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둘 다먹지 마!

양보 없는 싸움에 밥을 잃다

by 세상의 주인공님

2023.11.29


남편이 밥을 먹고 오는 날이다. 가온이는 기침으로 병원에 다녀왔고, 나도 아침부터 몸이 으슬으슬하고 힘이 쭉 빠지는 게 독감인가 싶었다. 반찬거리도 없었는데 마침 주문했던 굴비가 와서 바삭하게 구워냈다. 준형이가 수영도 안 가는 날이고 낮에 간식도 조금 먹어서 5시부터 상을 차려 먹으라고 내놓았다. 만화 보던 녀석들이 하나씩 와서 자리에 앉는데 평소 준형이가 자주 앉던 자리에 가온이가 턱 하니 앉아서


"오늘은 내가 여기 앉을래. 형아가 안으로 들어가."


준형이도 지지 않고 맞선다.


"맨날 내가 앉는 자리인데 왜 갑자기 네 자리래? 아, 그럼 가위바위보 해."


나 같으면 '아냐 내가 먼저 앉았으니 내 자리야' 했을 텐데 가위바위보를 한다. 가온이가 말려들었다! 가온이가 졌다. 승부가 나왔는데도 승복하지 않는다.


"그래도 내 자리야. 형아가 안으로 들어가."


준형이가 다시 한번 가온이를 끌어들인다.


"그럼 가위바위보 3판을 해서 먼저 이긴 사람이 앉는 거야."


3판을 먼저 준형이가 이겼다. 가온이가 오늘은 꼭 그 자리에 앉고 싶었는지 그래도 안 비킨다. 옥신각신이 시작됐다.


"내가 이겼잖아." "내가 먼저 앉았잖아." "아, 싫어."


밥상이 다 차려져 먹기만 하면 되는데 저러고 있다. 하이랑 나는 앉아서 그걸 보다가 외친다.


"둘 다 내려가!!! 너네는 밥 없어. 어디 밥상머리에서 싸움질이야?! 굶어!"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한 건지 바로 반응이 뒤따른다.


준형 : "엄마 잘못했어요. 제가 그냥 안쪽에 앉을게요."


엄마는 대쪽 같다. 아랑곳하지 않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미 시간 지났어! 내려가!"


단호하게 다시 말한다. 설마 하는 표정이다. 입이 삐죽 나온다. 밥그릇을 다시 밥솥에 부어 없앤다. 그제야 각자 방으로 들어간다. 하이만 생선을 발라 밥을 먹이고 놀게 하고 나도 맛있게 구웠던 생선을 맛나게 몽땅 먹어버린다. 애들 것을 남길까 하다가 '에잇 필요하면 또 굽지' 하고 먹어버린다. 두 녀석이 시키지 않아도 조용히 책을 보다가 잠들려고 한다. 6시에 자면 밤잠은 언제 자는 거지?


"자지 마. 책 읽어줄게. 읽고 싶은 책 가져와."


하고 가온이를 깨워 앉힌다. 가온이 책을 읽어주려니 하이가 와서 자꾸만 책장을 넘기려 한다.


"하이는 하이책 보고 있어. 오빠 책 다 읽고 하이 책도 읽어줄게."


하는데 방에서 나가는 문을 잘 못 연다. 가온이 더러 문 좀 열어주라고 하니까 바로 딜을 시전 한다.


"하이 문 제가 열어주면 나 밥 주세요."


"아니야. 그건 안돼."


가온이가 기특하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화해를 시도하는 녀석. 준형이는 아무 말도 없이 책만 본다. 하이 책까지 다 읽고 거실로 나와 앉으니 준형이가 묻는다.


"엄마, 물은 마셔도 돼요?"


식탁으로 가는 녀석 입이 씰룩 쌜룩한다. 녀석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다. 짠한 마음이 든다. 이것이 준형이가 취하는 화해의 신호일 것이다.


"그럼, 마셔도 되지."


토깽이 같은 가온이가 또 시도한다.


"그럼 밥도 먹어도 돼요?"


웃음이 나올 뻔했다. 귀여운 녀석. 물 마시고 방에 들어가려는 준형이도 같이 불러 세운다.


