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바운드

어쩌다, 해방촌

by 조헌주

사랑이 다급해서 그렇게 찾을 때는 적어도 없다가 꼭 올 때는 어느 놈을 고를까 걱정을 할 정도로 남자는 한꺼번에 다가온다는 사실을 다 경험해 봤을 것이다. 당시에는 좋은 놈을 볼 기준이 없어서 나의 감정을 짜릿하게 해주는 남자를 선택했다가 며칠도 못 사귀고, 지나간 버스를 그리워하는 경험은 또 여자라면 다 해봤을 것이다. 불량식품 선호하다가 몸에 좋은 건강식을 놓치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1인이 여기 있다는 사실! 그래도 불량식품 좋아하는 습성은 못 고치나 보다. 그 습성을 고쳤더라면, 바에서 이렇게 전 남자 친구의 인사를 받는 일도 없었으리라.

basketball-1472234_1920.jpg Keith Johnston, @Pixabay

그와는 쩌멜리와 저녁식사를 하러 나간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쩌멜리는 유년 시절 군인 아파트 앞집에 살았던 내 오랜 친구다. 어렸을 때는 친하지 않다가 20대 중반 무렵부터 우연히 버스에서 만나고 연락처를 주고받으면서 베프가 되었다. 쩌멜리와는 삶에서 추구하는 바가 비슷했다. 여행도 좋아하고, 남자를 만나서 노는 것도 좋아하고. 당시 내가 인도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 쩌멜리는 이미 인도 여행을 다녀왔던 터라 우린 급속도로 친해졌고, 그 이후 주말마다 우리는 붙어 다녔다. 해방촌에서.


아, 여기서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2005년 인도 여행 이후 난 인도의 매력에 푹 빠져 인도 성애자가 된다. 남들이 영어 이름을 쓸 때 난 뿌스빠(Pushpa : 대중적인 꽃 이름)란 이름으로 살게 된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뿌스빠는 미숙, 미정이처럼 그냥 대중적인 여자 이름인 거다. 그리고 내 친구에게 난 쩌멜리라는 이름을 준다. 그래서 우린 뿌스빠와 쩌멜리가 되고 주말만 되면 지방에 사는 쩌멜리가 올라와서 해방촌 일대에서 마실을 나가게 된다.

그리고 쩌멜리와 함께 저녁과 술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간다. 올드한 외국 감성이 있는 펍이었고, 간혹 한껏 차려입고 데이트를 나온 어색하게 보이는 한국 커플을 볼 수 있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쩌멜리와 내가 함께 있으면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특히 외국인들. 나를 보고 오는 건 아닌 거 같았다. 아무래도 처음에 보면 육감적으로 보이는 쩌멜리 때문에 외국 남자들이 관심을 갖는구나 생각했다. 난 그리고 어딜 가나 낯을 가리는 사람이다.

창가 쪽에 자리 잡은 우리들. 그리고 우리가 앉은 테이블 옆에는 예약석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시끄러운 기운이 몰려온다. 예약석에 손님들이 하나둘씩 차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쩌멜리는 말했다. “야, 텔레비전에서 본 코미디언이야. 외국인 코미디언.” 난 누구인지 몰랐다. 당시 방송 작가로 일을 하고 있던 나여서 텔레비전에 나온다는 게 나에겐 특별한 일이 아니었고 호들갑 떨 만한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제 막 얼굴을 알리기 시작한 사람은 더더욱.

우리 옆에 비어 있던 예약석은 금세 찼고, 모두가 남자들이었다. 외국인 코미디언의 국적으로 봐선 아무래도 호주 친구들의 고향 모임인 듯했다. 우리도 타지에 가면 한국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모이지 않는가. 그렇다. 지금 당신이 생각하는 그분 맞다. 요즘 아이들로 주가를 크게 올리고 있는 그 사람.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던 나도, 더구나 그를 좋아하지 않던 나도 요즘 그 아이들에 빠져서 TV 프로그램을 챙겨보고 있다. 참 세상에 장담할 일이란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잠시 후, 그 무리에 있던 남자 한 명이 우리 쪽으로 와서 말을 건다. 아주 매끈하고 잘 생겼다. 그런데 영어가 아닌 한국어로 말을 한다. 귀여움 두배 추가요. 아무리 모임이라고 한들 남자들만 바글바글 있으면 재미가 없겠지. 아니면 아예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아주 작정하고 왔던지. 그리고 그 타이밍에 우리가 하필 옆에 있었던 것이다.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둘 만의 시간도 지리지리 할 무렵이었고 새로운 자극은 언제나 환영하기에 우리는 흔쾌히 오케이를 하고 자리를 옮겼다. 어쨌든 남자들에 둘러 싸여 있는 건 행복감을 느끼게 만든다. 악센트 강한 호주 남자들 사이긴 했지만 그래서 더욱 우리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 옆엔 아까 합석을 제안했던 남자가 앉아서 계속 나에 대해 말을 걸고 있었다. 얼마 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는 얘기에서부터 시작해 아주 자연스럽게 친해지고 우리는 그 무리와 함께 2차까지 함께 했다.


