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심", 히라노 게이치로 소설

by 아나스

본심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현대 문학, 2023년 1월 31일 발행

2026년 2월에 읽음


히라노 게이치로가 문단에 처음 등장했을 때를 기억한다.

1990년대 후반, 아쿠타카와 상 수상으로 화려하게 문단에 데뷔한 젊은 작가.

아쿠타카와 상 수상작인 [일식]과 이어 출간된 []을 읽으며, 특유의 장대한 스토리와 현학적인 분위기에 매료되었었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은 책의 내용조차 기억나지 않고, 작가에 대해서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밀리의 서재에서 최근작 [본심]을 발견해 2-3일에 걸쳐 읽었다.


'본심'(本心)이라는 제목처럼, 인간의 본심이란 무엇인가 탐구하는 소설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2040년경의 일본. AI와 가상현실 기술의 발달로 죽은 사람의 외양과 인격을 구성해 VF(Virtual Figure)로 제작하는 일이 흔해진 세상이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아가던 20대 청년 사쿠야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인격을 VF(Virtual Figure)로 제작하는 것을 고민한다. 어머니는 뜻하지 않게 사고로 돌아가셨지만 '이만하면 충분'하다며 생전에 '자유사'를 원했었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 어머니의 본심이었는지 VF를 통해서라도 어머니를 본심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유일하게 자신을 알아봐 주는 존재인 어머니가 세상에 없다는 절망감 속에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어머니의 VF를 제작한 후 어머니의 본심을 알아내기 위해 만나게 된 어머니의 직장 동료 '미요시'씨,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아바타 디자이너 '이피'와의 만남과 관계 맺음을 통해 점차 어머니 외의 세상에서도 살아갈 용기와 의지를 갖게 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중요 사건을 통해 사쿠야라는 '선하지만 간혹 뒤틀리는 청년'의 시각으로 빈부 격차와 계급, 인간성, 기술 발전 등 현대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복잡다단한 단면을 포착해 낸다. 자기만의 올곧은 시선으로 세상을 마주하며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에 대고 읊조리는 사쿠야의 독백을 들으며, 그의 '본심'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소설.


사쿠야가 겪는 몇 가지 중요 사건이란 이런 것들이다.


'영웅적인 소년' 사건

사쿠야는 고등학교 때, 추문에 휩싸인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교무실 앞에서 연좌하던 '영웅적인 소년'에 이끌려 몇몇 학생들과 함께 교무실 앞 연좌에 동참했었다. 하지만 함께 연좌했던 학생들이 하나 둘 교무실 앞을 떠나가고 '영웅적인 소년'마저 떠나갔을 때에도 사쿠야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다, 결국 학교를 자퇴한다. 어머니는 그런 사쿠야를 '착하다'라고 평했지만, 사쿠야는 자신의 연좌가 정말 본심에서 나온 선의에서 비롯된 것인지 추문에 휩싸였던 여학생을 좋아해서 그랬던 것인지, 어른이 된 후에도 혼란스럽다. 자신의 본심조차 스스로 알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에피소드이자, 외부 세계로부터 '선하다'라고 인식되는 사쿠야라는 인물을 설명하는 사건.


어머니의 죽음과 '자유사' 논쟁

2040년의 일본은 인간이 원하는 때에 의학적 도움을 받아 스스로 죽음의 타이밍을 정하는 것을 허용하고, 이것을 '자유사'라 부른다. 어머니는 생전 사쿠야에게 '자유사'를 통해 사쿠야가 지켜보는 앞에서 죽음을 맞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사쿠야는 도무지 그것이 어머니의 본심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러던 와중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드론 사고로 생면부지의 구급대원들 가운데서 죽음을 맞는다.

사쿠야는 어머니가 '자유사'를 원했던 것은 살아있는 것 자체가 짐짝 취급을 당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도달한 어쩔 수 없는 결론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어머니가 말한 '이미 충분히 살았다'는 충만감 때문이라는 데에 도저히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동료 '미요시'와 어머니와 한 때 연인이었던 작가 '후지와라 료지'를 만나면서, 또 어머니의 VF와 대화하면서 점점 자기가 알고 있던 어머니와는 다른 어머니의 또 다른 조각들을 발견하고, 과연 무엇이 어머니의 '본심'이었는지 혼란스러워한다.


