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해방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생각했을 때 단 한 컷의 장면이 생각난다면 어떤 장면일까? 난 내 방에서 바라본 바깥 풍경이다. 군인 아파트 1층에서 살았던 나는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라곤 들과 산이 전부였다. 지금은 이 풍경이면 행복함을 느끼지만 그때는 너무나도 지루하고 고루했다. 스펙터클한 네온사인이 즐비한 풍경은 시골 소녀에겐 어느덧 로망이란 이름으로 자리 잡았고, 창밖을 보면서 생각했던 곳은 ‘미국’이라는 나라였다. (사실, 미국도 시골이 많은데 그때는 잘 몰랐다.) 그리고 막연하게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언어가 그렇게 멋져 보일 수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영어라는 과목을 배웠기 때문에 아무리 시골이라고 한들 영어 학원이란 곳도 있었는데 어린아이가 접근하기에는 넘사벽이었다. 지금처럼 엄마들이 조기교육이란 이름으로 억지로 학원에 데려다주면 모를까, 영어 학원을 다니겠다고 조르기엔 난 너무나도 숫기가 없던 아이였다.
결핍은 때로는 성장이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만약 어렸을 때부터 학원에 다녔다면 난 질려서 어느 순간 영어를 쳐다보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하고 싶었는데 못했던 그 시절이 자꾸만 떠오르며 나도 모르게 온전히 자의에 의해 20대 초반부터 영어 학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일반 대학교를 다녔다면 졸업이나 취업을 위해서 영어를 필수로 공부해야 했겠지만, 난 예술 대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영어를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열망으로 인해 나는 영어를 손에 놓지 않았다. 그것도 아주 찔끔찔끔. 그때부터 난 한 가지를 깊게 파기보단 관심 있는 것들을 얇고 넓게 섭렵해 나갔다.
사실 어린 시절의 로망보다 영어에 대해 더 자극을 받았던 건 23살에 처음으로 갔던 유럽 배낭여행에서였고, 그 이후에 앞에서 언급했던 친구와 함께 갔던 인도 여행에서였다. 난 그때까지만 해도 영어를 잘하지 못했다. 아주 또박또박 교과서에 나온 그대로 말하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인도 여행을 같이했던 친구는 어학연수를 다녀온 적도 없다고 했는데 영어를 아주 출중하게 했고 발음도 꽤 멋있었다. 지금 그 친구는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유럽과 인도 여행을 다녀왔던 20대 중반의 그때만 해도 해방촌에는 슈퍼, 치킨집, 오래도록 자리했던 펍(PUB) 하나 있던 정도였다. 해방촌보다는 가까운 숙대 입구, 종로 등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여행은 다시금 외국어에 대한 나의 열망을 불태우기 충분했고 나는 그 당시 유행하고 있던 숙대에 있는 어학원에 등록해 다시 학생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해방촌에는 시간을 보낼 만한 공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해방촌에도 작은 카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외국인들이 많은 동네였기 때문에 카페에 가면 간간이 동네 마실 나온 외국인들을 볼 수 있었다. 반려견을 데리고 나와 산책을 시키기도 하고, 혼자 카페에 와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고 있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그려왔던 이미지였다는 것을 느끼며 자유로운 느낌을 가졌다. 흔히 이런 풍경은 일상에서가 아닌 여행지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라 생각했는데 한국에서도 느낄 수 있다니 신기했다. 그렇게 난 카페에 가는 횟수를 늘려갔다.
카페에 앉아 있다 보면 동네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지나가다가 본 사람들도 있고,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고 그렇게 오랫동안 한 장소에 있다 보면 서로 한 마디를 나누지 않았을지라도 낯익은 얼굴들이 생긴다. 그리고 때로는 그 사람들의 삶의 변화를 보기도 한다. 혼자 걸어 다녔던 사람이 어느 순간 아이와 함께 간다든지 하는 등의 변화 등을 남몰래 지켜보곤 했다. 어떤 누구도 날 지켜본 사람도 있겠지만. 뭐 아니면 말고.
