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3월 18일
준형이가 3학년이 됐다. 1, 2학년 때와는 다른 점은 각 반에 임원을 선출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때는 반장, 남녀 부반장, 회장이 따로 있었지만 지금 학교에는 남녀 회장, 남녀 부회장으로 구성된 임원을 선출한다. 학기 초부터 학급 임원 선거가 18일에 있을 것이란 내용이 적힌 학력(학사달력)을 배부했고, 알림장을 통해서도 봤기 때문에 감투 쓰는 것에 관심이 있는 학생은 준비를 할 수가 있다.
준형이 반에서는 별이라는 여자 아이가 자신의 출마를 선언하고 자신에게 투표해 주기를 부탁하고 다녔다. 외에 남자아이들 중에는 호야와 지우가 출마의사를 밝히고 지지를 호소하는 듯했다. 곧 총선을 앞두고 있는 이 시기에 준형이에게 선거에 대한 좋은 경험이 될 거라는 기대가 생겼다.
말이 요란해서 그렇지 아이들은 나 나갈 건데 나 뽑아주라. 나 회장 되고 싶어. 이렇게 말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너도 나갈 거야? 또 누구 나간대? 너는? 나는 관심 없어. 등등의 작은 얘깃거리에 불과하는 듯했다.
준형이는 2학년 때까지 통학로가 비슷하고 학교와 거리가 먼 학생들을 모아 교문까지 안전하게 등교를 도와주는 등교 선생님과 함께 학교를 갔다. 우리 집에서 큰 신호등을 하나 건너면 등교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안심하고 혼자 집에서 보낼 수 있었다. 이제 3학년이 되고 보니 그때 같이 다녔던 친구들 중에서 몇몇은 시간을 정해 만나서 같이 다니기도 하고 친해진 동네 친구들이 모여 등교를 같이하게 됐다.
준형이는 2학년 때 친해진 창준이가 있는데, 이 친구는 독서를 많이 하고 준형이처럼 운동도 잘하고 말을 아주 조리 있게 하는 멋진 친구다. 관심사가 비슷해서 서로 퀴즈내기도 잘하고 언제나 뭘 하고 창준이랑 놀았어? 하고 물으면 얘기하면서 놀았다고 답해 남자아이들답지 않네,라는 생각이 들었던 친구다.
3학년 반배정이 났던 겨울 방학에 유일하게 전화가 와서 서로 몇 반이 됐느냐고 물었던 마음씨 고운 고마운 녀석이다. 서로 다른 반이 된 아쉬움을 등굣길을 함께하며 풀기로 했나 보다. 8시 30분까지 경문학원 앞에서 만나는 거야! 어찌나 믿음직하고 귀여운지, 아침 등교 준비가 데이트하러 나가는 모양새다. 늦을까 봐 시계를 자주 들여다 보고 27분이 넘을 것 같으면 창준이한테 전화해서 먼저 가라고 해야겠다! - 그럴 시간에 어서 달려가. 전화기를 안 들고 나왔으면 어떻게 해.
창준이는 용돈을 받는지, 아침 등굣길에 있는 편의점에서 껌을 자주 산다고 한다. 껌 한 통은 요즘 500원이고, 안에 5개가 들어있는데, 준형이에게 자주 줘서 벌써 3개나 있다고 한다. 이에 확장기를 끼우고 있는 준형이는 누군가 식사 시간이 아닌 시간에 주는 간식을 자주 거절하거나 사양하는데, 창준이가 준 껌은 모아뒀던 모양이다. 창준이네 집은 지우네랑 바로 옆집이라서 등교할 때 자주 지우랑 함께 갔고, 지우 역시 준형이랑 2살 때부터 알고 지낸 친한 친구다.
준형이가 창준이에게 두 번째로 껌을 받은 날, '나 껌 있는데 이거 살사람!' 했더니 여러 아이들이 손을 들었다. 그래서 '천 원인데?!'라고 했더니 모두 손을 내리는데 호야가 호기롭게 나섰다. ' 야, 껌은 하나에 만원은 해야지. 천 원이면 너무 싼 거 아니야? 내가 살게.' 했단다. 어? 팔릴 줄은 모르고 자기가 받은 껌이 있음을 자랑하고 싶었던 준형이는 오잉?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호야에게 주고 돈이 없으니 내일 받기로 했다. 이 이야기를 하교하는 길에 싱글벙글 신이 나서 나에게 해주는 거다. 엄마!! 나 오늘 천 원 벌었어! -그래? 뭘 해서 벌었는데? - 껌을 팔았어.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작은 재미있는 일화라고 생각을 했다. 그냥 넘어갈까 생각을 했지만 일단 내 생각을 말해주고 준형이는 다른 느낌을 받았다면 넘어가 보자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준형아, 엄마가 전에 듣기로는 호야가 회장이 되고 싶다고 출마를 선언하지 않았나?