룸메이트가 된 미요시와 '연기緣起' 앱을 통한 우주 체험

'미요시'는 생전 어머니의 동료로, 사쿠야는 어머니 VF의 인격을 생전의 어머니에 더 가깝게 만들기 위해 미요시에게 어머니 VF와 대화해 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침수 피해를 당해 대피소에 있던 미요시를 집으로 데려와 어머니 방에 묶게 함으로써 둘은 하우스메이트가 된다. 사쿠야는 점차 미요시를 좋아하지만, 남자와 성(性)에 트라우마가 있는 그녀에게 자신의 본심을 숨긴다.

어느 날 미요시는 사쿠야에게 '연기緣起'라는 앱을 소개해준다. 세상 모든 현상은 상대적이고 일체 공(空)이라는 불교의 '연기설'에서 따온 이름이다. VF 어머니가 진짜 어머니가 아닌 것을 깨달을 때마다, 그럼에도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진짜 어머니'와는 다른, '지금 이 세계에 존재하는 VF 어머니'와 교류하고 의지하는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혼란스러웠던 사쿠야는 연기 앱에 빠져든다.

'나도 우주의 일부라고 인식'하는 것, 즉 '나와 우주 사이에 구별이 없고, 우주 그 자체로 사후에도 계속 존재'한다고 인식하는 것, 내가 아무것도 아님과 동시에 우주라는 것, 오히려 나를 지움으로써 해방되는 듯한 그 감각은 계속해서 '본심'을 발견해내려 했던 사쿠야를 환기한다.


리얼 아바타 편의점 사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쿠야는 제대로 된 직장 대신 '리얼 아바타'로 일하고 있다. 고객이 의뢰한 각종 업무를 고객(의 감각)과 연결된 특수 고글을 쓰고 고객의 아바타가 되어 수행하는 일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가끔은 보람을 느낄 때도 있고 대부분은 소모된다는 느낌, 그리고 아주 가끔은 오히려 이쪽에서 고객을 해킹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는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유일하게 그나마 연락하고 지내던 리얼 아바타 동료 기시타니가 회사 밖에서 개인적인 의뢰를 받아 폭발물이 실린 드론을 운반하다 살인미수로 잡혀간다. 이 사건을 계기로 리얼 아바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몇몇 고객들은 악의를 가지고 리얼 아바타를 조롱하러 의뢰를 맡기기도 한다. 어느 무더운 날 사쿠야는 양복을 입고 멜론을 구입해 배달해 달라는 의뢰를 받아 이를 실행하는데, 의뢰인들은 일부러 이 가게 저 가게로 사쿠야를 뺑뺑이 돌리고 사쿠야는 '몸' 뿐만이 아니라 '내면'까지도 그들에게 농락당하는 기분을 느끼고 분노가 솟아오른다.

이 과정에서 들어간 편의점에서 외국인(미얀마인 2세)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갑질을 하는 남자를 보고 그 앞을 막아선다. 자신을 농락하는 의뢰자들에게 쌓여온 분노를 그 남자에게 뿜어대다 결과적으로 아르바이트생을 구한 것이다. 훗날 누군가 찍은 이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와 갑작스레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칭송받고 리얼 아바타 회사를 통해 후원금까지 받게 된다.

사쿠야는 자신의 본심(=분노)과 다르게 읽힌 행동(=선의), 그 괴리를 느끼며 예전의 '영웅적인 소년' 사건을 떠올리게 되고, 미얀마에도 일본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눌하게 살아가는 듯한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을 만나며 이쪽(저소득층, 빈민, 쓸모없는)과 저쪽(부유층, 교양을 갖춘 계층)으로 계층이 나뉜 이 사회에서, 본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 점차 깨닫게 된다.


아바타 디자이너 '이피'와의 만남

'이피'는 리얼 아바타 편의점 사건으로 사쿠야에게 후원금을 보내고 사쿠야를 히어로로 칭송한, 잘 나가는 아바타 디자이너다. 어린 시절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고 있지만, 개성 강한 아바타를 제작해 판매한 돈으로 펜트하우스 꼭대기층에서 럭셔리하게 살고 있다. 이피는 사쿠야의 선함이 맘에 들어, 그에게 자신의 전속 '리얼 아바타'가 되어달라 제안한다. 사쿠야는 이피의 집으로 출근해 가끔은 자잘한 심부름을 하고 대부분은 별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가끔은 이피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며 신뢰를 쌓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이피가 초대한 크리스마스 파티를 계기로 셋은 함께 어울리게 되고 이피와 연인이 된 미요시는 사쿠야의 아파트에서 떠난다. 사실 사쿠야도 미요시를 좋아했으나, 진정으로 미요시가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자신의 본심은 끝까지 숨긴다.

