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해방촌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은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것이 될 수도 있다. 해방촌이라는 장소가, 또 그 안에 새롭게 생기는 것들이 나에겐 그랬다. 나에겐 이제 너무 흔한 장소가 되어 버렸는데, 어떤 누구에겐 일 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특별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군가에겐 흔한 장소가 나에겐 특별한 장소일 것이다.
흔한 일상의 장소였던 해방촌이 특별한 장소로 다시 다가온 건 지방에 내려가서 평일을 보내면서부터이다. 그때부터 다시 이 곳은 나에게 여행지가 된 느낌이었다. 매주 오긴 하지만, 매일 여기서 시간을 보내는 것과는 달랐다.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을 대하는 마음의 차이라고나 할까. 마음이 달라지면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진다. 항상 그곳에 있겠지 하는 무한한 믿음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면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된다. 하지만 할 수 있는 시간이나 장소가 한정되어 있다면 바로 행동을 취하게 된다. 내가 해방촌에서 매일을 살 때보다 주말에만 왔을 때 오히려 해방촌 구석 곳곳을 돌아보았다.
무한성을 띄는 해방촌 펍의 소소한 이벤트들과 함께 유한성을 띄고 있는 해방촌만의 축제가 있다. 바로 5월과 9월 일 년에 두 번 열리는 해방촌 뮤직 페스티벌(HBC Music Festival)이다. 이름만 들으면 대단한 행사 같지만 그렇지는 않다. 누구나 소소하게 즐기고 참여할 수 있는 축제이다. 해방촌과 경리단 곳곳의 펍에서 누구나 음악을 연주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 각각의 바의 성격에 따라 음악의 장르는 달라진다. 락부터 재즈, 어쿠스틱 등등 다양한 음악을 즐길 수 있다.
이 뮤직 페스티벌은 해방촌에서 활동하고 있는 외국인 뮤지션에 의해 2006년에 시작되었다. 소소하게 시작을 했는데, 점점 참여 펍이 늘어나면서 커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는 코로나로 인해 다 중단되었다.) 페스티벌 전에 참가 신청서를 받는다. 연주를 하고 싶은 팀은 신청서를 제출하고 음악 성격에 따라 펍과 연주하는 시간이 배정이 된다. 날이 좋은 5월과 9월 2박 3일 (금, 토, 일) 이렇게 진행이 되는데 이 기간에는 해방촌 거리가 스탠딩 바로 변신한다. 초창기에 이 페스티벌이 시작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서서 얘기를 나누며 축제를 즐기는 바람에 경찰들이 대거 투입되기도 했다. 안전을 염려해서인데 지금은 어느 정도 질서와 자리를 잡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음악을 하고, 밴드를 결성하고, 연주를 하고 이런 모든 것들이 전공생들이 하는 것이다라는 나의 생각을 깨뜨리게 한 건 바로 이 축제를 통해서였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취미를 언제나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문화를 형성하는 외국인들을 보면서 나도 좀 그런 것에 자유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난 예전부터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기타를 배우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게 제대로 갖춰 있어야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전 남자 친구이었던 크리스는 대학 교수였는데, 나를 만나고 있는 도중에 베이스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더니 밴드에 들어갔다. 그리고 주말마다 그 밴드와 함께 공연을 다니고 있었다. 베이스 기타는 쉽다고 하면서 나에게 몇 번 가르쳐 주긴 했는데, 통 나는 어렵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먼 훗날에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소소한 바람을 가져본다.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다. 그런데 이게 과연 소소한 바람인 걸까?
무언가를 배우기 전에 장비부터 최고급으로 세팅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장한 마음을 담아 오래오래 하겠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중요한 건 꾸준히 조금씩 해 나가는 것이다. 비록 도구는 완벽하지 않아도 말이다. 생각해보니 무언가를 배울 때 비장한 마음으로 도구부터 구입했던 나는 그 부담감에 짓눌려 도중에 그만두는 일들이 많았다.
오래전부터 해방촌 뮤직 페스티벌에 기타를 치면서 노래하는 것을 꿈꿨다. 그리고 집에 기타를 들였다. 그런데 처음 한 번 꺼내보고,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다. 기타뿐 아니라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그렇게 사놓은 장비들은 각각 집 한 구석을 차지하며 나를 잘 지켜주고 있다. 내가 그들을 잊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 나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모든 걸 세팅해 놓고 시작하지 않는다. 먼저 조금씩 하는 습관을 들인다. 그 습관이 익을 때쯤 그다음 장비 욕심을 내려고 한다.
그래도, 이번 해에는 나를 지켜주고 있던 그것들에게 하나씩 말을 걸어볼까 한다. 해방촌 뮤직 페스티벌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하는 나를 상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