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인당 2개씩이던 티브이 시청이 3개씩으로 늘어나기 때문이다. 아직 글을 모르지만 리모컨 조작을 할 줄 알고 누구보다 티브이 보기를 좋아하는 가온이가 하이에게 티브이를 자주 틀어준다. 우리 집은 3개월간 공유넷플을 이용하고 있는데 가끔 티브이가 켜지는 속도보다 Mi스틱이 와이파이를 잡는 속도가 느릴 땐 잠시 기다려 줘야 한다.
나와 준형이가 안방에서 오늘 있었던 명동 데이트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었다. 가온이는 '만화의 집'에 가기를 거부했고 하이도 외출을 거부해서 둘이만 다녀오게 됐다. 오랜만의 외출로 몸도 피곤하고 추위에 웅크리고 있어선지 따뜻한 방에 누워있기가 좋았는데 하이가 티브이를 켜달라고 했다.
마침 뽀로로 시즌 8이 3월 1일부터 시청 가능 해서 가온이도 지루해하지 않고 새로운 에피소드를 틀어줬다. 그런데 리모컨이 작동을 안 했나 보다.
"형아~~ 이리 와 봐. 리모컨이 안돼. 형아~~"
하고 거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 준형이는 나랑 하던 얘기가 있어서 바로 가지 못했다. 나도 바로 일어서지 않는 모습을 보고 준형이가 도와주러 거실로 나갔다. 혼자 남은 나는 안방에서 오늘 다녔던 곳의 사진을 보고 있는데 준형이가
"되는구만 뭐!!"
하는 소리가 들린다. 가온이도 질세라
"형아가 늦게 오니까 그렇잖아. 아까는 진짜 안 됐단 말이야."
준형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내 옆으로 와서 한마디 한다.
"도와준 게 어딘데!!"
준형이는 엄마랑 같이 있는 시간이 달콤해서 가온이 도와주러 가기 싫었는데 엄마가 피곤한 것 같아서 자기가 대신 가서 해줬는데 고마워하지 않고 되려 자기에게 소리치는 동생에게 서운한 마음이 일었던 모양이다.
"음.. 준형아, 우리 체스 둘 때 '아마 내가 여기 두면 상대는 이걸 잡아먹으려 들 거야. 그럼 난 이렇게 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뒀는데 거기 안 두고 전혀 다른 곳에 둔적 많지 않아? 그럴 때 상대방이 네가 생각한 대로 수를 두게 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야. 그렇지 않았어? 상대도 자기가 이기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생각하니까 너는 네 수가 보이고 상대는 상대의 수가 잘 보이는 법이잖아.
'상대가 다른 곳에 뒀으면 좋겠다' 싶을 때는 내 수를 거두고 다른데 두는 거야. 그래야 상대가 다른 곳에 두는 게 빨라. 마찬가지야. 상대에게 다른 반응을 원한다면 네가 다른 수를 두는 거야. 아까 엄마가 듣기론 네가 리모컨을 조작해 주고 '되는구만!'이라고 말했잖아. 그 말엔 '이렇게 간단히 되는데 이걸 못해서 날 불렀어? 어쩌면 이 정도도 못할 수가 있어?'라는 뜻이 포함된 말 같아. 이 말엔 약간의 무시와 비난이 담겨 있는 것 같아. 아이들 일수록 정확한 단어로 표현은 못하지만 그런 걸 잘 느낄 수가 있대. 그래서 가온이도 고맙다는 말 대신 '형아가 늦게 와서 이게 저절로 된 것뿐이다. 아까는 안 됐다.'라고 자기가 비난받을만한 일이 아니다. 아까는 그런 상황이었다 하고 자기 상황을 너에게 어필하고 싶었던 거야.
다음에는 '가온아 이럴 때는 조금만 기다리면 돼. 형아가 늦게 왔더니 바로 되는 것처럼 다음엔 좀 기다려봐. 인터넷 연결이 안 돼서 그랬나 봐.' 이 정도로 얘기해 주면 어때? 그럼 가온이도 '응 , 그런 거구나. 알겠어 형아 고마워.'이렇게 달라지지 않을까? 어때?
"응, 맞아. 내 생각에도 그래."
대답은 알겠다고 하지만 준형이 입은 삐죽인다. 맞지만 아직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자기 안에서 언젠가 소화되고 자기 것이 되는 날이 오면 입에서 나오겠지? 이런 말을 준형이에게 해줄 수 있는 이유는 나를 잘 믿고 따라와 주기 때문이다. 아직 8세인 아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한 라디오에서 연구결과를 들려주기를,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은 엄마의 목소리에 더 반응을 하는 반면, 사춘기 때부터 이성의 목소리에 더 잘 반응을 한다고 한다. 그러니 엄마 말이 먹히는 시간이 준형이에게는 몇 년 남지 않은 셈이다. 그때까지 대화를 많이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