사쿠야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왜 제대로 살아야 하는지(=왜 법을 지키고 살아야 하지? 같은) 그 이유를 잃어버렸었으나 미요시와 이피와 관계를 맺으며 서로를 믿고 걱정해 주는 존재가 이 세상에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고, 점점 VF 어머니와도 작별할 수 있게 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의 '본심'을 알고 싶어 하는 동시에 나의 '본심'을 알아주길 바라는 존재"다. 사쿠야는 어머니의 본심을 알고 싶어 했고, 동시에 어머니가 사쿠야 자신의 본심을 알아주실 바랬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돌이켜보니 자기가 알고 있던 어머니는 누구였으며, 나 자신은 누구였는지조차 확신이 없다. 모든 것은 찰나이고 상대적인 것, 어쩌면 건네는 쪽의 '본심'과 다르더라도 그저 받아들이는 쪽에서 받아들이는 대로가 정답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고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오래된 철학적 쟁점인 "내면의 자아 vs 외부의 자아"에 관한 작가의 탐구이기도 하다. 십수 년 전에 읽었던 히라노 게이치로의 소설들도 (이야기가 명확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이런 철학적인 주제를 담고 있었는데, 여전히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탐구해 가는 작가의 방향성에, 그 진중함이 여전해서 반가웠다.

작가의 이런 주제 의식을 세간에서는 '분인(Dividual)' 주의라는 말로도 표현하는데, 이는 인간을 나눌 수 없는 '개인(Individual)'으로 보는 게 아니라, 상대와 환경에 따라 분리되는 '분인(Dividual)'들의 집합체로 보는 관점이다. 즉, 사쿠야는 어머니의 '본심'을 찾아내고자 했으나 자신이 알고 있던 어머니, 미요시 앞에서의 어머니, 후지와라에게서 들은 어머니, 자신을 낳기 전의 어머니, VF로 만난 어머니가 각각 존재하며, 그 각각의 어머니조차 어제와 오늘이 다른 존재이기에 그것들의 집합체기 어머니인 것이며 어느 하나가 진짜 본심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


좀 더 찾아보다 보니 인간에게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본심'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관점 자체는 지극히 전통적인 것이고, 인간은 '계속해서 변하는', '상대적인' 것이 존재라는 쪽이 보다 현대적인 관점에 가깝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인간에게 정해진 '본질'같은 건 처음부터 없고 인간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라고 핑계를 대며 정해진 틀에 숨는 것은 '자기기만'이며, 겉으로 표현되는 선택과 행동이 곧 나의 본질), 칼 융의 페르소나(타인에게 보여주는 모습, 즉 사회생활을 위해 쓰는 '가면'인 '페르소나' 뒤에 숨겨진 무의식의 영역까지 모두 통합해야 비로소 '진정한 자기'에 도달 가능. 본심이란 어느 한쪽이 아니라 이 둘 사이의 역동적인 균형 속에 있는 것), 그리고 어빙 고프먼의 연극 이론(삶을 하나의 '공연'으로 봐서, 남들에게 보이는 사회적 자아는 전면 영역(Front Stage)에, 혼자 있을 때나 친밀한 사이에서만 드러나는 모습은 후면 영역(Back Stage)에 존재. '본심'이란 것이 존재하기보다, 상황에 맞는 적절한 연기'들의 연속이 곧 자아의 본질)에서도 작가의 주제 의식을 찾아볼 수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다운 탐구 의식, 한 인간의 내면과 300억 년의 우주를 오가는 장대한 배경, 이러니저러니해도 '선한'게 느껴지는 주인공 사쿠야의 솔직하고 담담하면서도 치열한 자기 성찰을 들여다볼 수 있는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우리가 사랑했던 그 사람의 모습이 AI로 복제된 가짜일지라도, 그 소통 속에서 내가 느낀 감정은 본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책을 읽으며 밑줄 그은 문장들을 옮겨 본다.

