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문제에 대응하며 드러난 인류의 민낯
달걀머리 eggheads.page에서는 6월 20일 박혜진 평론가와 함께 <대혼란의 시대>를 함께 읽는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이 무척 충격적이었다.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지 느꼈다고 할까? 이 책을 읽고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정리해서 올려본다.
2022년의 한 뉴스 클립에서 과학자들의 시위를 보았다. 한 과학자는 카메라 앞에서 비통하게 눈물을 흘리며 ”자녀들을 위해 시간이 없다“고 호소했고 다른 과학자는 “내가 보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다면 사회는 기후 비상사태 체제로 즉시 이행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과학자들은 나사 등의 유명연구소에서 일하는 유수의 과학자들이었다. 같은 해 지구의 날에는 미국의 기후활동가가 자살을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의 친구는 그가 한 것은 자살이 아니라 ”기후 위기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분신공양이었다고 증언했다. 영국의 기독교인 기후 행동(CCA) 소속 팀 휴이 신부는 2021년 언론사 건물 앞에서 입술을 실로 꿰매는 퍼포먼스를 했다.
전 세계적으로 기후활동가들의 활동은 점점 더 ”과격“해지고, 우리 언론사에는 ”기후활동가들 왜 이러나“라는 제목의 기사가 떴다. 이런 ”과격한“ 이들이 ”얼마나 더 증명해야 움직일 것이냐“고 절박하게 묻는 이 순간에도 언론사에서는 ”기후 활동가들 왜 이러나“하고 질타하는 제목의 기사가 뜨고, 시위들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쳤다.
그리고 나는 커피 테이블에 편안하게 앉아서 찻잔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이다. 아직은 평화로운 찻잔 밖에서 그 찬잔 속 소용돌이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면서.
만일 이들의 걱정이 사실이라면 지구상의 누구도 그 영향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목소리들을 흘끔 바라보고는 어깨를 으쓱한 후 다시 살아온 방식대로 산다. 한쪽에서는 미래에 대한 책임감과 공포로 자살을 할 때 한쪽에서는 그들을 미친 사람 취급하고, 지난 수십 년 동안과 똑같은 방식으로 사회가 계속 돌아갈 것처럼 살아간다. 나는 이 풍경이 의아하다. 특히 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나보다도 더 고민하고 신경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자녀들이 살아갈 미래 환경에 이렇게 큰 문제가 예고되는데 우리는 ‘부모’로서라도 훨씬 더 신경을 쓰고 걱정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학원도 보내고 비싼 옷 입히고 서울대를 보내고 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근본적으로 아이들의 미래가 흔들리는데?
2000년대 초반에 이미 “늦었다”는 과학자들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어도 그 말들은 음지에 묻혔다. 그때는 아직까지는 과학자들이 보는 데이터와 추세를 해석하는데 이론의 여지가 있었다고 치자. 그러나 지금 2023년 극지방의 얼음뿐 아니라 만년설들이 다 사라지고 극한 기후가 세계 곳곳을 예전과 다른 곳으로 만들고 있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아직도 기후위기는 사실이 아니다, 아닐 거야, 뭐 어쩌겠어, 어떻게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자기 눈을 가리고 있다.
어릴 때 읽었던 파브르 곤충기에서, 한 곤충이 애벌레가 없어진 것도 모르고 늘 하던 대로 (애벌레가 부화하도록) 흙을 덮더라는 얘기가 있었다. 그걸 보고 파브르는 인간과 곤충이 어떻게 다른지 깨달았다고 했다. 곤충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본능에 따라 기계적으로 반응한다면 인간은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믿음이 지배하는 시대를 살았고, 그런 믿음에 기반한 교육을 받았다. 내가 자라날 때 인생의 전망은 민주화와 경제성장, 인권, 모든 면에서 조금 돌아가더라도 어제보다 나은 내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집단지성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선도해 가는 개혁자들, 혁명가들에 대한 존경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태어난 한국이라는 사회는 드물게 민주화와 경제개발을 동시에 해나가는 나라라는 착시가 가능한 시공간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후문제에 대해서 인간은 그 곤충과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후문제에 대해서는 문제를 인지하고 종합하고, 다른 인간들과 협력해서 해결하는 인간 특유의 능력이 완전히 마비된 것 같다. 나는 갑자기 다른 별에 불시착한 기분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사실은 우리 세계가 원래 이러했다. 찬란한 성장의 문구에 가려져 있던 뒷면에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생명이 멸종되었고 자연은 오염되고 있었고 경고음은 끊임없이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경고에 만큼은 절대로 대응하지 않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일까? 왜 그랬던 걸까? 왜 지금도 이렇게 밖에 못하는 걸까?
