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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불편한 사람

아이들 싸움이 어른들 관계로.

by 세상의 주인공님

24년 3월


요즘 내 마음을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 처음부터 이 사람이 불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서로 집에도 왕래할 만큼 알고 지내던 사이다. 생각해 보면 그렇다. 옆을 스쳐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은 나를 이렇게 오래도록 집요하게 불편하게 만들 수는 없다.


때는 2년 전 준형이가 학교를 입학한 그 해였다. '우리'네도 준형이와 가온이랑 동갑인 자매가 있었다. 준형이가 다니던 병설 유치원으로 어린이집을 다니던 우리가 전원을 왔다. 반이 하나뿐인 유치원이라서 둘은 같은 반이 되었고, 당시 준형이는 단짝인 남자아이와 주로 놀아서 새로 온 여자아이를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3살 어린 가온이를 데리고 등원을 하고 나면 18개월인 가온이는 학교 놀이터나 근처 2분 거리 놀이터에 가서 한참을 놀다가 간식도 먹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우리네 집에도 26개월 동생인 은별이가 있었다. 가온이와 태어난 해는 같지만 음력 생일이 한해 빨라서 개월수가 훌쩍 차이가 났다.


둘은 자신들보다 엄마들이 항상 두 개씩 챙겨 오는 간식에 서로를 알게 되고 언니, 형아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같이 노는 듯 따로 그렇게 친하게 지내게 됐다.


6살에 전원을 왔던 우리는 반에서 준형이가 마음에 들었나 보다. 편지를 써서 주기도 하고 우리가 집에 간다고 유모차를 밀고 준형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걷고 있노라면 달려서 쫓아오기도 하다가 우리 집 근처까지 오게 돼서 너무 더웠던 여름날, 그럼 우리 집에서 놀다 갈래? 해서 네 녀석이 거실에 둘러앉아 반달모양 수박을 우적우적 헤헤 거리며 먹기도 했다.


우리 엄마는 유치원 반에 자기주장이 강한 한 아이를 우리가 자꾸만 따라다니게 되는 상황이 싫었는지 그 아이에 대해서 물었고, 5세 반 때부터 봐왔던 나는 그 아이에 대한 일화를 얘기해 주기도 했다.


우리도 우리네 집에 초대를 받아서 옥상에서 물놀이도 하고 우리가 해주는 귓속말을 듣고는 너무 예뻐서 나에게도 이런 어린 시절이 있었나 싶었다. 그 귓속말은


"준형이가 좋아요. 제 꿈에도 나와요. 매일매일 꿈에 나와서 나랑 놀아요. 히히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얼굴에 비치면서 밝고 순수하고 예쁜 감정으로 웃고 있는 그 아이가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래서 나도 그 마음을 응원해 주고 싶어서 집에서 종종 얘기를 꺼내곤 했다. 편지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 예의를 지키는 것인지도 알려줬다.


그랬던 유치원생들이 학교에 입학을 했고, 방과 후 수업도 듣고 친구들이랑 모여서 놀기도 하는 그런 날이 생겼다. 문제가 됐던 그날은 날씨가 좋은 가을날이었다.


준형이는 방과 후 수업이 없는 날이라서 가온이가 유치원을 마쳤을 때, 집으로 같이 돌아와 학교숙제를 했고, 마칠 즈음, 친하게 지내던 서진이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방과 후 수업 '바둑'이 끝났으니 운동장으로 와서 같이 놀면 어떠냐는 전화였다. 어서 가야 한다는 생각에 자전거를 타고 부리나케 다녀오겠다고 했다. 신나게 놀아도 5시까지는 와야 한다~ 당부를 하고 내보냈는데 30분도 안돼 금방 돌아왔다.


왜 이렇게 빨리 왔어?

학교에 경찰차가 왔어. 누가 싸웠나 봐. 놀 수가 없어서 왔어.

에잉? 너는 서진이랑 놀면 되지. 경찰차가 무슨 상관이야.

서진이가 누구랑 싸웠나 봐. 그래서 그냥 왔어.


