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보다 지구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
기후문제는 원만한 사회생활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술자리에서 꺼내지 말아야 한다. 정치, 종교와 더불어 급진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람이라고 낙인찍히기 딱 좋은 이슈이기 때문이다. 신기한 일이다. 숨 쉴 수 없는 공기가 서울을 덮치고,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홍수와 가뭄으로 야채가격이 폭등하고, 미국, 호주, 캐나다 등 선진국조차 유례없는 산불이 몇 달 동안 계속되고, 작물의 북한계선이 매년 북진하고 산호초가 석화되고, 제3세계는 이미 일상적인 환경 재난 한가운데에 들어서 있는 시기인데 아직도 기후문제는 ‘급진적’인 이슈다.. ‘아직 때가 안 돼서’ 그런 것일 수 없다. 『 침묵의 봄』을 쓴 레이첼 카슨이 “인류가 제 힘에 취해서 자신은 물론 이 세상을 파괴하는 실험으로 한 발씩 더 나아가고 있다“고 말한 것이 이미 60년 전이다. 관련 뉴스의 수나 총격도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수많은 환경운동가들이 과격한 시위를 했고, 소녀가 국제기구에서 연설을 했으며, 지속불가한 미래에 대한 경고를 담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도 합리성을 신앙처럼 믿어온 우리의 집단지성은 미래가 파괴되고 있다는 온갖 신호에 반응하지 않는다. 소비중심적 관성을 유지하려고 하는 기업가들, 정치인들, 대중이 있다.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걸까, 보지 못하는 걸까? 그것이 명백히 자기 자신의 발등을 찧는 일이고 자기 자녀들의 미래를 파괴하는 일이라고 해도 눈을 질끈 감고 안락한 오늘,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일상을 유지하기만 간절히 바라는 것 같다.
문제는 우리는 운 좋았던 카슨 시대의 사람들처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카슨이 걱정했던 “다음 세대”고, 남의 일처럼 다음 세대에게 이 일을 전가할 수 없다. 기후변화는 어떤 예측보다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고, 인구절멸의 시계는 근미래를 가리킨다.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항해를 해야 한다. 아직도 근대의 몽상에 갇힌 저 거대한 인류를 태우고 도착지도 정하지 못한 채로. (여기서 ‘우리’가 누군지는 나도 모르겠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중 삿대질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우리는 누구나 동시에 ’근대의 몽상에 빠진 인류‘이자 ’변화를 모색하는 선지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불안과 초조감을 잠시 내려놓고 전략을 다시 짜야할지도 모른다.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이해가 다시 필요할 것 같다. 지금의 상태를 보면 인류를 이렇게 새롭게 정의하는 게 타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성: 인류는 근대적 신화가 그려낸 것만큼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다. 습관과 욕망과 본능에 의해 움직이는 동물로서, 우연히 말을 할 줄 알게 되어 능력에 비해 지나친 비율로 얻게 된 권력을 휘두르며 자기를 파괴하는 동물이다. 20세기에 그토록 확실해 보였던 진보와 발전의 꿈은 사실은 자연과 제3세계의 희생이라는 위태로운 기반 위에 구현된 거대한 착각이었다.
욕망: 인류는 미래의 위험이 감지되면 자발적으로 현재의 욕망을 버리고 습관을 수정하고 더 나은 길을 택할 이성적 능력이 없다. (인간의 문제해결 능력은 매우 편향적이고 선택적이다.) 인류는 집단적 생존과 같은 상위 가치를 위해서 자기의 욕망을 줄이거나 미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
지능: 인류는 자연의 원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제어하기에는 문명을 연속적으로 유지할 시간도, 지적 능력도 부족하다. 애초에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는 항상 오류가 배태되어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편향: 인간은 기후변화의 위기, 인류절멸의 위기 같은 거대한 문제를 직시할 능력이 없다. 최근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환경문제와 같은 거대한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진화의 당연한 결과다. 수만 년 동안 위협적인 자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인간은 낙관이 필요했다. 경고와 위협은 뇌 속에서 블러처리된다. 낙관적으로 살 길을 찾을 능력이 생존을 담보했다.
