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술을 쓰는데도, 왜 이 Bar는 기억되지 않을까

가격에 익숙해진다는 것, 그리고 재료를 아낀다는 착각

by Roy

10년쯤 전의 일입니다.


서른한 살에 처음 개업했던 업장을 시원하게 말아먹고, 모든 것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청담동에 있는 한 업장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시기에 청담동에서 근무하며 가장 강하게 남은 기억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커버 차지와 전반적인 술 가격이 굉장히 높았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시를 떠올려보면, 다른 지역에서는 진토닉 한 잔이 보통 15,000원을 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청담동에서는 기본이 19,000원이었고, 시그니처 칵테일은 25,000원을 훌쩍 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손님이 진토닉 한 잔을 주문하시면 음료 가격 19,000원에 커버 차지 5,000원이 더해져 총 24,000원을 결제받아야 했습니다.

처음 두어 달 동안은 이 결제를 받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정말 이 가격을 받아도 되는 걸까?’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과연 내가 이 가격에 합당한 서비스를 제공했는가,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음료의 퀄리티는 충분했을까?’
‘너무 말을 걸지 않아 무심하게 느껴지진 않았을까?’
‘화장실은 깨끗했을까?’


결제를 받는 매 순간마다 이런 질문들을 제 자신에게 던졌던 기억이 납니다.

이태원에서 가게를 운영하던 시절에는 커버 차지도 없었고, 훨씬 저렴한 가격에 좋은 술을 사용했음에도 가격에 대한 컴플레인이나 후기가 종종 있었던 터라 청담동에서는 부담이 더 크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에서 일하면서 가격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는 손님은 거의 없었습니다.


아주 가끔 커버 차지가 무엇인지 묻는 분들이 계셨지만, 그 의미와 이유를 설명드리면 대부분 자연스럽게 납득하셨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처음 저를 괴롭히던 걱정들은 어느 순간 사라졌습니다.


손님들은 이미 ‘청담’이라는 상권이 가진 특수성과 그로 인해 형성된 가격대를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도 청담동은 기본 단가 자체가 높은 지역입니다. 그래서 저는 점점 ‘이 동네에서는 이 정도 가격이 당연하다’는 판단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 보니, 어느새 무의식적으로 “여기는 원래 이렇게 받아도 되는 곳”이라는 전제를 깔고 일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결제를 받으며 불편함을 느꼈던 바텐더의 모습은 사라졌고,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비싼 술값에 의문을 제기하는 손님을 속으로 무시하는 순간까지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 가격이 싫으면 다른 곳에 가면 되지 않나.’
‘여기가 어떤 동네인지 모르고 온 걸까.’


지금 돌아보면, 그 생각들은 분명 오만이었습니다. 가격에 익숙해졌다는 이유로 그 가격을 성립시키는 조건들을 스스로 점검하는 일을 멈춰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저는 가격이 높다는 사실에 기대어 제가 제공해야 할 서비스의 밀도와 태도까지 정당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제 와서야 그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식당의 가격이 합당한지 판단할 때 가장 먼저 ‘맛’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이 ‘맛’이라는 단어 안에는 생각보다 훨씬 많은 요소들이 들어 있습니다.

음식의 모양새, 접시에 담긴 균형, 처음 올라오는 향, 재료의 신선도, 간의 정확도, 온도. 여기에 더해 공간의 분위기, 음식을 서빙하는 사람의 태도까지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함께 평가합니다.


즉, 우리가 말하는 ‘맛’이란 혀로 느끼는 감각만이 아니라 경험 전체를 압축한 결과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겠습니다.


식당이 아닌 Bar를 평가할 때, 가장 먼저 와야 할 기준은 무엇일까요.

음료의 퀄리티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칵테일의 디테일한 맛을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 기준에서는 그보다 앞서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Hospitality입니다.

업장에 들어섰을 때의 첫 인사, 시선을 맞추는 방식, 자연스러운 미소, 고객과의 거리감, 불편함을 먼저 알아채는 배려.


