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네 집에 가면 병 옮아 와!
어른과 아이. 무례한 말과 호의.
23.12.13
가온이 친구가 집에왔다. 얼마전에 한번 왔던 친구인데, 맞벌이 집에 할머니가 주로 등하원을 해주는 친구다. 워낙에 순하고 예의가 발라서 만나면 기분 좋은 친구다. 어제 하원 후에 운동장에서 노는데 갑자기
"가온이 어머님! 저 가온이네 집에 놀러가 되나요?"
하고 물어왔다. 할머니가 단어선택에 일조를 한 모양인지 언제나 저렇게 가온이 어머님! 하고 부르는 녀석이다. 저 순수하고 예쁜 질문에 거절은 있을수가 없는 법! 그럼 당장 놀러와. 했더니 이번주는 내일만 가능하다고 해서 오늘 집에 오게 됐다.
사실 아침까지도 많이 고민이 됐다. 가온이가 간밤에 기침을 너무 심하게 해서 고통스러워 보였다. 열도 없고 밖으로 나오는 콧물도 없는데 저러니 단순 기침인가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나서는 가온이 상태가 꽤 좋아 보였다. 유치원을 쉴까 잠깐 생각도 했는데 오늘은 장난감데이를 하는 특별한 날이라서 쉬면 아주 격한 반응이 예상됐다.
오전 내도록 빨래도 정리하고 널고 아침 설거지를 하고 거실바닥도 좀 훔치고 하이랑 놀이터에서도 한시간 놀고 내 밥도 챙기고 배도 미리 깍아두고 핫도그도 꺼내두고 나름 분주한 손님맞이 준비를 했다.
하이는 점심을 먹으면서 눈을 감고 조는 듯 하면서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눈이 번쩍! 잠이 다 깼는지 유모차도 안타고 겨울덮개 사이로 얼굴을 삐죽이 내밀고 찬바람을 쐬며 바깥 구경을 하다가 유치원에 당도할 때까지 잠을 들지 못했다.
5분쯤 하원 시간에 늦었는데 가온이가 호통을 쳤다.
"엄마, 좀 제시간에 오라구요!"
밉지 않은 얼굴로 장난끼 가득하게 말했지만 오전 내내 네 손님맞이 준비를 한 내 수고가 무색해 서운함이 일었다. 하이는 운동장에 도착하자마자 내려달라고 하고 가온이 친구(노랑머리)는 어제와는 사뭇 다른 반응으로 할머니 손을 잡고 먼저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앗! 오늘은 뭔가 다른 기분이군. 직감하고
'차라리 잘됐다. 가온이 병원이나 가고 하이도 좀 재워야지' 생각에
"오늘 꼭 오지 않아도 돼. 내일이라도 마음이 바뀌면 와." 라고 했는데, 오늘 집에서 같이 놀 생각으로 들떠있던 가온이가 노랑머리를 잡아끌고 먼저 교문을 나서고있다.
태엽감은 장난감 마냥 마구 뛰어다니던 하이를 안아들고 가려는데 준형이가 유모차를 벌써 밀고 저만치 간다. 하이를 잡으려고 따라가는데 벌써 교문에 차가 오고 있고 하이가 그쪽으로 가고 있다. 교통지도 선생님이 안계셨다면 큰일 날 뻔했다. 하이를 잡아끌고- 걸어가고 싶어하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려니 아주 발악을 한다. 집에 가는 길 20분을 내도록 악을 쓰며 운다. 안쓰럽기도 하고 교문 앞에서 안아들때 떼를 쓰다가 바닥에 부딪힌 뒤통수가 신경이 쓰이기도 하다.
혹시나 뇌진탕으로 머리가 아파서 저렇게 우나. 아냐. 너무 졸린데다 걷고 싶은데 태워서 잠자는 듯한 상태로 각성하지 못하고 우는 것 같아. 아마 내려서 진정이 될때까지 안고 토닥이면 괜찮아질텐데. 나를 기다리는 일행이 너무 많다. 준형이, 가온이, 노랑머리와 할머님. 여섯 살 두녀석은 벌써 지들끼리 뭔 얘기를 속닥 거리며 저 둘이만 가려고 하고 있다.
하이가 울어도 곧 진정이 되겠지 하며 유모차 덮개까지 닫고 그냥 걸어간다. 할머님이 걱정하시고 미안해 하시는데 졸린데 못자서 그런것 같다고 간단히 말씀 드린다.
