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중요한 것은 너의 행복이야.
주말이다. 평일에는 언제나 하루 2편씩 한편은 10분가량 되는 만화를 볼 수 있는 권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있다. 가온이는 어제 봤던 뽀로로 슈퍼썰매 대모험 영화가 재미있어서 한 번 더 보고 싶었고, 준형이는 스물다섯스물하나에 빠져 약속된 시간보다 더 길게 TV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모두들 자기 보고 싶은 것을 충분히 봤고, 점심도 시리얼을 우유에 말아먹어서 아주 간편하게 지나갔다. 늦잠도 잤겠다 모두가 마음이 편안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 티브이를 꺼야 하는 시간이 된 줄 알았는데 가온이가 하이것을 안 봤다면서 뽀로로 시즌 5 중 한 화를 틀려고 하자 준형이가 화를 냈다.
"아까 하이것도 봤잖아! 왜 또 트는데"
"아냐. 하이 것은 덜 봤어."
"아니! 하이 것도 다 봤거든. 네 것을 보고 바로 하이 것을 틀어준 다음에 내 것을 본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꺼. "
"아니라고!!! 형아는 왜 모르면서 그렇게 말해. "
음.. 나는 일반적으로 규칙을 잘 준수해야 한다고 하는 편이긴 하지만 만화 한두 편 정도 더 본다 한들 이미 두 시간을 본 지금 상황에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 자기들은 아주 길게 한 시간씩이나 봤으면서 하이 것 10분짜리는 왜 제재를 가하려고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준형이를 불렀다.
"준형아, 지금 준형이가 평소보다 많이 화를 내고 눈물까지 보이는데 엄마는 왜 그렇게까지 화가 났는지 잘 모르겠어."
"아니... 아까 분명히 뽀로로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하이 뽀로로 만화-해리가 원숭이 섬 간 거 봤는데 자꾸만 만 가온이가 안 봤다고 하잖아."
"그래? 엄마는 요리하는 중이라서 아까 상황을 잘 모르겠어. 가온이를 불러서 얘기해 보자. 가온아, 이리 와 봐. 아까 하이 만화 봤다는데 왜 또 본다고 한 거야?."
"하이 것은 아까 한 개만 봤어. 루피가 운동하는 이야기랑, 해리 이야기 나왔는데 두 개를 봐도 5,6분 짜리라서 2개를 봐야 한 개인 거라고 했잖아. 그래서 더 틀어주려고 한 거야."
"준형아, 가온이 말 들었어? 서로 오해가 있었네. 가온이는 짧은 것 두 개라서 하나만 본 거라고 생각했고, 준형이는 두 개를 봤으니 끝났다고 생각했구나! 엄마도 지금 가온이가 뽀로로 만화 하나만 보고 나서 끄려고 했던 거 기억나. 그런데 하이는 다음화 예고편이 나오면 더 할 줄 알고 끄는 거 싫어하거든. 다 끝나고 엔딩노래 나올 때 같이 안녕~하면서 꺼야지 기분 좋게 끌 수 있어서 엄마가 하나 더 보라고 했어."
".."
"준형이는 가온이가 이런 생각인 줄 알고 있었어? "
"아니. "
"응 그랬구나. 가온이는 이제 가서 할 것 하고 놀아."
"준형아, 이제 조금 오해가 풀렸어? 음. 그럼 이제 아까 왜 그렇게 화가 났나 곰곰이 생각해 보자. 준형이는 가온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가온이가 자꾸만 규칙을 어기고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더 보려고 하잖아. 그게 화가 났어."
"그래? 규칙이란 것은 왜 필요하고 누가 만들었고, 누가 지켜야 하는지 생각해 볼까? 우리가 처음에 하루에 만화 2개씩만 보자고 한 것은 누가 만든 규칙이고 왜 시작이 됐지?"
"치카할 때 하나만 보면 치카가 다 안 끝나서 두 개를 보여줘야 된다고 두 개를 보기 시작했어."
"맞아. 그때는 네가 슈퍼윙스를 볼 때였어. 가온이 보다 더 어린 3살쯤이었나 그랬을 거야. 그땐 우리 집에 TV도 없어서 태블릿으로 보여줬어. 그러다 이제 치카하면서 만화 보는 게 불편하니까 오늘 치카를 잘 한 사람은 다음날 만화를 두 편 봐도 좋은 걸로 바뀐 거지."
"응."
"좋아. 그럼 그 규칙은 엄마가 만들었네? 준형이 가온이 하이가 잘 따라주고 있고."
"응"
"그렇다면 엄마는 왜 이런 규칙을 만들었을까? 너네가 실컷 만화를 보고 알아서 끄도록 하지 않고."
"....."
"엄마 생각에는 말이야, 아직 어린 너네는 밖에 나가서 놀이터에서 놀고 공원에서 놀고 그러면 계절 따라 변하는 나뭇잎 색도 보고, 만져보기도 하고, 흙도 만져보고 종이도 필요 없이 막대기로 그림도 그릴 수 있고, 스스로 걸어 다니면서 이 길 저길 가보니까 공간감각도 길러지고 날씨 따라 비도 맞아보고 바람도 쐐보고 여름에는 물놀이도 하고 그런 것들이 앉아서 TV로 보기만 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엄마가 너 어릴 때 매일 공원에 데리고 갔었다고 했잖아."
"맞아. 나 어릴 때 사진이 보라매공원이 많아."