"둘 다 이리 앉아봐. 왜 오늘 저녁을 못 먹었어?"


준형이가 형님답게 대답한다.


"우리 싸워서요."


"싸운다고 항상 밥 안 준다 그랬어?"


"밥을 앞에 두고 안 먹고 싸워서요."


"그래, 너희는 밥상머리 교육을 받은 거야. 다시 말하면 그건 식사예절이야. 엄마가 너네한테 식탁을 닦으라고 하길 했어, 수저를 놓으라고 하길 했어? 오후 간식도 별로 안 먹었다고 만화 보는 너네 끝나자마자 밥 먹게 딱 차려서 수저 들고 먹기만 하면 됐어. 그런데 그 앞에서 서로 양보를 안 해서 싸워? 서로가 자기가 양보할 수 있었던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봐."


준형 : "저는 항상 제가 앉던 자리니까 오늘은 동생에게 양보할 수 있었어요."


"그래? 그럼 가온이는 어떻게 할 수 있었어?"


가온 : "형아가 항상 앉던 자리니까 제가 들어가서 앉을 수 있었어요."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 둘 다 지금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아까는 그렇게 못했네. 엄마 생각에는 준형이는 항상 앉던 자리니까 오늘은 가온이 앉으라고 할 수 있었어. 그리고 이미 가온이가 앉았기 때문에 '아, 항상 내가 앉았는데 가온이도 이 자리가 좋았구나.' 생각하고 그동안 혼자만 앉았던 것을 미안하게 생각할 수도 있어. 그런데도 가온이가 먼저 앉았음에도, 이 자리에 이름표가 붙은 것도 아닌데 너는 네 자리라고 가위바위보를 해야 한다고 그냥 먼저 앉는 걸로는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고 표현한 거야. 그렇지?"


"네.."


"그리고 가온이는 반대로 형아가 매번 앉던 자리니까 앉고 싶을 때 먼저 '형아, 오늘만 내가 앉으면 안 돼? 내일은 내가 다시 저쪽 자리 앉을게.' 하고 양해를 구하는 말을 먼저 꺼낼 수도 있었어. 그리고 형아가 하자는 가위바위보를 안 했으면 모를까 이미 해놓고서 '지면 비켜주는 거다.'라는 말을 듣고서 가위바위보를 했다는 것은 그 말에 동의한다는 뜻이야. 한번 져서 기회를 더 주겠다고 형아가 '그럼 3번 먼저 이긴 사람이 앉는 거야.'라고 말을 했을 때도 또 가위바위보를 했고, 3번을 모두 졌는데도 또 안 비켜 줬잖아. 그 행동은 가온이가 약속을 안 지킨 사람이 되는 거야. 안 그래?"


"맞아요."


"그래. 너희 둘 다 상대방 입장에서 먼저 생각하고 양보할 수 있었고, 말로 먼저 했으면 이런 다툼도 없었을 거야. 그런데 둘 다 자기 생각만 했어. 그러니까 싸움이 난 거야. 둘 중 한 명이 누구라도 양보를 하고 다음을 약속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어. 앞으로는 그러지 말자. "


"서로의 잘 못을 사과하자. 뭐라고 해야 할까?"


"가온아, 네가 먼저 앉았는데 내가 내 자리니까 비키라고 해서 미안해."


"형아, 가위바위보에서 졌는데도 안 비켜줘서 미안해. 다음에는 먼저 앉겠다고 말하고 앉을게."


"좋아, 잘했어. 이제 엄마랑 안아."


포옹을 하자 두 녀석은 모두 울고 있다. 배고픈 설움이 큰 법이다. 아빠도 없는 이 저녁에 구제해 줄 사람도 없고, 잠이라도 청하려 해도 못 자게 하는 엄마라니. 다시 생선을 5마리 구워서 살을 발라준다. 군말 없이 밥그릇을 한 공기씩 뚝딱 비워낸다. 한창 크는 사내 녀석들이 얼마나 배고팠을꼬. 내 새끼들 많이 먹고 얼른 자라라. 사랑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만 정리하는 건 불공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