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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사과하기

엄마의 실수를 인정하기

by 세상의 주인공님

준형이가 지난 월요일에 정형외과에 가서 진료를 봤다. 토요일에 집 마당에서 놀다가 넘어졌는데 무릎이 너무 아프다고 울었다. 그 뒤로 다리를 절뚝거렸다. 4월쯤 인라인케이트를 타다가 오른쪽 다리 고관절을 다친 적이 있어서 그때만큼 아프냐고 물었다. 이번엔 왼쪽 무릎인 것이 왠지 그때 다친 다리에 대한 보상작용이 있었나 싶었다. 병원에서는 너무 다리를 많이 써서 아플만하다며 고르지 못한 왼쪽 무릎 사진을 보여줬다. 뼈에서는 파골과 조골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는데 아직 만 8살인 준형이는 이러다 금방 좋아질 것이라고 일주일 동안만 아무런 운동을 하지 말고 쉬어보라고 했다.


학교에서 계단 대신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고, 체육 시간에도 앉아서 쉬어야 하고 방과 후로 고른 피구 수업도 쉬어야 하고, 유일하게 다니는 학원인 수영도 요즘 평영을 하고 있어 쉬기로 한다. 그게 지난주이고 오늘은 4분기 방과 후 수업을 신청하는 화요일이다. 월요일에 벌써 내일부터 방과 후 수업을 신청받을 테니 무슨 수업을 들을지 결정하세요 라는 안내장을 받았다.


준형이는 이제 다리가 괜찮다고 했지만 아직 완전히 나은 것 같지는 않다. 종종 걸음걸이에서 다리를 저는 듯한 모습을 봤다. 달리기는 가능하지만 비틀기를 하면 아프다고 했다. 막 다쳤을 때는 피구 방과 후는 당분간 안 되겠다고 했는데 일주일쯤 지나 무릎이 나아지니 마음이 바뀌었나 보다.


2학년까지만 수강할 수 있는 피구 방과 후를 꼭 하고 싶다고 해서 '그래? 이제 안 아프면 들어보자'라고 했지만 아픈 다리를 가진 이 녀석의 운동을 응원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수강신청이 개시됐다. 우물쭈물한 사이 2시간 만에 대기석까지 마감이 돼서 수강신청을 대기조차 할 수 없었다. 뒤늦게 피구 선생님께 잔여석이 생기면 준형이가 수강하겠으니 연락 부탁드린다고 문자를 보냈고 준형이가 수업을 마치고 오는데 그 말을 했다.


준형이가 운다. '엄마 때문이야!' 하면서 운다.


미안한 마음이 사그라들고 슬그머니 나도 화가 난다. 그동안 피구를 했던 것도 다 내가 수강신청을 해서 할 수 있었는데 못하게 된 것만 내 탓이 됐다. 기분이 나빠서 나도 감정적으로 나가고 말았다.


"뭐라고? 이 수업을 애초에 들었던 것도 내가 수강 신청을 해서였는데 이것만 내 탓이야? 그럼 네가 스스로 하지 그러니. 네가 혼자 살아보지 왜 나더러 하라는데. 잘못은 내 탓이고 잘한 건 네 덕이냐."


부끄럽다. 어린애에게 이런 소리를 하다니. 평소 같았으면 이렇게는 안 했을 텐데 어쩌면 내가 가진 죄책감이 커서 이렇게까지 쏘아붙였을까.


울면서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내 옆을 떠나지 않고 서성거리면서 '엄마, 미안해요' 하고 말하는데 '나도 미안해.' 했다. 준형이는 울어도 되는 티켓을 획득하기라도 한 듯이 더 운다.


집으로 가는 길, 진정이 된 준형이에게 재미난 제안을 해본다.


"아직은 수강신청 기간이잖아. 중간에 다른 사람이 금요일 오후에는 다른 곳에 가느라 자주 빠질 것 같다면서 수강신청을 취소할 수도 있고, 수강신청 기간이 끝나면 결제 기간이 오는데 그때 납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수강신청이 자동으로 취소가 되거든? 그런 사람이 많을 거야. 그때 다시 신청하면 될 거야. 아니면 진짜 진짜 얍삽한 방법이 하나 남았는데...?"


"응? 그게 뭔데? 난 뭐든 할 준비가 돼 있어!"


"좀 치사하긴 한데, 너랑 같이 수업 듣는 친구들 있잖아. 걔네들이 수강신청을 취소하면 자리가 나서 네가 들을 수도 있어! 내일 교실에 가서 피구를 같이 듣는 반 친구들에게 나는 피구 이제 안 들으려고 신청 안 했어! 하면 너랑 수업을 같이 듣고 싶어서 신청한 친구들은 취소를 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번주 금요일에 마지막 수업을 할 때 피구 듣는 친구들에게 나는 신청 안 했어! 하고 말하면 너랑 같이 수업을 들어야만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애들이 신청 취소를 하는 거지! 어때?"


"오잉? 나는 친구들이랑 같이 안 들어도 재미있는데. 그냥 피구 수업이 좋아. 아마 친구들도 그럴 거야."


우와. 나는 무슨 현자를 본 줄 알았다. 내 아들이 악마의 속삭임 같은 이 못난 엄마의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다니. 대쪽 같은 내 아들이 너무 멋져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정말로 수강신청을 하고 결제까지 가지 못한 아이들이 많았어서 대기자까지 모두 빠지고 준형이까지 수강접수가 이뤄졌다. 준형이가 좋아하는 영규, 서진이, 휘준이, 창빈이, 원준이 모두 다 같이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왜 나는 아이의 마음을 시험해보고 싶어 했을까. 정말로 그렇게라도 수강신청을 해서 준형이에게 갖고 있는 죄책감을 덜 수만 있다면 좋다고 생각을 했던 걸까. 아니면 언제나 규칙을 준수하는 바른생활 사나이 준형이를 흔들어보고 싶었던 걸까. 이런 유혹에 뭐라고 맞대응을 할지 준형이의 기발한 생각을 듣고 싶었던 걸까.


뭐가 진짜였든 다행이다. 준형이가 엄마를 처음으로 탓하며 울었던 일이 잘 마무리가 됐고, 피구를 할 수 있을 만큼 다리가 나아서. 대쪽같이 올곧은 내 아들을 사랑한다. 다음에는 미리 상의를 하고 나중에 취소하더라도 좋아하는 수업은 꼭 수강신청을 해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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