계속해서 카페에 드나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장님과도 친해지고, 사연을 알게 된다. 또한 동네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듣게 되고, 다른 사람 이야기는 덤이다. 깨끗했던 카페 게시판이 어느 날부터 온갖 소식지로 가득 찬다. 당시만 해도 스마트폰이 대중화되어 있지 않을 때라 카페의 게시판은 동네 벼룩시장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이사 가는 사람이 가구를 처분할 때 무엇을 판다고 올리기도 하고, 요가 클래스 강습을 홍보하기도 한다. 그리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사는 동네답게 언어 강습을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중에서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Language Exchange! 언어를 맞교환하는 것이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외국인에게 난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난 그 사람에게 영어를 배우면 되는 것이다. 맞교환이기 때문에 돈을 낼 필요도 없다.
당시 유행했던 문어발 연락처를 뜯어 난 문자로 연락을 했다. 이것도 참 용기가 필요한 일이란 걸 알았다. 언어 교환을 한다고 써 붙였던 친구는 영국에서 온 테디였고, 우리는 연락을 하고 바로 그 주에 약속을 잡고 만났다. 민머리를 가진 테디는 영국 특유의 발음으로 말을 했고, 당시 영국 발음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조금 무서움을 느꼈다. 또한 일대일로 외국인과 말하는 게 생소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이런 나도 참 귀엽게 느껴진다.) 당시 중학교에서 원어민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테디는 만나면 만날수록 순수한 사람이었고 무엇보다 이 친구가 하는 한국어에서 처음에 가지고 있던 경계를 풀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테디 베어 같이 느껴지는 친구다.
언어 교환이란 이름으로 정기적으로 만났던 우리는 어느 순간 언어 교환이 아닌 그냥 친구로 만나고 있었다. 책을 덮게 된 건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가까이에 살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볼 수 있다는 건 동네 친구만이 가진 최고의 장점이고 매력이다. 아무래도 테디는 여기가 타지이다 보니 문제들이 있을 때 도움을 요청했고, 난 기꺼이 응했다. 그리고 내가 영국에 장기 체류를 한다고 했을 때 해방촌에서 고기를 사주고, 꽃을 사주며 잘 다녀오라고 했다. 내가 기억하는 테디는 술은 마시지 않았고, 스파클링 워터만 마시는 사람이었고, 항상 다이어트 중이었다.
그리고 내가 영국에 있을 때 테디는 아버지의 칠순 잔치를 위해 영국에 왔고, 난 칠순 잔치에 초대를 받았다. 런던에서 테디의 집이 있는 노팅엄까지는 3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난 날짜를 맞춰서 난 노팅엄이란 곳에 갔고, 동네의 마을 회관 격의 장소에서 사람들이 모여 있는 파티에 참석을 했다. 테디의 아버지는 아일랜드 출신이었기 때문에 아일랜드 방식의 칠순 잔치가 이루어졌는데 우선 술은 기네스가 주를 이루었고, 사람들이 동그랗게 모여 아일랜드 민속 음악에 맞춰 돌아가면서 춤을 추었다. 그들에게 있어 한국에서 온 나의 존재가 신기한 듯 보였다. 한국에 있으면 튀지 않는 사람인데 잠시나마 독보적인 존재가 되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고, 모두가 친절해서 참 기분이 좋았던 파티였다.
테디와는 그 이후 해방촌에서 다시 재회를 했다. 해방촌에 있는 외국인들이 많이 빠지던 어느 해 그즈음에 테디는 오래 살던 해방촌을 떠났다. 그리곤 종로로 이사로 가서 지금까지 줄곧 종로에서 살고 있다. 그 사이 테디의 직업 또한 바뀌었다. 사는 곳이든, 직업이든, 결혼이든 변화가 있는 친구들을 볼 때 종종 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지만 인생이란 뭐 애초부터 그렇게 변화무쌍하거나 그런 건 아닐 거다. 그냥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것. 그냥 그걸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