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소희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북하우스
내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당신은 어떤 부모가 되고 싶은가?
내 아이가 하루하루 어떻게 성장하길 원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게 해 준,
내가 정말 사랑하는 작가 한 명을 소개하려고 한다.
엄마가 되고 아이와 나 자신을 함께 키우는 과정에서 길을 잃을 때마다
이 작가의 책을 이정표 삼아 위로받고 눈물 흘리고 또 긍정적인 자극을 많이 받았다.
때로는 누군가의 백 마디 말보다 좋은 책 속의 한 문장이 고꾸라졌던 삶을 일으켜 세워주기도 한다. 그의 책 속엔 그런 문장이 무수하게 많이 쓰여있다.
그때마다,
‘아! 이 책을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엄마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나는 그의 책들을 여러 번 읽고 홀로 ‘내적 친밀감’이 생겨서 이제 ‘작가’라는 호칭보다 그냥 ‘소희 언니’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다.
나에겐 소희 언니의 책이 총 여섯 권 있다. (더 많은 책을 출간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 대부분은 여행 에세이이다. 그런데,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작가가 처음 쓴 책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는 ‘세 돌 된 아들과 단 둘이 터키로 떠난 배낭여행기’이다. 말만 들어도 입이 떡 벌어지지 않는가? 이후 라오스, 남미, 아프리카까지 다녀온 후의 이야기가 책들에 담겨있다.
첫 책은 15년 전인 2009년도에 출간됐다. 내가 이 책을 처음 발견한 건 2017년이다. 아이가 두 돌 지났을 때였다. 당시의 내 화두는 이런 것이었다.
나는 어떤 엄마가 돼야 할까?
나는 어떤 사람이 돼야 할까?
그 당시 일기장에 썼던 글 일부를 공유해 보겠다.
내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되길 원하는가?’라는 질문은 곧,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과 만나게 된다.
자식의 탄생과 성장은 부모의 재탄생, 재성장의 기회다. 좀 더 처절하게,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렇게 인생의 중요한 화두를 던졌는데, 막상 팽글팽글 돌아가는 일상의 자질구레함을 처리하기 바빠서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점점 떼쓰기 스킬이 늘어가는 아이와 실랑이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발견한 이 책은 ‘개안(開眼)’, 눈이 번쩍 떠지게 했다.
반복되는 일상의 쳇바퀴로부터 벗어나 습관적으로 하는 생각이나 말, 행동 패턴들을 좀 더 깨어서 자각할 수 있도록 돕는 힘이 여행에 있기 때문이다. 여행 안에서 무언가를 깨닫고, 정리하고, 고요해진 마음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들,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을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정말 잘 쓰인 여행 에세이에는 그 세계를 면밀히 바라보고 만져본 후 알게 된 로컬들의 진짜 삶, 그리고 그 장소에 온전히 머무는 동안 작가에게 일어난 통찰이 아름답게 묻어 나온다. 소희 언니의 책들처럼.
최대한 걷기. 대중교통 이용하기. 그리고 로컬들의 삶을 근접한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저렴한 숙소를 잡거나 그때그때 여행 일정과 컨디션에 맞춰 즉흥으로 결정하기도 한다. 빨리빨리, 최대한 많은 곳에 들러서 인증 사진을 찍고, 정보를 훑는 식의 효율지향적인 여행이 아니라 천천히, 아이의 속도에 맞춰서 현지 주민들과 함께 주어진 시간을 깊이 음미하는 여행을 한다.
2018년 시사저널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가난한 나라로 여행을 떠난 이유에 대해 오소희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이도 행복과 관련이 있다. 선진국은 책으로 치면 사회과부도나 화보 같다. 제3세계는 철학책 같다. 그곳에서는 근본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아이를 주렁주렁 안고 있던 20대 필리핀 엄마는 아이들이 자기 행복의 기원이라고 했다. 그 집안을 들여다보면 세간살이는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돈 때문에 아이를 못 낳는다고 하지 않나. 시클로로 돈벌이하는 인도의 한 아빠는 온종일 굶고도 아이에게 줄 슬리퍼를 사서 집으로 갈 때 마냥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행복은 무엇일까. 여건 속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매일 물을 주고 키워내는 것인가.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다녔다.