저는 이 모든 것들이 음료의 퀄리티보다 먼저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야 칵테일의 완성도와 디테일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서비스는 별로지만 맛 때문에 계속 가는 식당” 이야기는 종종 들어봤습니다" 하지만 “바텐더 서비스는 불친절한데, 칵테일이 좋아서 계속 가는 바”라는 말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는 훨씬 흔합니다. 칵테일의 맛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편안하고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바는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맛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태도와 배려가 좋은 바텐더가 있는 Bar가 훨씬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매력은 가격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납득되는 힘이 됩니다.

그럼에도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이런 생각을 가진 바텐더들을 종종 마주합니다.

“비싸고 좋은 술로 맛있는 칵테일만 만들면 손님은 온다.” 서비스는 부차적인 요소이고, 칵테일 메이킹 실력만이 바텐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는 경우입니다.

그런 바텐더들은 얼마나 비싼 술을 쓰는지, 얼마나 시각적으로 자극적인 칵테일을 만드는지에는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하지만 정작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공간 안의 분위기, 사람에게 전달되는 에너지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기술은 중요합니다. 완성도 역시 기본입니다.

하지만 그 기본 위에 무엇을 쌓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뛰어난 기술 하나만 가진 바텐더보다, 서비스를 먼저 생각하고 밝고 안정적인 에너지를 가진 바텐더가 훨씬 더 좋은 바텐더라고 믿습니다.


이 지점에서 다시 청담동에서의 제 경험이 떠오릅니다.

‘이 동네에서는 이 정도 받아도 된다.’ ‘좋은 술을 쓰니까 비싸게 받아도 된다.’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기준이 되었던 것처럼, ‘나는 비싸고 좋은 술로 정말 칵테일을 잘 만드니까 '서비스가 조금 부족해도 괜찮다.’ 이런 생각 역시 아주 쉽게 정당화됩니다.


경기가 좋을 때는 실력 하나만으로도 많은 것이 가려집니다.

하지만 경기가 나빠질수록 손님은 훨씬 더 명확한 기준으로 바를 선택합니다.

그 기준은 ‘얼마나 비싼 술을 쓰는가’가 아니라 ‘이 공간에서 내가 존중받고 있는가’입니다.

술에는 아낌없이 쓰면서, 사람에게 쓰는 에너지는 줄이게 되는 착각. 설명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눈을 마주칠 수 있지만 피하고, 조금 더 신경 쓸 수 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설득하는 순간들.

저는 이것이 Hospitality에서 가장 흔한 형태의 ‘재료를 아끼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하나, 중요한 반전이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 저 자신에게 다시 던지며 써 내려간 질문들입니다.


최근 며칠 동안 저희 업장에 달린 리뷰들을 하나하나 읽어보았습니다.

'친절하다,' '칵테일이 맛있다', '공간이 멋지다'는 이야기들도 분명 많았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문장들도 눈에 띄었습니다.

“별로 기억에 남을 만한 곳은 아니다.”
“가격에 비해 특별할 것까지는 없다.”

이 문장들이 유독 오래 머릿속에 남았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음료의 퀄리티에도 신경을 썼고, 서비스 역시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조금 더 냉정하게 돌아보니 그 생각이 과연 사실이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메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기 귀찮았던 순간들, 조금 더 친절하게 말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던 장면들이 최근 들어 꽤 많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요즘 저는 “재료를 아끼지 말아라”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이 말의 대상은 비싼 술도, 좋은 재료도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 말은 바 뒤에 서 있는 저 자신을 향한 말이었습니다.

할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던 설명, 조금 더 다정할 수 있었지만 넘겼던 말투, 기억에 남을 수 있었던 순간을 스스로 흘려보냈던 태도들.


그 모든 것들이 재료를 아끼는 방식으로 남아 있었던 것은 아닐지, 이제는 피하지 않고 바라보려 합니다.

손님은 우리가 얼마나 바빴는지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어떤 술을 썼는지도 생각보다 오래 기억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 공간에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이 바텐더가 나를 어떻게 대했는지는 꽤 오랫동안 남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술보다 먼저 저 자신을 쓰려고 합니다.


태도와 에너지, 설명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 쪽을 선택하려 합니다.

이 글은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오늘의 제 태도를 기록하기 위한 글입니다.

그리고 이 다짐이 다음 손님에게는 조금 더 기억에 남는 바텐더로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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