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켜야 하는 것
막상 궁지에 몰리게 되니 엄마한테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왜냐면 결혼을 반대하는 엄마에게 내 인생은 내 것이라며 상관하지 말라고 큰소리쳤었고 적어도 엄마처럼은 안 살거라 자신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밖에 못 살고 있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나고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아이를 굶길 수는 없다! 나는 궁리 끝에 남의 집 청소를 해주는 대신 아이를 데려간다는 조건으로 일을 하였다. 사실 아이를 다른 곳에 맡기고 정식으로 취직을 할까 했었지만 지금의 형편에는 아이를 맡길 돈은 고사하고 기본적인 버스비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남의 부부가 자던 침실을 정리하며 그들이 벗어 논 속옷과 뒤처리 수건을 집어 들 때마다 가슴 밑바닥부터 일어나는 참담한 심정은 미꾸라지 한 마리가 분탕질해 놓은 진흙탕처럼 내 앞날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날따라 아이가 아픈지 자꾸 칭얼대었고 엄마 가슴팍에만 안겨 있으려고 하였다. 겨우 우는 아이를 달래 재워서 거실 한편에 뉘어 놓았다. 잠시 후 그 집 아이들이 거실에서 뛰고 놀기에 조용히 하라고 당부를 했지만 아이들은 뛰어노는데 빠져서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고 잠든 아이 위를 뛰어넘으며 숨바꼭질을 한다며 야단이었다.
그러다가 기어이 그 집 아이가 우리 아기의 그 여린 팔을 밟고 말았다.
자지러질 듯 우는 아이를 안고 나는 혹여 아이의 팔이 부러졌을까 봐 두려움에 떨며 정신없이 병원으로 내달렸다. 아직은 덜 여문 아기 팔이라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벌갛게 부어오른 팔을 보며 얼마나 울었던지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부모 잘못 만나 어린아이를 다치게 했다는 죄책감과 그래도 당장은 그 집을 그만둘 수 없는 형편이 나의 가슴에 대못이 되어 박혀버렸다. 그 길고도 긴 암담했던 시간을 사 년이나 지낸 뒤에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남편 때문이었다.
월급쟁이로 잘 있던 남편은 갑자기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
동생의 실패를 보았으면서도 골프 회원권을 매매하는 일을 하다 보니 돈이 보인다며 뛰어든 사업이었다.
하지만 자본금이 변변치 않은 그로서는 어쩌다가 싼 매물이 나와도 그걸 잡고 있을 여력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자꾸 적자가 났다. 하지만 남편은 일확천금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친정엄마한테까지 손을 벌려 일을 크게 벌리고 말았다. 그럭저럭 굴러가던 어느 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남편이 데리고 있던 직원이 가지고 있던 회원권과 손님의 회원권을 들고 튀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우리는 빚더미에 나 앉게 되었다.
겨우겨우 산 집이 경매로 넘어가고 빚쟁이들의 독촉에 시달린 남편은 또다시 자취를 감추고 나는 또 그전처럼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지옥 같은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젊음이 있었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참고 이겨내면 언제가 좋은 날이 올 거라는 믿음과 내가 조금만 고생하면 내 아이들은 잘 키울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독서지도사와 논술을 가르치려고 일을 시작하였고 그룹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하루에 열 권이 넘는 교제용 책을 들고 봉천동 산꼭대기를 걸어 올라갔고 비탈길을 내달리며 김밥 한 줄로 허기를 달래며 일을 하였다. 밤에는 남의 자서전을 써주며 돈을 벌어 겨우겨우 이자와 원금을 갚으며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끝난다고 스스로 위안하던 차였는데...
36평의 집을 빚 때문에 경매로 넘기고 나서 내가 몰래 모은 돈과 은행 대출로 겨우 얻은 우리 집이 또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어떻게 이렇게 해?!"
몇 번의 위기는 그런대로 잘 넘겼던 나는 또다시 닥친 이 끔찍한 상황이 왜 이리 두렵게만 느껴지는지 아득함이 밀려들었다.
십 년을 넘게 남의 빚만 갚아주느라 제대로 외식 한번 못했고 외출복 하나 마련한 적이 없었다.
아이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참고 참으며 견뎠던 그 수많은 고생이 무참히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리는 순간을 또 견딜 자신이 없는 내게 남편은 더욱 암담한 말을 하였다.
'친정엄마 이름 앞으로 얻은 은행빚은 장모님 연세가 많으니까 파산 신청하여 무마시키면 되고 또 네가 돈을 잘 버니까 조금만 더 고생하면 내가 어떡하든 재기할게'라고 했다.
