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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60년 인생, 폭싹 속았수다 2

제12화

by 주나라

아빠에게 나는 은명이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이 있으면 꼭 은메달 같은...

드라마 속 은명이는 그 누구보다 누나 금명이를 질투한다. 뭐든 완벽한 누나 금명이에게 모든 게 밀렸고, 부모에게 금명이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나 또한 어릴 적에 그랬다.

아빠는 언니를 조금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늘 언니와 내가 싸우면 나에게 먼저 언니에게 사과하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늘 어딘가 모르게 차별받는다고 느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비로소 부모가 덜 사랑하는 자식이란 없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빠는 내가 공부를 못 할때도 잘할 때도 언제 한번 성적 보자는 얘길 안 하셨고, 딸이 딴따라가 되는 걸 원치 않으셨으면서도 내가 대학을 연기과에 진학하는 걸 막지 않으셨다. 우리 아빠는 큰걸 바란 적 없었다. 언제나 내 등을 두드려 주셨다. '그저, 건강히 만. 우리 딸 건강하게만'


그리고 건강 다음으로 늘 자주 하던 말이 있었다.


대학 졸업은 꼭 해야 돼. 졸업장은 받아야 돼.


아빠의 재촉에 대학 재학 시절, 괜히 부아가 났다. 나는 대학을 힘들게 다녔다. 부산에서 서울로 홀로 상경해서 맨땅에 헤딩을 한 셈이다. 아는 사람도 없고, 서울에서 만날 사람도 하나 없이 같은 대한민국 땅인데도 이토록 외롭고 고독스러울 수가 있다니 매일이 경이로울 수준이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내가 서울 땅에서 버텨내는 게 쉽지 않았다. 연기를 포기하고 다 때려치우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 아빠는 다 괜찮다더니... 학교만큼은 힘들면 그만두라는 얘길 절대 않으셨다.


그래서 괜히 아빠가 "학교 잘 다니고 있지? 졸업할 거지?" 물으면 몰라!!!라는 대답을 했다.


나는 아주 어릴 적 아빠에게 꿈이 뭐였냐고 물어본 적 있다. 아빠는 화가라고 대답했다. 아빠는 투박한 손으로 손바닥 보다 작은 종이에 염소를 파란색 매직으로 그렸다. 그 종이를 4 등분해서 꼬깃꼬깃 접어 여전히 내 지갑 속엔 한 마리의 염소가 부적처럼 살고 있다.


결혼을 하고, 아빠는 우리가 어릴 적 퇴근만 하면 운동을 하러 가셨다. 검도, 유도, 합기도, 복싱... 많고 많은 운동을 무수히 진득하게도 했다. 아빠도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딸들을 먹여 살리려고 한평생 삶의 터전을 나가 그곳을 지켰지만, 아빠도 아빠이기 전에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빠도 그 당시 부잣집에서 태어났다면, 누구보다 많은 걸 배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던 그 환경 때문에 자신의 꿈도 잃은 채 한평생을 허덕이며 살아오셨다. 그래서 결혼하고 좀 살만하다 싶어진 순간이 오니 미친 듯이 운동을 배우셨고, 내게도 대학 졸업을 간곡히 부탁하신 거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아빠는 내게 대학원을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사실 대학원을 포기했다. 딱히 지금 당장 석사, 박사 학위가 필요 없을 것 같았던 게 첫번째 이유였지만...그다음 이유로는 나는 아빠가 빨리 퇴직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비싼 등록금을 내고 더 이상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지 않으면 아빠는 하루빨리 퇴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아빠는 배우고 싶은 게 있으면 맘껏 배우라는 한마디를 하셨다. 그리고, 늘 내게 하는 한마디의 말.


"돈 걱정 하지 마. 돈 걱정을 왜 네가 해. 아빠가 다 벌어." 마치 아빠가 그놈의 돈 때문에 다 배우지 못한 세상에 나가, 내가 대신 다 배우기를 바라는 마음 같았다.







아빠는 쉰이 넘어가면서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무쇠가 녹슬듯 아빠도 녹슬어 회사가기 싫다는 말도 입밖에 내기시작하셨다. 그리고 체력도 금방 동이났다.


하지만, 그렇게 체력의 한계를 느끼면서도 갑자기 배드민턴 동호회에 들어가더니, 금반지에 금목걸이, 금팔찌 금으로 온몸을 도배하기 시작했고, 각종 안경과 모자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거기에 빨간 바지, 파란 바지, 새하얀 백바지... 줘도 입지 않을 오색 찬란한 옷들을 사기 시작했다.


사실 아빠는 사치라는게 1도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위해 무언갈 사는 데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빠가 변했다. 엄마 속을 썩이기 시작했다. 매번 엄마 눈을 피해 새로운 것들을 많이 사서 집안에 숨겨두기 시작했다.나도 처음엔 변한 아빠가 이해되지 않아, 늘 엄마 편을 들었다.


근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아빠도 50년 만에 취향이라는 게 생긴 모양이다. 나름 본인의 취향으로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갔다. 늘 자식을 위하기만 하면 자식들은 고마우면서도 짜증이 난다. 금명이가 부모님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은 "짜증 나!!"였다. 그 짜증엔 자식 생각만 하는 부모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이 모두 담겨있다. 우리 아빠는 내가 짜증 난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물론 엄마의 허파를 뒤집기는 했지만, 그래도 알아서 휘황찬란한 오십춘기를 잘 보내고 이제 환갑에 이르렀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건 그저 감성이라고 말하며 맘껏 해대면서, 부모가 원하는 그들의 감성은 늘 질색팔색한다. 하지만, 자식들을 위해 푼돈 한번 바깥에 나가 맘껏 써본 적 없는 부모도 취향이 있었다. 난 이제 그들의 취향을 존중하고 싶다.


아빠는 양관식 같지만, 어쩌면 양관식보다 더 똑똑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예 평생을 자식만을 위해 살다 가면 나는 엄청난 죄책감에 사로잡혔을게 뻔하다. 그걸 아빠도 알았을까? 아빠는 쉰이 넘어가면서도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기 시작했고, 매번 어디가 아플 때마다 누구보다 먼저 병원에 달려갔고, 온갖 영양제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아빠가 참 유난이라고 엄마랑 같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감사할 따름이다.









아빠의 60년 인생이 결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갔으면 좋겠다.


아빠, 폭싹 속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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