물론 여행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다. 세돌 지난 아이의 상태가 어떤지……. 우리는 알고 있다.
책을 읽는 동안 같이 위기에 놓이는 느낌이 들어 조마조마할 때도 있고, 해결되면 같이 안도하면서 읽었다.
그렇다고 아이와의 여행이 마냥 힘들기만 한 건 결코 아니다. 아이들은 매 순간 현존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이 있다. 그리고 타고난 철학적 재능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러한 어린아이 특유의 에너지가 여행 중간중간 뜻하지 않은 일로 지치고, 울적해질 때마다 몇 번이고 엄마에게 맑은 생의 기운을 불어넣어 준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아이와 엄마는 함께 성장한다.
오소희 작가가 쓴 책 속의 문장들은 엄마로서 살아가다 길을 잃었을 때 늘 등대 같은 역할을 해줬다. 급변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엄마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이에게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게 해줘야 할지 가이드라인을 잡을 수 있게 해 줬다. 한없이 연약한 인간의 삶을 굳건히 지탱해주는 건 무엇인지 찾을 수 있게 해 줬다. 책으로 함께 여행하는 동안 세상의 불의로부터 나와 아이를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게 해 줬고, 인생 여정에서 만나는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다정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혜안을 기를 수 있게 도와줬다. 책을 덮고 나면 그때마다 내 아이가 더 새롭고 경이롭게 느껴져서 한껏 뜨거워진 가슴으로 꽉 끌어안줄 수 있었다.
오소희 작가의 책을 읽고 나면 다른 언니들의 이야기는 어떨지 궁금해진다. 다른 엄마들의 이야기,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진다. 책을 읽은 후 다른 여성 에세이 작가의 책들을 두루 찾아보면서 각기 다른 삶과, 그 안에서 각자가 길어 올린 저마다의 지혜들을 모으고, 내 삶과 연결 지어 보기도 했다.
글을 쓰게 했다는 것과 아이와 함께 뚜벅이 여행을 하는 엄마로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오소희 작가의 책엔 보석 같이 아름다운 문장들과 심장을 관통하는 통찰이 담긴 문장들이 가득하다. 책을 읽다 보면 내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온다. 우리는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스스로와 깊은 대화를 나누면서 일상에서 놓쳤던 소중한 것들을 재발견할 수 있다. 그때야 비로소 하찮고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았던 내 삶이 귀중하게 느껴진다. 나는 이 책들을 읽으면서 내 삶에 대한 글쓰기를 더 가열차게 해 나갈 수 있었다.
오소희 작가의 책을 만나고 1년 후, 나도 아이와 단 둘이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세 돌이 지났을 때였다. 해외는 아니고, 제주도로 다녀왔다. 그리고 그 후 1년에 두 번씩, 꾸준히 아이와 뚜벅이로 여행을 다녔다. 짧게는 나흘, 길게는 열흘 간 부산, 군산, 남원, 전주 등등을 여행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란다. 해외가 아니라 국내인데도 말이다. 그 어린아이를 데리고 단 둘이 뚜벅이 여행이 가능하냐는 것이다. 가능하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진한 추억들을 많이 많이 만들고 돌아올 수 있다. 어린아이가 기억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 중요한 건 기억이 아니다. 기억에 없는 유아기의 경험이 그 사람의 성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일상에서 벗어나 생의 기운으로 가득 찬 엄마의 다정한 눈빛, 뜨거운 포옹, 익숙한 것들이 없는 장소에서 온몸으로 부딪혀 촘촘하게 순간을 만끽해 본 경험, 새로운 만남과 교감. 이런 것들은 머리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다. 세포에 새겨지는 것이다. 도전해 보라.
