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06
어제는 가온이가 너무 흥분을 했다. 눈에 가득 고인 반항기가 여간 잠잠해질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형이랑 하고 있던 보드게임을 만졌다고 하이랑 싸웠다. 동생이랑 싸웠다고 뭐라 했더니 다시 형아방에 허락도 없이 들어가 갑자기 무선조종 자동차가 자기 것이니 가지고 나와야겠다고 했다.
"내 방에서 나가란 소리를 듣고 안나가?!"
"나는 내 것을 가지고 나가야겠어"
하면서 소란스레 싸우다 서로 몸싸움까지 번졌다. 내가 자세한 상황을 보지 못해서 뭐라 하지 못했다. 설거지를 하고 있었고. 남편이 애들을 보고 있으니 곧 잠잠해지려니 생각했다. 하지만 중재는 쉽지 않았고 가온이가 울며 발악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괴로워 보였다. 나도 힘들었다. 남편이 저녁마다 수영장을 다니게 돼서 잠이 들기까지 아이들 챙기는 것이 내 몫이 되었다. 다행히 누워서 셋이 끝말잇기를 하면 하이는 그걸 들으며 내 손을 꼭 잡고 하품을 하다가 금방 잠이 들곤 했다.
어제는 좀처럼 눈에 독기가 가시지도 않고 가온이의 화를 제대로 가라앉히지 못한 것 같아서 오늘은 방법을 바꿔봤다. 어제 낮에 형아는 수영 가고 없고 하이는 낮잠을 잘 때 가온이와 오랜만에 보드게임을 했다. 아빠가 준비한 크리스마스 선물인 '캐터필트 킹덤'을 가온이는 꽤 잘했다. 나와 대결에서 연속 4판을 이긴 승리감에 도취돼 - 너무 과한 칭찬을 해줬던 걸까 -.- 형아에게 한판 하자며 덤비고 있었다.
고무줄을 두 번 감아 던지면 투포환이 너무 멀리 날아가버리기 일쑤인 내 발사 실력과 달리 가온이는 꽤 정확도를 가지고 내 병사들을 쓰러트리고 있었다. 오늘도 그럴 거라 예상하고 형아에에게 덤볐지만 결과는 참패. 화를 쏟아내나 했지만 앞서했던 스머프 사다리 게임에서 거둔 승리가 아직도 기쁨을 주고 있었다.
승패가 났으니 이제 다른 게임을 하자고 둘은 정리를 시작한다. 그런데 가온이가 성벽을 쌓는 블록들을 손으로 휙 쓸어버렸다.
"가온아, 게임을 하면 누구나 이길 때도 질 때도 있어. 기분이 나쁘다고 그렇게 행동하면 위협이야. 알겠지? 그러지 말자."
이어진 당근질주 토끼운동회 게임을 마치고 또 정리를 하려는데 가온이가 또다시 바닥에 토끼 두 개를 내팽개친다. 눈이 이글거린다. 진 것이 너무 분해서 감정조절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가온아"
하고 부드럽게 불렀는데 이글 거리는 눈으로 응대한다.
"왜"
"너도 알잖아."
이럴 때는 '엄마 제가 던져서 잘못했어요.' 하고 말하고 넘어갈 줄 알았다. 안 되겠다.
"벽 보고 3분 서 있어."
"왜?"
"6분."
"아 왜에에에 에"
"9분"
이제야 자기 방으로 가서 벽을 보고 서 있는다.
"왜 네 방으로 들어가. 아니잖아. 안방으로 들어가."
안방벽에는 아무것도 없고 지금은 자는 시간이 아니라 그 방에 누가 들어갈 일이 없어서 방해받지 않을 수 있다. 가온이 방에는 장난감이니 체중계니 책이니 한눈팔 물건들이 너무 많다. 지금도 체중계에 올라서서 파란 불빛과 숫자들을 보며 놀고 있다. 왜 벽 보고 서있으라고 했는지 그 속뜻을 모르는 모양새다.
"코자는 방으로 가라고."