응 맞아.
그리고 그 껌은 한통에 5백 원이라고 했는데, 겨우 한 개에 천 원에 판 거야? 직접 살 수 도 있는데 왜 너한테 산 거지?
그러게. 왜 그랬을까?
음. 아마도 호야는 이 내용을 모르고 그렇게 행동을 했을 거야. 그런데, 호야가 회장에 나가겠다고 했고, 너도 그때 누군가에게 투표를 해야 하잖아. 누가 회장이 되면 좋겠다고. 너네 반은 22명 밖에 없어서 준형이 한 표가 아주 크게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게 될 거야. 그런데 누가 봐도 껌은 하나에 100원밖에 안 하는데 그걸 천 원이나 주고 사줬다? 그럼 호야가 주는 천 원은 껌값이 아니라 나를 뽑아주는 대신 이 천 원을 줄게 하는 대가성 돈이 될 수가 있어. 그런 걸 뇌물이라고 하는 거야. 준형이도 호야도 그런 걸 몰랐으니까 이렇게 했을 거야. 하지만 돈은 받지 않는 게 좋겠어.
응!!!
준형이는 표정이 깜짝 놀란 것 같다. 내가 뇌물을 받다니!! 그럴 수는 없지. 하는 표정. 역시나 준형이는 다음날 호야는 천 원을 준비해서 준형이에게 주려고 했단다. 거절하자, 몰래 주머니에 넣어두기도 하고, 책 사이에 끼워두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호야 입장에서는 물건을 이미 받아서 사용(?)해 버렸으니 대가를 주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이지만 준형이는 단호한 녀석이라 절대로 받지 않았다고 한다. 천 원을 보자마자 매번 호야가 떠올랐다고.
이 얘기까지 준형이에게 듣고 나자 나는 투표의 4원칙을 얘기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렵겠지? 좀 더 미룰까? 고민을 하고 일단 입을 닫았다. 며칠 뒤, 준형이 반에서 회장 선거가 치러졌고, 운동장에서 보자마자 나에게 결과를 알려준다.
엄마! 호야가 회장이 됐어. 지우도 나왔는데 나는 호야 뽑았어.
아이코 이런. 옆에 다른 반 친구인 서진이도 있는데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하는 녀석. 안 되겠다. 오늘은 말해줘야지. 하굣길에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준형아, 투표에는 4대 원칙이 있어. 보통, 평등, 직접 그리고 비밀 투표의 원칙이야. 뭔지 알아?
아니. 보통원칙이 뭐야?
엄마가 하나씩 말해줄게. 잘 들어봐. 보통은 3학년 3반이라면 누구나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거야. 예전에는 여자는 투표 못해!. 이럴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나라 선거를 할 때는 20살이 넘은 어른은 누구나 투표를 하 할 수 있다는 거야.
왜 여자만 못해?
지금은 안 그래. 예전에는 여자들은 사회일을 잘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나 봐. 준형이 생각에도 그럼 안 되겠지?
음.
그리고 평등은 누구나 한 표만 투표를 할 수 있다는 거야. 너는 키가 크니까 한 장 적어내면 2명 뽑은 걸로 2표짜리로 쳐줄게. 이런 거 없어. 너는 우리 반에 화분 사 왔으니까 투표지 2장 줄게. 이러면 안 돼. 예전에는 돈 많은 사람이 동네에 기부하면 투표권 2개 주고 이럴 때도 있었대.
헐~
직접이랑 비밀은 좀 알겠지? 나 몸이 아프니까 대신 누구 좀 찍어줘. 하고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없다는 거야. 왜냐면 투표장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 찍을지 누가 알겠어? 사실 부탁받은 사람이 후보에게서 뭔가 혜택을 받을 수도 있고 그래서 반드시 자기가 직접 투표를 해야만 해. 비밀도 마찬가지야. 내가 누구를 찍을 거다. 혹은 누구를 뽑았다.라고 말하고 다니면 다른 후보가 이 말 한 사람을 나쁘게 볼 수도 있고, 불이익을 주려고 혹은 괴롭히려고 할 수도 있잖아. 너무나 자기가 뽑히고 싶으면 그런 사람도 있대.
