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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의 60년 인생, 폭싹 속았수다 1

제 11화

by 주나라

전 세계의 많은 시청자들을 웃고 울린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가 지난 금요일 막을 내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다가, 속에서 뭉텅이들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우리 아빠는 양관식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빠를 창피해했다.

정확히 말하면 아빠의 직업을 창피해했다.

같은 반 친구들에 나와 같은 아파트를 사는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사'자 직업이 갖고 있었다.

의사, 교사, 변호사...


하지만, 우리 아빠는 버스기사이다.

그 많고 많은 '사'자 중에 아빠는 버스기'사'였다.

나는 그런 아빠를 창피해했다. 어느 순간부터 학교 버스정류장에 오는 아빠의 버스를 피하고 싶었다.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어쩌다 아빠의 버스를 타면 아빠를 모른 척했다.


능력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면,

아빠는 분명 공부를 했을 테다. 지금과는 다른 일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 확실한 건, 그 대단한 '사'자 직업의 부모를 가진 친구들과 나는 같은 레벨의 아파트를 살았다는 거다.

나는 그것들은 당연하게 여겼으면서, 철없이 아빠의 노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버스 운전석에 아빠는 앉아있었다. 강한 햇빛이 내리쬐는 운전석에 앉아있는 일이 허다해서 이제 아빠의 손에는 거뭇거뭇 검버섯이 잔뜩 올라왔다.


우리 아빠는 작은 단칸방에서 많은 자식이 있는 부모 아래 태어나 악착같이 열심히 살았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빚에 쫓겨 도망 다니던 큰아빠와 매번 사고를 치고 아빠에게 돈 얘기를 꺼내던 삼촌. 한마디로 빌빌대는 골칫덩어리 형제들 사이에서 아빠는 차곡차곡 돈을 모아 엄마와 결혼을 해서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고, 처자식을 데리고 그 높은 아파트로 올라왔다. 아빠는 남들보다 잠을 적게 잤고, 남들보다 더 일했고, 더 많은 걸 아껴왔다.


아빠의 무자비한 성실함으로 나는 그 모든 것들을 당연하게 누리며 잘 살아왔다.

나는 아빠의 그 성실함과 올곧은 책임감, 35년 무사고라는 그 타이틀에 존경을 표하고 싶다.

이제는 아빠의 직업이 남들에게 당당하게 꺼내어 보일 수 있는 '자랑'이 되었다.









아빠는 내 남자친구를 만나면 그에게 마음에 안 드는 것 투성이었을 걸 안다. 남자친구와 다투고는 어디에 털어놓을 곳이 없어 늘 엄마를 괴롭혔다. 친구에게 말하자니 내 얼굴에 침 뱉기 같아 말을 아꼈고, 엄마에게 낙서장에 감정을 휘갈겨 쓰듯 쏟아낸 적이 있었다. 내 속은 아프고, 내 뜻대로 되지 않아 엄마에게 털어놓을 때마다 내가 엉엉 울고 화를 낼 때마다 그 전화 너머 엄마 옆엔 언제나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누구보다 다 잘안다. 하지만, 내 남자친구를 만날 때면 말을 아꼈다.


그러고선, 내가 "얘 불편하게 왜 무슨 말을 안 해! 아빠 말 많으면서!" 하며 면박을 주면 언제나 그 한마디를 하셨다. "너한테 잘하라고. 너한테 잘하라고 그냥 눈치도 안 주고, 말도 안 하고 싫은 소리도 일절 안 했어. 그냥 너한테 좀 잘하라고"


그렇다. 아빠는 늘 날 생각해서 말도 행동도 그저 아꼈다. 조심스럽게 아끼기만 했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금명이가 나오면 물 없이 쑥떡을 콱 한입 가득 베어문 것 마냥 답답하고 화가 났다.

어쩌면, 나는 우리 집 금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후회할 것을 뻔히 알면서 바보같이 부모를 대하던 금명이가 마치 거울 속의 나 같아서.













자식은 언제나 나 좋은 대로만 생각한다. 나 아쉬운 것만 생각한다. 겨울에 스키장을 못 갔던 것, 여름방학에 여름휴가를 못 갔던 것. 놀러 가지 못했던 것만 나는 생각했다. 아빠는 거의 쉬는 날 없이 일을 했고, 아빠가 쉬는 날에도 우리 가족들과 함께 놀러 간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아빠는 어릴 적 부모가 한 번을 아이였던 아빠의 손을 잡고 놀러 갔던 기억이 없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어릴 적 아버지가 집에서 더운 여름에 냉면 한 그릇을 혼자 먹었던 날을 여전히 기억에 난다고 말했다. 자식들 한입 주지 않고 냉면 면을 싹 다 건져먹고 고춧가루가 둥둥 떠다니는 그 냉면 국물이 남은 그릇에 밥을 말아먹었다고 했다. 아빠는 여전히 아빠가 자식이었던 그때 그 허기진 마음을 잊지 못하고 있다. 냉면 한 그릇, 붕어빵 몇 개, 호떡 하나, 단팥빵 한 개 그게 아빠가 원하는 전부였다.


아빠는 늘 음식을 먹을 때 자식새끼 입에 들어가는 게 우선이었다. 늘 외식을 할 때면 숟가락을 가장 먼저 놓았고, 관식이가 금명이에게 콩밥에 콩과 짬뽕에 오징어만 쏙 건져 금명이 밥그릇에 놔주듯 아빠는 식당에서 새우가 나오면 늘 새우를 까서 내 밥그릇에 놓아주었다. 지금도 여전하다. 어려운 형편도 아니지만, 아빠는 늘 어릴 적의 아기새 대하듯 나를 그리 대한다. 아빠가 자신의 아빠에게 받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두 딸들에게 했다.


본인은 그 누구보다 마음과 배가 허기지게 자랐지만, 두 딸들은 그 어떤 것도 허기지게 키우지 않았다. 덕분에 다 큰 나는 여전히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내 입에 들어갈 수 있는 내가 되었다. 자기 밥그릇은 누구보다 나 스스로 먼저 당당하게 챙길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셨다.


누군가가 나를 짓밟으려 할 때면, 어디 가서도 제 할 말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감히 나는 너에게 그럴 취급을 받을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듯 말이다.


금명이가 자신을 한없이 무시하는 영범이 어머니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해 첫사랑 영범이와의 결혼을 파투낼 수 있었던 것도, 영범이 어머니에게 자신의 부모가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다 귀중한 사람으로 가득히 채워져 자랐기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할 수 있는 말과 행동들이었다. 금명이는 금전적으로는 부족했을지언정 부모로 부터 받은 사랑에 대한 결핍은 하나도 없는 사람인게 분명하다.


아직도, 나는 너무도 영범이를 사랑하는 금명이가 영범이와의 마지막에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나는 네가 너무 좋은데, 나도 너무 좋아. 내가 너무 안쓰러워서 더는 못하겠어."









내가 20대가 되고, '돈'에 대한 이야기를 지긋지긋할 만큼 가장 많이 듣는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세월이 갈수록 아무리 돈이 좋다고 떠들어 대지만, 나는 여전히 사랑의 가치가 더 귀중하다고 믿는다. 여전히 낭만적이고 사랑이 넘치는 나로 살 수 있게 해 준 아빠에게 이 글을 바치고 싶다.


부모는 넘치도록 사랑을 주어놓고도, 더 주지 못했던 것만 생각하고.

자식은 넘치도록 사랑을 받아놓고도, 더 받지 못했던 것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는 이 어리석은 생각을 끊어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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