"그래, 그래서 치카할 때 외에는 TV를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치카는 꼭 해야 하는데, 어릴 때는 충치가 생기면 아프고 치과에 가서 공포스러운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잘 모르니까 이 닦기를 보통은 싫어해. 그런데 어릴 때 준형이가 크라운을 하고 나서는 너무나 후회가 돼서 TV를 보는 것보다 충치가 생기는 것이 더 나쁘다고 생각해서 엄마 아빠는 만화를 보여줘서라도 치카를 하도록 습관을 들였어. 다행히 지금은 둘 다 만화를 보지 않아도 치카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스스로 잘 해내기도 하지. 그 규칙은 엄마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만들었고, 준형이, 가온이가 잘 지켜줘서 고마워. 그런데 규칙이란 것은 왜 만들까?"
"안전하라고"
"맞아! 잘 알고 있네. 건강한 몸과 정신을 만들기 위해서는 TV 보는 것보다는 밖에서 노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 엄마가 만든 거야. 그런데 우리는 가끔 매일 보지 않는 아빠까지 포함시켜서 이 만화는 아빠 것이야, 하면서 한편 더 보고, 이건 엄마 거야 하면서 한편 더 보고 그럴 때도 있어. 규칙을 안 지킬 이유는 갖다 대면 얼마든지 있다는 거지. "
"..."
"오늘은 어제에 이어서 이틀째 집에서 놀기만 하고 있어. 밖에 안 나가니까 심심하고 밖은 너무 춥고, 그래서 집에 다들 있잖아. 이럴 때 만화 좀 더 보면 어떨까? 준형이도 스물다섯스물하나를 보느라 시간을 넘겨서 더 보게 됐잖아. 지금 가온이가 만화를 틀려고 했던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아."
"하지만 나는 스물다섯스물하나 보려고 평일에는 내 만화도 안 보고 모아뒀단 말이야!"
"응. 그래 맞아. 준형이는 그랬지. 준형이가 노력했다는 것을 알아. 엄마가 하려는 말은 규칙은 한 집단이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필요에 의해서 만들고 지키는데 예외사항이라는 것도 있고, 그 집단의 큰 틀을 깨지 않는 이상 그 예외가 허용된다는 것이지. 준형이는 모아뒀는데 가온이가 더 보려고 하니까 억울한 거야?"
"아니. 그렇지는 않아. 가온이가 규칙을 안 지키면 불편해."
"그럼 지금 준형이가 화가 난 사람은 가온이야? 누가 준형이에게 잘못해서 화가 난 거야?"
"아니야. 이제 오해가 풀렸어. 그런데 화는 아직도 안 풀렸어. 안아줘"
"그래, 우리 아들 안아보자"
준형이를 안아서 한참을 등을 쓰다듬는다. 준형이는 한번 이것이 규칙이다. 지켜야 한다라고 생각하면 너무나 강력하게 그것을 지키려는 의지가 있어서 때로는 안쓰럽기까지 하다. 왜냐면 인간은 욕망의 집합체이고, 그 욕망이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게 만들고, 발전시킬 때도 있고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자유를 느낄 수도 있는 법인데, 세상 모든 규칙을 다 지키면서 자기 욕구를 모두 충족시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라서 어른들도 일탈이라는 것을 하는 법인데, 겨우 8살 3개월 된 녀석은 이 모든 것을 지킬 때 안도하는 것 것 같아서다.
"준형아, 규칙은 집단이 효율적으로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뿐이야. 만약 준형이가 사람들 틈에서 지내는 것이 아니라 무인도에서 혼자 산다면 규칙은 지킬 게 하나도 없어. 옷도 안 입고, 말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런데 우리는 사람들이랑 어우러져 살아야 하니까 규칙을 지키지. 규칙을 지키는 게 너무 힘들 땐 안 지켜도 돼. 대신 다시 지킬 수 있을 만큼 힘이 생겼을 때 집단으로 돌아오는 거야. 그전에는 집에서 편히 쉬어도 돼.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게 뭐야?"
"나."
"맞아. 너야. 네가 중요한데 네가 어떤 사람이어야 해?"
"착한 사람."
"틀렸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너를 평가하는 단어야. 다른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네 느낌이 더 소중해. 그래서 너는 행복한 사람이면 돼. 네 행복이 제일 우선이야. 그렇다고 이기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니야. 다른 사람들도 자기 행복이 중요하니까 피해를 줘서는 안 되는데, 규칙들이 너를 힘들게 할 때는 좀 놔도 좋아."
"응, 알겠어"
준형이 대답이 '착한 사람'이라서 다시 한번 놀랐다. 네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해.라고 많이 말해왔는데, '내'가 소중한 것은 알지만 착한 사람이 돼야 한다는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착한 행동을 했을 때 칭찬을 많이 받았을까. 엄마가 너무 무서운 사람이라서 그럴까. 씁쓸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친구들을 사귀고 담임 선생님을 알고, 매해 다른 담임 임 선생님을 만나면서 학급 친구들이 바뀌는 것을 보면서 어떤 인간상이 주변인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것을 체득으로 알게 됐을까. 하지만 나를 희생하면서 얻는 인기는 나를 죽인다. 내가 먼저 바로 서고 나서야 주변인들도 있는 것이다. 내 아들이 그것을 알 수 있도록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고민해 보는 날이다.
어쩌면 준형이는 그저 피곤했을지도 모른다. 토요일 밤이라고 어젯밤에는 10시 40분이 넘어서 잠들었으니 평소보다 2시간가량은 부족한 잠에 저녁에 배탈까지 난 것을 보니 몸이 너무 힘들어서 괜한 일에 짜증이 났나 싶지만, 이 기회에 규칙과 행복에 대해 얘기할 수 있었으니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