그 이후 루크란 이름을 가진 그 남자는 나에게 계속해서 연락을 해 왔다. 외국인을 남자 친구로 만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그 모든 행동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여느 한국 사람들처럼 밀당이란 것도 없고, 계산하는 느낌도 안 들고 (언어의 차이일 수도 있겠다. 외국인이 한국인을 하는 거 자체가 그냥 먹고 들어가는 부분이니까.) 무엇보다 항상 솔직하게 자기감정을 전달하는 부분에 있어서 점점 마음을 샀던 것 같다. 솔직히 처음부터 이렇게 친근하게 대하는 사람은 어느 정도 경계하는 나였지만, 이상하게 루크에게만큼은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내 삶에 들어와 내 마음을 몽글몽글 적시는 그 사람을 생각하면 피식 웃기다가도 난 행복감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쩌멜리는 루크랑 가장 친한 친구와 연애를 시작했다. 이들의 필살기는 “개미 똥구멍”이란 말이었다. 외국인 입으로 개미 똥구멍이란 말을 읊어대며 한국 사람들도 잘 안 쓰는 생소한 단어들을 쓰면 호감이 급 상승할 수밖에 없다. 그는 라디오 진행자였고, 또 기타 연주자이기도 했다. 루크 또한 재즈 기타리스트였고 그 둘은 밴드를 하면서 가끔 재즈 바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동시에 루크는 대학교수이기도 했다. 아마 이런 관심 분야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분야에 몸담고 있던 친구들이라 더 금방 친해질 수 있었나 보다.


난생처음 해보는 외국인과의 교제, 그리고 친한 친구와의 더블데이트. 이보다 더 완벽하고 재미있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분이 최고조를 달할 때는 항상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진짜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다고 느끼는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이다. 최고의 순간 뒤에는 항상 내려가야 할 순간들이 도사리고 있을 테니.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자동차처럼 질주하는 내 마음의 속도를 난 제어하지 못했다. 그게 제일 큰 문제였다. 상대방이 어떤 행동을 하든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거늘 난 이미 주도권을 빼앗겨 버렸고, 그렇게 한 달 여간의 찐한 연애에 종지부를 찍을 사건이 생겼으니 바로 그의 전 여자 친구의 계속되는 구애였다.


그날도 우린 개미 똥구멍네 집에서 쩌멜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게임을 하면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개미 똥구멍네 집은 후암동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집과 가까웠다. 집은 넓은 편이었지만 난 두세 시간을 자도 남의 집보다는 내 집에서 자는 게 편했기에 몰래 빠져나와 집으로 왔다. 그리고 그다음 날 계속 연락이 되어야 할 루크가 반나절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만난 루크는 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사실 전 여자 친구가 계속 연락을 해서 만나고 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뭐 여기까지 상황만 보면 난 그냥 쿨하게 “안녕! 그동안 즐거웠어.” 하고 그를 떠나면 될 일인데, 이미 나의 마음은 그에게 많이 가 있었다.


이때 난 알았다. 오래 만났던 연인보다 더 힘든 건 짧게 만나서 한창 좋을 때 헤어지게 되는 것이라는 걸. 이별 후의 힘듦에 대해 굳이 논한다고 하면 오랫동안 사귀면 정이란 것이 들어 헤어질 때 더 힘들 거 같지만 그 반대라는 사실! 오랜 시간을 만나고 희로애락을 다 겪고 헤어지는 거면 이미 머리는 이성적으로 작동을 할 여지가 있다. 하지만 짧은 만남은 이미 감정적으로 충만한 상태이기 때문에 팽팽하던 풍선에 바람이 빠지는 기분이다. 그 어떤 마음의 대비를 할 시간도 없다. 그저 갑자기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느끼며 소멸시켜야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참 지랄 맞다는 거다.


여하튼 난 그 이후에 모든 감정의 지랄을 쩌멜리한테 쏟아부었다. 내가 헤어진 이후 쩌멜리는 개미 똥구멍과 얼마간의 만남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난 계속해서 루크에 대해 쩌멜리한테 묻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되는 나의 지랄에 쩌멜리와의 의절할 뻔한 순간도 있었지만, 쩌멜리의 연애도 그 이후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뭐 때문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그 이후 우린 다시 본연의 쩌멜리와 뿌스빠로 돌아와 예전과 같은 날들을 이어갔다. 언제 이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루크와 한참 잘 만나고 있을 때 그가 연주하는 밴드 공연이 있다고 해서 한 번 갔던 적이 있다. 그때 멤버들에게 루크가 나를 여자 친구라고 소개를 했는데 옆에 있던 개미 똥구멍이 그들에게 한 말이 나에게 딱 와서 꽂혔다. ‘Rebound’란 단어였다. 단어의 뜻은 확실하게 몰랐지만 뭔가 어감이 이상한 느낌은 안다. 언어를 몰라도 누군가 안 좋은 말을 할 때 그게 욕이라는 걸 알아채듯이.


rebound 란 단어의 뜻은 네이버 사전에 의하면 (공 등이) 다시 튀어 오르다와 남은 노리고 한 행동의 나쁜 결과가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다 라고 쓰여 있었지만, 연애의 관계에서 쓰인다면 이전 연인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롭거나 반발심으로 곧바로 다른 이성을 만나는 것이라 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리바운드! 그래 그는 리바운드였던 것이다.


이렇게 한 번 누군가에게 순식간에 소용돌이처럼 빨려가듯 빠져본 경험을 통해서 나는 이제 다시는 만나지 얼마 안 된 사람을 무작정 사랑해 버리는 그런 실수 따윈 하지 않는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지만... 참 그건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불량식품이 몸에 안 좋은 걸 알고, 술을 안 먹겠노라 다짐을 하지만 어느 순간 먹고 있는 나를 보면서 때로는 어떤 말도 안 되는 것들이 화학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도 이제는 좀 폭넓게 인정하게 된다.


P.S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처음부터 무작정 좋다고 들이대는 남자는 선수일 확률 200%니 무조건 조심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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