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집 남자

어쩌다, 해방촌

by 조헌주

‘결국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다지 반갑지 않은 일이 일어났을 때, 과거로 시간을 무한정 돌리다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마음의 평정을 찾기 위해 마지막으로 쓰는 무기와도 같은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바꿀 수 없는 과거,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집착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그 상황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다. 결국엔 분명 이 일이 일어났을 거라 되뇌면서. 그리고 그때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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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대로 바라왔고,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지만 일이 일어났을 때 예상한 대로의 감정이 들까? 그것도 아니다. 아주 속 시원할 것만 같았던 일도 막상 닥치면 시원하다는 기분만은 들지 않는다. 아쉬움, 허전함, 쓸쓸함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동반하기도 한다.


지방에서 영어·뮤지컬 학원을 시작하고, 운영한 지 벌써 2년 3개월이 지나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만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고 느꼈고, 마침 학원을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모든 것을 정리하는 날이 되었다. 그동안 아주 잘했다고 나를 쓰다듬어 주며 기쁜 마음으로 학원을 넘길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한 아이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가르치기 위해 학원을 했지만, 때론 아이들을 통해서 배우는 것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학원을 넘겨주고 가는 날, 군생활을 마치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민간인이 된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지방 생활을 정리한 건 아니다. 이곳에 있으면서 학교와 복지관의 강의를 나가고 있었다. 학원은 끝났어도, 약속된 강의는 계약된 기간까지 해야 했다. 대신 이제 반대로 서울에서 4일을 거주하고, 지방에서 3일을 거주하는 일정으로 바뀌었다.


다시 해방촌에서의 삶을 적응해야 한다. 생각해보니 해방촌은 내가 영국에 가기 전과 후에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외국인들이 많았다면, 지금은 한국인들을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맛집들이 많이 생겨났다. 동네 사람들이 자유로운 복장을 하고 다니던 옛날과는 달리 한껏 멋을 내고 와서 맛집을 찾아온 사람들, 그리고 데이트하러 나온 커플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래도 난 여전히 동네 마실 가는 복장으로 다니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달라진 건 바로 ‘앞집 남자’다. 거실 창문을 열면 앞집 사는 사람을 디렉트로 볼 수 있다. 문을 닫아놓고 살면 누가 사는지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 남자는 항상 문을 열어놓고 있었고, 앞에 나와 운동을 하고 있었다. 창문만 바라보면 보이는 그 남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나도 모르게 관찰하게 되었다.


그는 아침마다 커피를 들고 마당에 나와 담배를 피운다. 커피와 담배를 좋아하는 남자. 꾸준하게 운동을 하고, 마당에 조명도 설치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미려고 하는 모습에서 세심한 남자라는 인상을 갖게 했다. 그리고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자신만의 취미가 확고한 사람이다. 혼자만의 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는 듯한 사람.


서로의 존재는 분명히 알지만 대화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혼자 살고 남자의 존재로 인해 나도 모르게 안위와 안도감을 느꼈을 수 있다. 나 혼자만 이렇게 살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 하지만 때로는 누군가의 은밀한 생활 습관까지 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두근거림과 동시에 얇고도 달콤한 죄책감이 들긴 했다. 그래도 그를 보는 건 멈추지 않았다. 문만 열면 보이는 환경이니 말이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혼자 동떨어져 사는 삶에서 지루해하거나 외로워하지 않는 이유가 이런 이유인지도 몰랐다. 보고 싶지 않아도 끊임없이 펼쳐지는 볼거리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느끼는 동질감, 그렇다고 절대 간섭하지 않는 개인주의.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결코 넘어갈 수 없는 거리이기에 느끼는 안전함.


그런데, 어느 순간 앞집 대문이 열리지 않는다. 아마도 이사를 간 모양이다. 아니면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갔을까? 창문을 열어도 보이지 않는 그로 인해 왠지 모를 허전함을 느낀다.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 어떤 교집합도 없었던 사람인데 내가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


언제부터인지 창문 밖에 보이는 그가 나에게 익숙했던 거다. 이젠 낯선 풍경을 받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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