다행히 집까지 와서는 모두들 기분좋게 잘 놀고 간식도 먹고 가온이 장난감을 따라 사겠다고 사진도 한장 찍어가신다. 10분만 놀고 자기 집에 가겠다던 노랑머리는 3시간을 놀고 집에 안간다며 여기 살거라고 한다. 다행이다.
저번에 왔을땐 한시간 정도를 집에서 3분거리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갔던지라 이번에도 그런 시간을 기대했는데 집안에서 논 시간이 길어져 준형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다. 손님이 와서 수영을 갈때도 혼자 보냈는데 데리러는 가야 덜 서운해 할 것이다. 만나서 가온이 병원을 들러야지 마음속으로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놀이터에서 놀자는 노랑머리를 달래면서 할머님이 말씀하신다.
"가온이도 지금 병원 가야해. 다음에 또 놀자. 노랑머리도 내일은 다시 병원에 가야할까봐. 주말에 고생하지말고."
"우리가 가온이네 와서 병원에 가야하네."
"응? 우리가 와서 가온이가 병원에 가게 됐다고?"
"아니이. 우리가 가온이네 와서 내일 내가 병원에 가게 됐다고."
"에이 노랑머리야 그게 무슨 소리야? 너네들은 유치원 같이.다니면서 서로 옮고 옮기고 다들 그래."
"아니야. 까비가 그랬어. 가온이네 가면 병 옮아온다고. 까비는 다 알아. 내가 모르는 걸 다 아는 똑똑한 애야."
"무슨 소리야. 까비도 모르는게 많아. 걔 말이 다 옳지는 않아."
당황하신 노랑머리 할머니가 황급히 수습해보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길이 갈라져 인사를 하고 준형이를 데리러 가는데 까비가 했다는 말이 생각나서 너무나 화가났다. 어쩜 그렇게 말을 하니.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은거야.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러면서 가온이에게 엄마는 저 말이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차마 내일 까비에게 가서 '너는 우리집에 초대하는 일이 절대로 없을테니까 병 옮을 걱정일랑 절대로 하지말아라.' 하고 말하라고 할뻔 했지만 다행히도 이성이 나를 잡아줬다. 유치하지만 ㅎㅎ 정말 그런 심정이었다.
저녁을 먹고 곰곰 생각해보니 그렇다. 노랑머리는 아이니까 우리집에서 놀고 싶다고 해도 아이들이 기침을 안할때 초대를 했어야하는데 내가 경솔했구나. 애들끼리도 저런말을 할 수가 있는데.. 싶었다.
까비의 엄마와 멀어진 일이 내심 마음에 걸렸는데 까비의 발언을 들으니 까비네와는 상종을 안하고 사는게 맞구나 싶기도 한다.
노랑머리가 훨씬 오래 전부터 마른 기침을 했어서 내 아이의 기침이 상대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서는 잘 생각을 못했던 것 같다. 아이들 말이 싸움이 되고 그게 어른 싸움으로 번진다더니 이렇게 흘러가나 싶기도 했다. 내가 반성하고 이런 일을 안 만들면 이런 말 들을 일이 없겠지.
가온이는 병원에 갔고 비염이 심해 기침이 오래 간거니 물을 자주 마시고 숲에서 많이 놀라는 지령(?)을 받았다. 기생충과 알레르기의 관계에 대해서 의사선생님의 장황한 설명을 들은 것은 덤이다.
그래. 나는 이제 여섯 살 난 아이가 아니다. 그러니 노랑머리가 먼저 우리집에 오고 싶어 했다는 핑계로는 안될 것 같다. 까비가 그런 말을 해서 내가 기분이 나빴다는 것도 내가 만든 여지다. 결국 내 아이에게 자기는 병균체라는 느낌을 주게 된 것도 내 불찰이다. 나는 어른이니까 여섯살 아이와는 다른 행보를 보였어야한다.
'노랑머리라면 언제든지 놀러와도 좋아. 지금은 가온이가 기침을 좀 하는데 옮으면 나도 미안하고 너도 아파서 불편하니까 우리 감기 다 나으면 그때 볼까?'
라고 하는게 적당했을까.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아이들에게 물어보곤 한다. 상대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했어? 어떤 상황이야? 네 마음은 어때? 뭐가 불편한거야? 그러다보면 대부분 결론이 상대의 무례함보다는 자기 욕심이 화를 부르는 경우가 많다. 나는 어른이니까 더 그럴 일을 안만들어야겠지.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까비는 무례했다. 일단 우리 아이들이 어디가서 그런 발언을 하지 않도록 단속을 좀 해야겠다.
체력도 정신도 힘든 하루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