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온이가 하이랑, 준형이랑 아빠랑 엄마랑. 가족 모두와 갈등을 빚었던 다음날 아침이다. 유치원을 가는 길에 언제나처럼 유모차를 밀고 가는 내 옆에서 하얀 털잠바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밀어 넣고 팔자 눈썹을 찡그리며 갑자기 한마디를 꺼낸다.
"엄마, 하이가 나를 무서워하고 싫어할 것 같아."
"왜?"
"아니, 어제도 하이랑 싸우고 옆에 오면 자꾸 소리 지르고 밀쳐내고 그랬잖아."
"...."
울컥하고 대견했다. 평소에 흥분해서 말할 땐 언제나 하이에게 '나는 네가 싫어! 내 물건을 망가뜨리고 자꾸만 내가 하는 데로 와서 엄마한테 혼나게 하잖아.'라고 외치던 이 녀석이 반대로 동생이 자기를 미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뿐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상대방 입장에서 바라보기도 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가온아, 엄마 생각은 좀 달라. 가온이도 유치원에서 친구들이랑 싸웠다가 또 화해하고 내일은 같이 놀고 그러잖아. 한번 안 좋았다고 해서 금방 미워하거나 다시는 안 보고 그러지는 않아. 더구나 우리는 가족이라서 매일매일 만나잖아. 그러니까 좋은 기억을 다시 만들 기회도, 화해할 기회도 많지.
엄마가 볼 때는 하이가 오빠를 자꾸만 따라 하고 가는 데로 따라가는 행동은 오빠가 좋아서 인 것 같아.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 하이가 걷다가 힘들다고 엄마한테 '안아! 안아!' 할 때 엄마는 무릎 구부려서 꼭 안아만 주고 등 토닥여주는 게 다인데 가온이는 하이를 안고 저만치 걸어주잖아. 오빠에게 의지하고 있을 거야."
"헤헷"
아.. 사르르 녹는다. 가온이 표정이 씩 웃고 걱정했던 마음이 녹고, 내 마음이 녹는다. 말랑말랑해진다. 아이를 키울 때 하루 24시간을 같이 있을 때, 너무 버겁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어른들 사이에서 아주 드문 이 말랑말랑한 일들이 아이들 세상에서는 아주 만연하다. 아무렇지 않게 먼저 손을 내밀고 안아달라고 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기분이 좋다고 웃는다.
우리는 언제 어른이 됐을까? 더 좋아하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 덜 웃고,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뒤에서 재고 있는 어른들의 의모습들. 먼저 손 내미는 저 작은 손들, 저 작은 입들이 오물조물 말랑말랑한 말을 만들어낸다. 만약 가온이를 24시간 내가 돌보지 않았으면 이런 얘기는 못 들었을 것 같다. 아이들은 갑자기 묻지 않아도 툭하고 자기 속내를 내비치곤 한다.
세 아이를 키워내는데 나는 고집을 부렸다. 셋 모두 어린이집을 보내지 않고 내가 오롯이 키워내고 싶었다. 내 욕심으로 그렇게 했지만 그렇다고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외벌이로 시장 봐서 직접 해먹이고, 충분히 경험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고 충만하게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하기 위해 애쓰는 일은 24시간 자는 동안에도 끝이 없다. 20개월인 하이는 자다가도 엄마하고 불러보고 응.. 하는 희미한 엄마의 대답이 있으면 바로 다시 잠을 잘 자는데 대답이 없으면 깨서 운다. 6살 가온이는 자다가 발로 찬다. 9살 준형이는 올해부터 자기 방에서 잠들지만 이갈이가 있어서 가끔 잠이 깨면 가서 들어보고 발로 찬 이불을 덮어주곤 한다.
이렇게 집에서 아이들만 볼 것 같으면 그 공부는 왜 다 했을까. 첫 육아를 시작하던 30살에는 다시 사회로 돌아갈 시간에도 나는 사회에서 당연히 필요한 일꾼이 될 것이라는 강한 자신감이 있었다. 세 아이를 키우고 싶은 것도 처음부터 내 욕심이었지만 , 10년이란 세월이 흐르다 보니 지금은 그렇다. 이제 아이들이 커서 엄마손이 필요 없어지면 나는 어디서 내 존재감을 이보다 더 잘 펼칠 수 있을까. 아직도 나는 사회에서 필요한 사람일까?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 아이를 끊임없이 하루 중 공백 없이 살펴보고 이야기를 듣고 잘할 때도 잘 못할 때도 지켜볼 수 있어서. 그리고 엄마에게 툭, 말하고 싶을 때 내가 옆에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엄마에게 말해줘서 고마워. 너는 나쁜 사람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 어제는 그냥 컨디션이 좀 안 좋은 날일 뿐이었지.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우리 모두는 알고 있으니 걱정 마."라는 얘기를해줄 수 있어서. 사랑해 내 아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