준형이 얼굴이 좋지 않았다. 좀 놀란 것 같기도 해서 그렇구나 하는데, 서진이는 중국에서 5살까지 살다가 선천적으로 혈소판 문제가 있어서 자주 아픈 탓에 한국으로 오게 된 중국인 엄마를 가진 아이다. 아빠는 한국분이고 당진에는 할머니도 미용실을 운영하고 계신다. 서진이 엄마는 한국말이 서툴러서 전화로 물어볼 수가 없어서 그러나 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곧, 전화벨이 울린다.


병설유치원을 같이 다니던 우진이 엄마다.


준형이가 혼자 있었던 것 같은데, 잘 들어갔나 해서 전화해 봤어요.

네, 준형이 서진이랑 논다고 신나서 나갔는데 금방 들어오더라고요.

그러니까요. 서진이가 은별이랑 싸워서 서진이 엄마까지 휘말리고 어른싸움 돼서 경찰 오고 난리가 났는데 우진이는 무서워해서 가자고 바로 데려 나왔는데 준형이가 혼자 있던 게 생각나서 전화해 본 거예요.

네? 은별이랑요? 우리가 아니고요? 그 둘이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데 왜 싸우지? 준형이가 서진이가 싸워서 경찰이 왔다던데 진짜였구나.


말을 들어보니 바둑 방과 후를 끝내고 나온 우리를 기다리던 은별이와 바둑 방과 후를 끝내고 나온 서진이가 모래놀이터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다가 서로 시비가 붙었나 보다. 은별이는 서진이가 대뜸 자기에게 사과하라고 했다고 하고, 서진이는 은별이가 자기에게 '나쁜 새끼'라는 욕을 했다고 하는데 아직 5살 8살인 아이들 말을 모두 다 믿을 수는 없다. 기억은 어른도 왜곡되고 편집되니까.


서진이는 그 말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고, 은별이는 나는 그런 적 없으니 할 수 없다고 했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은별이 할아버지는 내 손녀에게 뭐라 하지 말고 떨어지라고 했고, 이에 질세라 서진이 엄마도 할아버지에게 대들었다. 내 아이에게 왜 뭐라 하는 거냐고. 말이 서툰 서진이 엄마는 서진이 아빠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리고 통역을 부탁하려 했으나, 당장 본인이 달려올 수 없는 서진이 아빠는 경찰을 부르라고 했다.


결국 아이들만 울고불고 무서운 상황에 놓였고, 어른들은 감정이 상하는 불쾌한 경험을 하게 됐다. 우진이 엄마와의 통화를 옆에서 들은 아이들이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굳은 얼굴로 티브이를 보는데 또다시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유치원 친구 하린이 엄마다. 역시나 준형이, 가온이와 동갑내기 자매를 키우는 하린이 엄마가 준형이가 걱정돼서 전화를 해준 것이다. 하린이 엄마 말로는 서진이 엄마가 격분을 해서 소리를 지르고 경찰까지 부르니 우리나라 정서에는 할아버지에게 반말을 하며 맞대는 상황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서진이 엄마가 말이 안 통해 가여웠다는 우진이 엄마와는 또 다른 시선인데, 서로 자기가 아는 것만 보이는 것이 사람인지라.


두 엄마와 통화가 30분이 넘어가며 길어지자 아이들의 흥미는 더욱 커졌고, 아무래도 단속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아이를 불러 앉혀두고 짤막하게 당부를 했다.


"준형아, 가온아. 오늘 학교에서 안 좋은 일이 생겼나 봐. 준형이랑 가장 친한 서진이랑, 가온이랑 가장 친한 은별이가 서로 오해를 하고 다툼이 생겼는데, 옆에 있던 어른들이 서로 자기 아이를 감싸다가 너무 흥분해서 경찰까지 왔나 봐. 너희 둘은 각자 가장 친한 친구와 관련된 일이니까 학교나 유치원에서 가서 물어보지도 말고 아는 체 하지도 않기로 하자. 그 친구가 아직도 속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물어보면 눈물이 또 나올 수도 있으니까. 이럴 때는 모른 체 해주는 거야. 그 친구가 먼저 말을 꺼내면 속상하겠다. 내가 옆에 있어. 이 정도로만 얘기를 하는 게 어때?"


아이들은 알아듣는 듯했고, 일이 이렇게 마무리 됐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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