나는 이런 우리들을 비판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러기에는 나 자신도 할 말이 없다. 누군가가 끌어주기를 바라고, 대전환의 시대로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그래도 설마 이렇게 문명을 이룬 인간이라는 종이 멸망하겠어,라는 근거 없는 희망을 가진 채, 나도 이 소비주의 체인이 지탱하는 사회 속 구성원으로 하루를 살고 있다.
나는 다만 궁금하다. 지난 수만 년 동안 무수한 도전에 진취적으로 응전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온 인류 종 human kind이, 역사상 지식과 기술의 최고봉에 이르렀다고 생각되는 이 시점에 다가온 기후변화라는 도전에 대해 왜 이렇게 무응답과 회피로 반응하는지. 논리적으로 문제를 인식하고 공동체가 협력하여 합리적인 해결책을 도출하는 근대적 인간상이 이 문제에서 만큼은 왜 마비되어 버린 건지. 그리고 과연 이 도전을 극복하고 다시 자연과 인간의 공존이라는 새로운 ‘합리적인’ 시대로 진입하게 될지.
그리고 특히 내 관심분야가 문학이기 때문에, 근대 이후 사회의 첨병으로서 지배사상에 맞서는 역할을 충실히 해 온 문학이 어째서 이 문제에 만큼은 꿰매진 입이 되어 꼼짝 하지 않았을까 궁금하다. 소위 ‘순소설’들을 읽다 보면 아직도 90년대 혹은 2000년대 초반의 그 낙관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는 것 같다. 적어도, 기후변화의 심각성에 부합하는 정도의 관심과 토론은 일어나지 못하다가 아주 최근에 와서 비로소 주류 문예지들을 필두로 기후소설(cli-fi)과 기후문제에 대한 비평들이 실리고 있다. 한국도 그러하지만 아미타브 고시의 “대혼란의 시대”를 읽으니 외국 문학계도 그런가 보네,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지금 가능한 가설은 기후문제에 대해 우리를 마취시키고 있는 힘이 자본주의 패러다임일 것이라는 것, 그리고 소설이 그 자본주의의 패러다임이 기반한 어떤 것의 작동원리에 무척 충실히 복무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 나라가 통째로 물에 잠기고, 수많은 동식물이 멸종하고, 저개발국가들이 이미 기후변화로 인한 직접적인 고통을 겪어도 ‘이성적인’ 우리는 기꺼이 자본주의 패러다임이 허락한 내에서만 움직이고 생각하고, 소설을 쓰고 읽는다. 그 영역 밖의 고민은 “종말론”이라느니 “근거 없는 공포 조장”이라느니, “정치화”라느니 하는 식으로 쉽게 몰아가게 만든다.
근대 자본주의와 함께 성장한 문학, 특히 소설이라는 장르는 태생적으로 자본주의가 소화할 수 없는 기후 문제를 소화할 수 없는 것일까? 문학과 문학공동체의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마비증세는 우리의 기존 패러다임이 21세기 현실세계를 반영하고 대응하는데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선명한 예시가 되지 않을까?
"대혼란의 시대"를 읽으면서 이 문제에 대해 토론해보았으면 한다.
<대혼란의 시대> 독서모임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