마지막으로 내가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소희 언니의 책들을 겨드랑이 끼고 수시로 들춰보면서 힘을 얻었던 문장들을 공유하려 한다.
오소희 작가의 첫 책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에서 내 마음에 꼭꼭 담아뒀던 문장들이다. 더 많은 문장들은 나의 유튜브 채널에 업로드된 ‘낭독 버전’ 영상에서 다루고 있으니 프로필 링크를 타고 방문하시길.. 온 김에 구독과 좋ㅇㅏㅇㅛ도….
[책 속 본문 발췌는 출판사와 작가의 허락을 구해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를 낳은 지 삼 년.
나 아닌 타인에게 그토록
기꺼이 헌신할 수 있다는 것,
내 육신과 정신을 위한 모든 활동들이
아이의 똥기저귀를 갈고 난
마지막 순간에 자리한다는 것,
그것은 다분히 매혹적이면서도 신선한 일이었다.
아이의 존재는 그만큼 신비로웠다.
아이는 내 젖을 먹고,
옹알이를 하다가 앉고 기고 일어서고
뒤뚱뒤뚱 걸었다.
그리고 이제 더는 내 손을 잡지 않아도
달리기 선수처럼 잘 뛰어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뒤돌아보니
‘이 세상에는 아이를 키워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는
황당한 이분법적 사고를 하게 될 만큼
아이가 내 시간과 공간,
사고와 판단의 모든 준거를
장악해 들어와 있었다.
외면하고 있었던 나의 자아는
의식적으로 덮어두었던 다른 기억들까지
기다렸다는 듯
선명한 스펙트럼이 되어 떠오르게 했다.
아이가 젖을 물고 있을 때
무심코 내다본 창밖의 아카시아꽃,
고열에 시달린 아이 곁에서 밤을 지새우고
새벽녘 베란다 문을 열었을 때 밀려들던
붉은 양떼구름,
어느 밤인가 멀리 떠나라 다 잊어라
무시무시하게 종용하던 장마 끝의 비바람…….
얼마나 바랐느냐고?
꼭 그만큼 바랐다.
그 모든 것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나를 터키로 밀어낼 만큼.
p32-33
아이가 그 옛날 술탄의 삶에 관심이 없듯
오늘 구석에 핀 들꽃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생생하게 현재를 좇는 아이의 눈은
죽은 자의 흔적을 따라가느라
치열하게 피어나는 생의 에너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런 일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일어났다.
아이의 보폭은 좁고 일정은 늘어졌지만
아이는 그렇게 걷지 않았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작고 조용하고 낡은 것들이었다.
가난한 소년이 호숫가에 띄운,
호숫가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그의 늙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녹슨 양철 배이거나,
아이가 서슴없이 친구 삼아 노는
거지 아이의 슬리퍼에 뚫린 구멍이거나,
부지런히 흙을 물어 무너진 집을 복원하는
개미들의 눈물겨운 노력……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었다.
p45
내가 거쳐 간 학교의 책걸상들 또한
이제는 구경조차 하기 힘든
한 시대의 유물로 사라졌다.
그렇게 내가 지나간 자리 또한
이 지하 도시처럼 스러질 것이다.
그 가운데 지난한 풍화작용을 거치고도
운 좋게 살아남는 것이 있다면,
먼 훗날 누군가에게 연구 대상이 되거나
구경거리가 되어 최후의 몫을 다하게 되겠지.
그 남은 자리에 오늘 내 아이가 그러하였듯
어여쁜 아이가 뛰어다니며 기적을 울려준다면
그것도 참 좋을 것이다.
무엇을 아끼는가.
살아서 다하지 못하고 아껴두는 것, 유보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집마다
일일이 손으로 빨아 넌 커다란 이불을 보며
내가 자신에게 하는 반성이기도 하다.
안전하게, 안락하게, 게으르게,
주어진 생을 ‘덜’ 살고 있는 내 자신…….
p128
나는 힘이 빠져 테메니 정상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진이고 뭐고 간에 관심 없었다.