사랑은 이미 달라져버린 오늘의 그 존재를 어제의 그것과 동일시하며 지속된다.
아무리 조심해도 고독은 날마다 몸 곳곳에 뚫린 틈새로 차갑게, 소리 없이, 침투해 들어왔다. 나는 다급하게 약간의 창피함을 느끼며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그 구멍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나는 살아간다. 하지만 삶이 결코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죽음에의 과정인 것이라면 그건 나는 죽어간다,라는 언명과 대체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 사는 것이 단지 시간을 들여 죽어간다는 의미인 것이라면 우리에게는 어째서 '살아간다'는 말이 필요한 것일까.
나는 기시타니를 내팽개칠까 봐 염려했던 것이 아니었다. 기시타니야말로 실은 내 인생에 다시 찾아온 '영웅적인 소년'인 게 아닌가, 하고 불안해졌던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을 걱정하며 애태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명백한 그 사실이 이 세계 자체에 대한 애착을 계속해서 도려내고 있었다.
기묘하게도 원격으로 외부의 지시를 받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내면에서부터 탈취 당한 듯한 감각에 빠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3인조가 내 마음속 공간에 들어 앉아 주스를 마시고 과자를 집어먹고 그 부스러기를 사방에 흘리면서 내 몸을 자기들 좋을 대로 갖고 논다. 그렇게 나는 내 몸을 그들에게 완전히 비워주고, 한사코 그곳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헛되이 걸음을 서두르고 있었다. (중략) 그때 나는 누구로서 죽는 것일까. 내 안을 제 세상인 듯 차지하고 있는 세 놈도 함께 죽일 수 있을까. (중략) 아니, 오리혀 이렇게 물었어야 한다. 모든 추억이 소멸하는 '죽음의 한순간 전'에 나는 그 소멸에 안도할 것인가 아니면 아쉬워할 것인가,라고.
몸이 없다는 건 나를 외계로부터 분리해 나 자신 속에 가둬둘 윤곽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도 나를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이라는 말을 '우주는'이라는 말 대신 사용해도 무방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의 머나먼 저 너머에서 별이 태어나고 나는 암흑물질로 채워지고 나는 지금도 계속 팽창하고 있다는 식으로. (중략) 사실은 그런 생각 자체도 성립되지 않을 터였다. 인간의 눈도 귀도 뇌도 모조리 상실되어 버리면 '우주'니 뭐니 하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고, 지금 이렇게 보이는 것도 느끼는 것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뭔가가 남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나'라는 존재의 이 의식이 애틋하게 느껴졌다. 그 출현과 한 찰나의 덧없는 지속은 기적처럼 존귀한 뭔가가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나는 이 생을 온전히 긍정할 수 있을까.
때로는 자존심을 짓밟는 의뢰인도 있었지만 내가 만난 부유층은 지적이고 기품 있고 예의 바르게 친절함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건 사실이고 현실이다. 일하는 중에 내가 살아오면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심오하면서도 어떤 계층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상인 세상 이야기를 듣게 되는 일도 있었다. 아마도 그들은 일종의 고독 때문에 잠시 말수가 많아진 것이겠지만, 그래도 타인에 대한 그다지 갈망적(渴望的)이지 않은, 약간은 체념의 기척을 품은 넉넉한 선량함을 지니고 있었다. (중략) 물론 어느 계측에나 다양한 인간이 있을 것이다. 부자라고 항상 지적이고 선량한 것도 아니고 가난한 자는 모두 어리석고 심통 사나운 건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의 대화에서 느낀 따분함이 뭔가 이 계층의 특유의 성향처럼 느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평생 이런 나날을 보내야 할지 모른다고 상상하면 정말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중략) 미요시에 따르면, 내가 그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어머니가 예전에는 부유했고 책도 즐겨 읽은 사람, 즉 '그쪽 세계'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그녀에게 품었던 공감에 찬물이 끼얹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대체 어딜 봐서 '그쪽 세계' 사람이라는 건가, 의아했다. 그래서 부조리한 격차를 시인하고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가기를 꿈꾸는 그녀를 향해 나는 조심스럽게 반박했었다. (중략) 나는 이 사람들과는 다르다...... 비참한 자존심에 허덕이면서 염불처럼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이곳은 내가 있을 자리가 아니고, 떠나야 할 곳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곳이 반드시 좋아져야 한다는 애착 따위, 가질 수 없었다. -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에 대한 주인공의 진술
