다. 흘러내린 눈물로 뺨이 얼룩졌다. - "3. 1977년, 체신 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 중
박서현의 극본을 무대에 올릴 것이다. 이야기가 끊어지는 것이 죽음이라면,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영원히 함께일 수 있다. "어...... 꽃 폈다." 흔들리던 가지 끝에 새하얀 꽃 한 송이가 피어나 있었다. - "3. 1977년, 체신 1호 벽괘형 공중전화기" 중
그저 무서웠다. 언젠가 혼자가 된다는 사실이. 붉은 달빛으로 심장을 꿰매어 붙인 날이었다. - "6. 연도 불명, 콩주머니"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