잠이 오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약을 타지는 않은 것이 분명한데도,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여행의 피로가
몰려드는 듯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그들의 무지는 그렇다 쳐도,
어린것을 데리고 다니며
어리석게 행동한 내 자신에게
자꾸만 화가 치밀었다.
만약 같은 상황에서 정말 악한 사람을 만났더라면,
우리는 호랑이굴에 갇힌 먹잇감에 다름없었을 것이다.
그때 아이가 테메니 정상에 달려 있는
불꽃 모양의 네온을 가리키며
저것이 무어냐고 물었다.
그것은 네온사인인데,
밤이 되면 불꽃처럼 환히 빛나는 것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말하며 나를 빤히 바라본다.
“엄마, 나는 밤이야.”
아이가 내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안다.
역할 놀이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나는 이제 불꽃이 되어 반짝반짝 빛나주어야 한다.
반짝반짝을 어떻게 몸으로 표현할까 궁리하다가
벌떡 일어나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처럼
만세를 부르고 뛰면서 반짝반짝 빛나주었다.
아이는 흡족하게 미소를 짓더니,
내 기분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이렇게 말한다.
“엄마 오늘 재미있었어. 이제 가자.”
그리고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풀 뜯는 양을 발견하고는 그리로 힘차게 뛰어간다.
그래, 힘을 내자. 고맙구나.
언제나처럼 너는,
덜 익은 나의 생이 성급히 가라앉을 때마다
작고 보드라운 손을 내밀어
하늘 위 별처럼 반짝이게 해 주는구나.
나는 아이가 뛰어간 그 길을 다시 힘내어 달려갔다.”
p142-143
아이는 장난감이 많은
서울의 제 집을 그리워하지 않고 있다.
그래, 아이야, 장난감은 죽은 것이지.
엄마가 보아도 이곳엔 네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 참 많구나.
새와 나무와
고양이와 무당벌레,
너는 그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마음껏 사랑하고 보듬고
그것들과 함께 지칠 때까지 뛰어다닐 수 있구나.
그뿐이더냐.
사람들은 모두 네게 관심을 보이고
너나 할 것 없이 네게 호의적이지.
너도 다 아는구나.
아니, 너는 엄마보다 더 잘 아는구나.
엄마가 파리를 더럽고 귀찮게 여길 때,
너는 그것들에게서 공존의 기쁨을 보지.
새와 나무가 있는 곳엔 파리도 있어야 하고,
북슬북슬한 개가 있는 곳엔 개벼룩도 있어야 하지.
그런데 엄마는 자꾸 좋은 것만 보려고 하는구나.
편한 것만 찾으려 하는구나.
너는 어떻게 이 모든 존재의 비밀을 알아내었니?
처음에 나는 아이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이가 오래전부터
이곳에 올 예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에게 가방을 들게 하고,
자신의 힘으로 이곳까지 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이의 첫 걸음마, 첫 번째 열감기,
처음 내지른 일성, 이 모든 것들은
매일매일 또 다른 ‘오늘’을 위해 성실히 축조된 밑계단이었다.
그렇기에 아이는 내가 끌고 가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린 마음이 닿는 곳까지 가는 것이다.
이 아이의 인생은 오롯이 이 아이의 것이다.
내가 주관할 수 있는 것은 가방을 들어주는 정도의 일일 것이다.”
p212
우리는 자신이 희생하는 것들과만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무언가를 좋아하는데 그것을 얻을 수 없다면 이유는 간단하다.
그 ‘무언가’를 위해 자신이 희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좋아하는 것을 위해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으면서
‘얻을 수 없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사람들과 거리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들의 오해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달리,
그 ‘무언가’를 좋아하지 않는다.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희생하지도 않는 것이다.
p286
도움 되는 대목에 귀를 기울이고,
나머지는 무시하세요.
-앨리스 워커-
당신만의 육아 방식을 존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