나는 그런 정의감 때문에 남자 앞을 가로막은 게 아니었다. 그 점원을 딱하게 여기는 마음도 실제로 어느 정도나 있었는지, 애매하기만 하다. 나는 단지 그 남자를 죽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걸 끝내버리기 위해. 어떻게 죽일 것인가,라고. 물론 모든 게 비현실적인 상상이었지만 어쨌든 그때 내 마음속을 점령한 것은 그런 불온한 감정뿐이었다. (중략)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존재에 대해 타인에게서 이런 평가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즉 실제의 나보다 훨씬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토록 수많은 사람에게서. 이런 일은 결단코 없었다. 나는 항상 실제의 나만큼의 인간으로, 혹은 대개는 그 이하의 인간으로 남들 눈에 비쳐왔다. 아마 이런 식으로 봐준 유일한 예외는 어머니였을 테지만, 돌아가신 뒤로 나는 그 점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솔직히 나는 그 일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망연자실하고 있었다. 우선 불확실성이 문제였다. 하지만 그 진상이 아무래도 밝은 내용은 아닐 것 같아서 지난 몇 달 동안 마음 한 귀퉁이에 부옇고 묵직한 안개처럼 고여 있었다. 그게 불쑥 가슴속에 뭉클뭉클 넘칠 때마다 나는 그 뚜껑을 닫아버리듯이 눈을 꾹 감고 미간을 찌푸리며 한참을 견디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혼자 품고 있을 때는 그 나름의 진실다운 무게를 갖고 있지만 둘이 함께 품자마자 내용이 전혀 채워지지 않은 것처럼 가볍고 미덥지 않은 것이 되었다.
하긴 나는 별자리 읽는 법도 모르면서 별이 가득한 하늘에 압도된 사람처럼 몇 가지 일들을 개별적인 인상만으로 수집하고 그것들의 연관을 미처 이해하지 못한 채 그날 밤을 보내고 말았지만.
그러다가 따분해지면 나와 잡담을 나누러 내려왔었다는 게 신기해서 뭔가 우쭐한 기분이 들면서도 그 순간 내 가슴속을 스친 감정을 그대로 적는다면 애완동물이었나,라는 것이었다. 인간이 인간의 애완동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 걸까. 개와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동물을 '진짜 가족'처럼 소중한 반려로 여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인간이 '진짜 가족'같은 애완동물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아무것도 바뀌는 일 없이 원래 그대로의 어머니를 추억한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다. 살아 있는 어머니조차 결코 똑같지 않고 순간순간 변화하니까. 아니면 내 안에 어머니가 지금도 살아 있다,라는 것은 그렇게 계속 변화해 간다,라는 것인가.
이토록 투명한 유리도 그 단면은 푸른빛인 것을 보면 그대의 맑은 두 눈동자도 수많은 사랑을 저장할 수 있으리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타자성他者性을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자네의 인간적인 성실함을 나는 믿는다.
선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축복받으며 태어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큰 혜택을 받았다. 하지만 나 자신에 관해 말한다면, 내 몸속에 몹시 불성실하고 경박한 뭔가가 섞여 있다는 혐오감을 도저히 씻어낼 수 없었다.
어머니는 최선을 대하 지신의 인생과 과감히 맞부딪혀온 것이다. 실제로 어머니를 막판으로 몰아붙인 건 이 사회였다. 어머니를 매우 기발한 방법을 선택하면서까지 막판으로 몰아붙인 건 이 사회였다. 어머니는 매우 기발한 방법을 선택하면서까지 '이제 충분하다'는 실의의 밑바닥에서 탈출해 가까스로 '일반적'이 되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나는 언제까지고 '일반적'인 것에서 일탈해 버린, 어떻게도 수습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인생에서 행복을 찾아냈던 것일까. (중략)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것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즉 가장 사랑하는 타자의 마음으로서.
나는 참새의 눈에 이 세계가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한다. 그 온몸에 이 세계가 어떻게 감지되는지도. 하지만 인간이 나와 전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저마다 이 세계를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방법으로 인식한다. 나와 참새가 이 세계를 진실로 동등한 게 향수하는 것은 사후에 각자의 종의 고유한 인식 시스템이 파괴되고 우주 자체와 일체화 할 때이리라. 그렇다면 나에게 지금 저 나무숲의 초록이 저토록 아름답게 보이는 것에는 내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어머니가 떠나버린 세계에서도 역시 올바르게 살아가야 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어머니의 기억과 함께 살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될 테니까. 어머니를 떠올리는 게 고통이 되는 그런 인생에 어떤 기쁨이 있을 것인가.






매거진의 이전글"인생", 위화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