이렇게 큰 일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지는 책임은 하나도 없고 꼼수로 빚을 탕감할 생각을 하며 가정의 모든 책임은 나에게 전과하는 남편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거기다가 더 경악하고 참담한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엄마에게 빚까지 얻어 놓고 엄마의 전셋집까지 아버지 몰래 월세로 돌려놓고 그 돈도 날려먹은 후란다.
어떻게 사람이 저럴까?!
그에게 나는, 아이들은 우리의 스위트 홈은 안중에도 없는 것일까?
많은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는데...
그저 작은 집에 우리 네 식구 서로 의지하며 배려하고 주어진 삶에 만족하며 살기 바랐지만 그것은 한낱 꿈에 불과했었을까?!
그는 늘 홀어머니를 생각했고 동생들을 생각했지만 큰 아이가 젖 먹던 어린 시절 이틀이나 분유도 못 먹고 그 여린 팔을 밟혀 고생했던 것을 마음 아파하지 않았고 겨우 젖먹이 아기를 엄마가 돌봐 주지도 못하고 돈을 번다고 밤낮으로 돌아치니 아침마다 엄마랑 떨어지기 싫어 악을 쓰며 울다 지쳐 흐느끼며 잠이 드는 둘째 아이의 아픔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에게 그런 것이 있었다면 적어도 아이들이 살 집은 몰래 담보 잡히지 않았을 것이다.
울 엄마는 이제 어쩌나... 아들 대신 사위를 기둥 삼아 믿고 의지하던 엄마였는데... 딸인 나보다도 더...
이번에는 안 그러겠지... 하던 기대와 희망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과 절망으로 가득해졌고 그동안 참고 참았던 배신의 아픔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이제 우리 두 아이들의 미래는 어떡하나..
낼모레 사십이 넘는데 빚은 십억이 넘는다고 하고 아이들은 자꾸 커가고 들어갈 돈은 많고.. 또 전처럼 김밥 한 줄로 연명하며 낮이고 밤이고 일할 자신이 없었다.
조금만 참으면 잘 될 거야 하던 생각도 이제는 들지가 않는다.
무책임한 그를 보는 나는 참담함과 암담함으로 몇 날 며칠을 앓아누웠다.
그런 내게 남편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집값이 올라 경매로 넘어 길 집을 팔면 몇 푼은 건질 수 있을 거라며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그 말이 왜 그리 세상 멍청한 말처럼 들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뭐든 처음이 문제지 그다음은 수월하다고 누가 말했던가?
남편이 처음 빚을 얻어 동생을 도와주었을 때 내가 조금 더 강경하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안하다고 너는 잘 모르다고 내 동생들이 엄마가 일 나가고 나면 좁은 방에 갇혀서 울다 지쳐 잠이 들었고
엄마가 차려놓은 밥과 동생들이 눈 똥이 함께 나뒹구는 곳에서 울던 동생들의 모습을 자신은 잊을 수가 없다고..
형이니까 도와줘야 하지 않냐고 술 먹고 들어와 울며 이야기하는 남편을 위로하며 도와주는 것은 좋은데 우리가 먼저 살아야 동생들도 도울 수 있다며 넘어가 준 것이 지금의 이 꼬락서니를 만든 거라는 자괴감에 나는 괴로워했다.
제 동생들이 겪은 가난의 시대는 가슴 아파도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겪을 가난은 아프지 않은 것일까?!
몇 날 며칠을 앓으며 누워있던 나는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편을 용서하고 다시 시작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들만이라도 지키자! 이렇게 살다가는 평생 빚만 갚다가 일생을 망치고 아이들도 망치 까 봐 두려웠기에
아빠랑 둘이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줄은 알지만 그 아빠가 노릇을 못하면 엄마라도 아이들을 지켜야 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우리 이혼하자!"
그는 이혼을 반대했지만 날마다 이자 때문에 빚 때문에 독촉받고 그것이 싸움이 되고, 물레방아 돌 듯 반복되는 무수한 나날이 지나고 남편과 나도 마음과 정신이 황폐한 후에 우리는 결국 이혼을 했다.
집을 팔면 얼마가 남을 거라더니 은행빚을 다 청산하지도 못하고 우리 손에 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동안 했던 일들을 정리하여 겨우 마련한 작은 돈으로 우리 아이들과 함께 지낼 집을 찾아다녔다.
그렇게 얻은 작은 지하 전셋집,
험한 세상에서 내 살아있는 작은 가슴으로 미루나무처럼 커갈 아이들을 지키고자 새로운 스위트 홈을 마련하였다.
비록 부유하지는 못해도 삼시세끼 굶기지 않고 좁지만 부족하지만 가슴으로 아이들을 넉넉하게 품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아이들도 나를 이해해 주겠지.
그렇게 나는 새로운 스위트 홈을 만들어 나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