자연에 대한 이해도 재정립해야 한다.
자연의 유한성: 근대 경제학의 믿음과 달리, 자연은 무한히 성장하는 시장을 지탱할 정도로 무한한 자원을 제공할 능력이 없다.
자연권: 자연 속의 개체들은 의식과 감정과 영혼이 없는 사물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누릴 고유의 권리가 있다. 그들의 권리를 지키는 것은 인권을 지키는 것과 연속된다. 그들이 그 권리를 잃는데서 오는 연쇄적인 환경파괴는 인류의 삶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권을 자연권에 우선하는 것은 모순이다.
이렇게 재정의해보면 환경문제의 인류가 환경문제에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횡포와 기만 때문이라고 소리 높여 비판하는 건 바보 같은 접근이다. 그건 인류를 너무 높이 평가하는 거다. 기후운동가들은 자본주의의 전략을 배워야 할지도 모른다. 달콤하고 맛있고 멋있고 편안하고 안락하고자 하는 꿈으로 인간은 끌리게 되어 있다. 그걸 얻으려고 온 에너지를 쏟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환경 문제를 파멸과 위협이 아닌 상상력과 새로운 꿈과 연결시키는 것은 어떨까.
문학이 기후변화를 위해 할 수 있는 많은 일 중에서,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나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근대적 사상들을 극복한 후의 미래를 문학으로 상상해 보는 꿈을 꾼다. ‘미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상상하는 것’을 꿈꾼다. 지금은 자본주의 밖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아미타브 고시는 “오늘날 지구에서 고갈된 것은 지구의 자원이 아니라 의미(p.111)”라고 말했다. 문학은 인류가 잃어버린 의미를 찾으러 나서는 데 늘 사용되어 온 도구가 아닌가. 문학이 상상함으로써 인류 앞에 내놓을 수 있는 “새로운 의미” “새로운 미래”란 무엇인가? 이 “새로운“이라는 단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문학이 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문학이 무의식적으로 억압해 온 것은 무엇인가, 문학적 언어들이 무엇을 배제해왔나를 연구할 수 있을 것이다.
잠깐! 기후변화와 문학이라니, 무척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내용처럼 들릴 것이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힘들고, 21세기 AI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대에 한가하게 문학과 꿈 타령이라니. 그러나 가장 멀리 가는 길이 가장 빨리 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불행과 피로와 가난은 경제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필요한 일갈은 “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가 아니라, “이 바보야, 문제는 담론이야” 일지도 모른다. 현실은 급변하는데 담론은 그대로다. 이 지체현상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현실에 눈을 감고 피하면서 고수해 온,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고수하려고 붙들고 있는 근대화와 진보의 꿈에 대한 대가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서, 소설은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꿈꿀 수 있을까? 소설은 지구 위에 일어나고 있던 어떤 이야기들을 놓치고 무시하고 있었을까? 이제라도 놓쳤던 이야기들을 주워 담는다면, 그 바구니에 담길 이야기들은 무엇일까? 먼저 여기저기서 읽고, 생각한 것들을 대충 적어보자.
1) 탄소 기반 자본주의가 상품화와 동화를 통해 다양화를 파괴 —> 인간 문화의 뿌리 깊은 다언어적 전통과의 새로운 관계
2) 자본주의 개인주의 —> ‘우리’가 누구인지에 대한 성찰, 파시즘에 잠식되지 않으면서 집단적 문제해결을 모색하는 서사. 그 ‘우리’에서 자연의 비인간 존재들이 어떤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3) 오직 (소비할 수 있는 기간인) 삶이 전제 —> 죽고, 쓰지 않는 (이미 존재하는) 삶의 방식의 재현
4) 자연이 현재의 소비패턴을 영원히 뒷받침해 준다는 자본주의적 전제의 오류 —> 죽어가는 자연과 고통받는 (범위가 점점 확장되는 중인) 제3세계의 문제를 문학의 중심부로 데려옴
5) 인간이 무한히 발전하고 진보할 수 있다는 진보주의적 믿음 —> 그 믿음이 탄소연료자본주의의 무한한 경제성장에 기반한 것임을 자각.