오호!
그래서 준형이가 방금 서진이가 있는데도 말을 해서 말이야. 혹시나 지우가 들으면 서운할 얘기잖아.
그런데 나는 공약을 듣고 뽑았어.
그래? 어떤 공약이 나왔는데?
응. 지우는 공약을 3가지 말했는데 내가 듣기엔 지키기가 어려운 것 같았어.
뭔데?
첫 번째가 애들끼리 싸우면 자기가 다 말리겠대. 그런데 요즘 애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알아? 누가 툭 치고 지나갔어. 그럼 사과를 해야 하는데 맞은 애가 뭐라 하면 친 애가 쳐다보면서 어쩌라고~ 이래. 그럼 뭔 말을 더해?
아.. 저번에 준형이가 가온이에게 그렇게 말한 것도 그때 얘네들 보고 따라 해본 거구나?
응... (헤헤헤)
이젠 준형이도 그렇게 말하면 잘못됐다고 생각하는구나? ㅎㅎ 맞아. 그렇게 말하는 건 나는 너랑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어. 내가 무조건 옳으니까 싫으면 너도 쳐. 이런 식이잖아. 싸우고 싶다는 거지 뭐. 또 공약이 뭔데?
또 하나는 우리 반을 깨끗하게 하겠대. 그런데 애들이 교실에 버린 쓰레기를 자기가 다 줍고 다니겠대.
좋은 공약인데 왜?
아니~ 맨날 과학실도 가고 영어실도 가고 체육실도 가는데 어떻게 다 주워? 쉬는 시간에는 지우랑 놀아야 한단 말이야~~~.
아.. 그랬구나. 지우랑 놀고 싶었구나. 그럼 호야 공약은 뭔데?
우리들 고민을 들어주겠대.
그래? 어떻게? 오늘도 했어?
응. 내가 방과 후에 체스반이 있으면 좋겠어. 3학년도 2학년 때처럼 피구반 있으면 좋겠어. 난 이게 고민이야 했더니 호야가 그렇구나. 어쩔 수 없지. 그랬어.
뭐야, 그게 끝이야?
ㅋㅋㅋㅋ 웃긴다. 그래. 웃기다. 애들이 그렇지. 그래서 애들이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고민을 들어주는 것은 그냥 귀로 들어만 줘도 들어준 것이고, 해결되도록 소원을 들어주듯이 성취를 해줘도 들어주는 것이니 그럴듯하구나. 싶었다. 이어서 다른 선거도 들어보니 어른들의 축소판이었다. 여자 회장 후보로 나온 아이가 2번째 공약으로 간식을 사겠다고 하자, 준형이는 불편해서 그 아이를 뽑지 않았는데, 결국 당선이 됐다. 이를 지켜본 부회장 후보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공약으로 간식과 월 2회 파티를 약속했다고 한다. 왜 담임 선생님은 이런 공약에 제지를 가하지 않은 걸까? 어떤 사회 수업보다도 더 생생한 수업이 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안타깝다. 거기다 이 아이들의 첫 선거인데 남은 기억이 간식을 대가로 내 표를 행사했다. 어쩌면 3학년 다운 행보일 수 있으나 그것을 바로 잡아 어떤 선택을 해야 하고 어떤 공약을 펼쳐야 하는지를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닐지.
다음 주는 공개수업이 있고, 수업이 마친 뒤 담임선생님과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총회 시간이 있다. 그때 가서 이 선거에 대한 얘기를 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이미 지나간 선거를 꺼내서 부스럼을 만드는 일일까, 담임 선생님이 다음에 담임이 된 다른 반에서는 아이들에게 선거에 대해서 더 잘 설명을 해주시게 될까. 아니면 훗날 우리 반에서 사회시간에 선거에 대한 얘기를 꺼내며 아이들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일이 생길까?
내가 괜히 말을 꺼내면 진상 학부모가 되는 것인지. 트러블 메이커가 되는 것인지. 나는 내 애만 잘 가르치면 되는 것인지. 고민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