"아 왜. 나는 여기 서고 싶단말이야아!"
"12분!!"
이제야 가서 선다.
"시간 다되면 뭘 반성했나 물어볼 거야. 제대로 대답 못하면 다시 서는 거야."
12분이 꽤 길었다. 알람이 울리자 대화를 시도했다.
"이리 와. 앉아봐. 진정이 좀 됐어? 무슨 생각했어?"
"엄마가 한번 말했는데 또 던져서 잘못했어."
눈빛이 이글거리는 게 사라졌다. 진정이 됐고 평상심을 찾은 모습이다.
"맞아. 잘 알고 있네.
가온아, 게임을 할 때는 누구나 이기고 지는 일이 생겨. 그래야만 승부가 나잖아. 지금 가온이 기분이 게임에서 지는 걸 받아들일 수 없을 때는 승패가 없는 다른 일을 해. 종이 접기나 그림 그리기, 블록 쌓기 같은 거 말이야. 이번에 했던 게임은 실력이나 체력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승패가 반드시 생기는 거야. 가온이도 이길 수 있지만 운이 따라줘야 승리할 수 있는 게임이었어. 어제는 운이 좋아서 엄마를 잘 이겼지만 오늘은 운이 좀 나빴어. 그런 날도 있잖아. 안 그래?"
"응." 하며 수긍하는 모습이다.
"이리 와. 엄마 안아줘."
하고 포옹하니 어깨너머로 흐어엉 우는 소리가 들린다. 그때 어제 묵은 화까지 가라앉힐 요량으로 말을 덧붙여본다.
"가온아, 엄마는 알고 있어. 가온이는 멋지고 친절한 사람이라는 걸. 어제 하이가 식탁의자에서 내려오고 싶어 할 때 엄마가 다른 걸 하고 있으니까 냉큼 달려가서 하이를 번쩍 안아 들고 내려주고 유치원에서 만든 멋진 작품은 언제나 엄마에게 선물해 주잖아. 이런 게임에서 한 두 판 진다고 해서 가온이가 멋진 사람 아닌 거 아니야.
엄마는 이번에 상담 때 유치원 가서 다 들었어. 유치원에는 가온이를 이길 수 있는 친구들이 없어서 알까기나 딱지치기를 맨날 선생님이랑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하고 났더니 가온이 어깨가 하늘로 치솟는다. 자기 방에 가며
"엄마, 내가 종이꽃 만들어줄까?"
내가 말한 대로 가위로 그려진 선을 따라 오리면 멋진 작품이 되는 종이를 금방 오려온다. 꽃 하나, 오리 둘, 나무 셋, 눈송이 넷, 눈사람까지 다섯 장을 오릴 때까지 방에서 조용하다. 기특한 것.
가끔 게임에서 지는 일이 꼭 자기가 이 세상에서 잘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듯이 느껴질 때가 있다. 노력해도 운이 따라야만 잘 되는 게임도 있으니까.
가온이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식혀준 '생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가온이처럼 나도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가온이에게 뭐라고 해줘야 할까 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어제처럼 가온이의 반항하는 모습을 보고 '와! 벌써 5살 3개월이 나에게 이렇게까지 반항을 한다고? 지금 바로 잡지 않으면 사춘기에는 어디까지 갈 작정인거지? 내가 뭐라고 하는데도 계속 대들기만 하다니. 이런 아이 었던가?' 이런 생각에 저 이글거림에 찬물을 끼얹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강하게 나갔다.
어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효과는 처참했고, 오늘 방법을 바꿔서 스스로 가라앉힐 시간을 갖게 한 것은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나도 생각할 시간을 가지고, 가온이가 자기 조절능력을 조금 키우지 않았을까. 다음에 게임에 져서 분할 때 '지금은 종이 오리기를 해야겠어. 지금은 지는 경기가 아닌 블록 만들기를 해야겠어. 내 창의성은 멋진 능력이야.' 하고 생각을 전환할 수 있도록 오늘도 아이의 경험이 하나 쌓였다. 나의 부모로서 경험도 더불어 쌓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