6) 경제적 풍요와 미래의 불안정성 중에서 아주 명백한 경우라도 미래의 불안에 눈을 감음. 현재를 위해 미래를 끌어다 쓰는, 문제를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서 당면 문제의 지평 너머에 존재하는 상황(외부성)을 고의로 배제하는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 지구가 가이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고 생각하는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치부하는 관점과 결별하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연결되는 감각을 되살려주는 서사. (고시, 79))
7) “부르주아적 삶의 규칙성”(고시, 81)을 넘어서는 삶을 상상해 내기. 거기서도 우리는 행복하게, 오히려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가능성
8) 지금까지 부르주아적 삶을 피치 못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있었던 우리가 이 삶의 폐해와 불행의 요소들을 직시하기, 그리고 알고 보니 피치 못한 선택이 아님을 제시하는 것?
9) 근대성의 헌법이란 자연에 대한 표상 체제로서의 과학과 인민에 대한 대의체제로서의 정치의 분할을 보장하고 발전시킨 사유와 실천의 틀(이희우)—> 사물을 공적으로 만들고 관심의 영역으로 끌고 올 공적 공간 수립 (자연과 사물의 정치구성원화)
이러한 상상의 리스트들, 어떤 면에서 사죄와 보상의 심정을 담은 리스트들은 연구를 계속하면서 더 채워지고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경계가설로 우선 정리해 보면
경계가설 1: 소설은 시간과 공간의 자본주의적 상품화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경계가설 2: 소설은 인간 외 화자의 발화를 상정함으로써 인간중심의 근대철학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관을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
경계가설 3: 소설은 죽어가는 자연과 고통받는 (범위가 점점 확장되는 중인) 제3세계의 문제를 문학의 중심부로 데려옴으로써, 지구자연이 생산을 영원히 뒷받침해 준다는 것을 전제한 근대 경제학의 전제의 오류를 극복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이 연구의 최종 목적은 자본주의 너머의 풍경을 구현한 작품들을 나도 쓰고, 다른 사람들이 쓴 작품도 마요네즈 출판사를 통해 출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기후변화를 묵인한 소설적 관습을 해체하고 기후변화시대에 반응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한 첫 단계로 이미 발표된 작품들 속에서 발견되는 상상들을 마주하고 싶다. 소설뿐 아니라 환경 에세이에서 그런 경향이 보이는 작품을 통해서도 힌트도 얻고 싶다.
주제 질문 1: 시간과 공간의 상품화를 극복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품에는 무엇이 있나? 『메블리도의 꿈』, 『시간과 물의 이야기』 - 시간과 공간의 비자본주의적 인식
주제 질문 2: 비인간 사물의 발화의 방식이 제시되는 작품에는 무엇이 있나? 『숲은 생각한다』, 『자연사 박물관』, 『 피난하는 자연』, 『세계 끝의 버섯』
(상상해 보면… 돌고래의 귀로 듣고 독수리의 비행 위치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며 식물의 입장에서 땅의 물을 느끼는 서사)
주제 질문 3: 인간 개인이 아닌 가이아가 서사의 중심에 온 작품들에는 무엇이 있나? 『기후변화시대의 사랑』, 『 새들이 모조리 사라진다면』, 『 문어의 아홉 번째 다리』
예시 작품들은 앞으로 채우거나 교체될 것이다.
유명한 말이 있다. “자본주의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보다 지구의 죽음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고. 그러나 문학은 본질적으로 상상하는 장르이다. 상상은 불가능한 영역을 향할 때 더 빛을 발한다.
“자본주의는 인류 최후의 체재라고 믿게 만든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전략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있다. 자본주의와 그에 따른 인류 절멸이 정말 피치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끝을 모르고 뻗어나가 결국 지구를 한 손에 쥐고 아작 낼 것 같은 이 자본주의 덩굴을 걷어내고 그 밑에 새로 솟아나는 새싹들을 발견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결국 문학의 상상력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