꺠칠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삶이다.
가족이라는 게 뭔가.
젊은 시절 남편을 떠나보내고
하나 있는 아들은 감옥으로 보내고
할머니는 독방을 차고앉아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삼인 가족인 할머니네는 인생의 대부분을 따로 있고
게다가 모두 만학도에 독방 차지다.
하지만 깨칠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삶이다.
아들과 남편에게 편지를 쓸 계획이다.
나이 육십에 그런 건 배워 뭐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묻자
꿈조차 없다면 너무 가난한 것 같다고
지그시 웃는다. 할머니의 그 말을
절망조차 없다면 삶이 너무 초라한 것 같다로 듣는다.
- 이현승 -
노인대학 담당자로 지낸적이 있다. 머리가 희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복지관에 모여, 웃음교실도 하고 한글도 배우는 그런 시간이었다. 나이70이 넘은 할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노란연필로 한글자, 한글자 꾹꾹 눌러쓰는 걸 보며, '배움엔 늦음이 없구나' 생각했었다.
이젠 학교를 중단한 청소년들과 함께 하며 아이들의 검정고시를 지원하다보니,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친구들 중에 몇몇은 자긴 공부를 못해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할 것이라고 시험에 응시하지도 않고 포기하는 경우가 왕왕있다. 그런 친구들에겐 며칠이라도 좋으니, 공부를 하고 응시라도 해보고라고 제안한다. 일주일만이라도 공부를 했다면 검정고시에 응시했을 텐데, 그정도의 공부를 하지 않아 그냥 중졸인채로 남아 있는 친구들도 있다.
지금 시절과 다르게 옛날에는 전쟁으로, 생계로 인해, 가정환경으로 공부를 하지 못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그 중심에는 늘 여성이 희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할머니는 25년생으로 일제시대, 육이오, 군사정권 등 수 많은 시대를 살아오셨다. 할머니는 글을 쓰지 못했다. 할머니의 꿈을 물어보니, 내 이름을 내 힘으로 써보는 것이라고 했다. 초등학생이던 내가 그때 도와드렸다면 할머니의 꿈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늘 아쉬운 마음이 크다.
다만 그들은 정규교육은 받지 못했을 지언정, 삶을 살아가는 지혜는 배웠다. 억척스럽게 가족을 위해 희생했고, 자녀에게 학원을 보내진 못했지만, 내가 하지 못한 공부 너만이라도 꼭 할 수 있도록 푼돈을 모아 학교에 보냈다. 그렇게 삶을 깨쳐나갔다.
부유한 시대를 가난하게 살아가는 요즘이다. 풍족한거 같으나, 남과의 비교로 내가 가진것이 보잘것 없어 보이고, 더 많은 월급만이 나의 가치를 증명해주는 시대다. 그래서 우리는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 돈으로 살수도 없고, 학력으로 취득할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무언가'는 꿈이 될수도 있고, 취미가 될수도 있고, 나눔이 될수도 있고, 지혜가 될수도 있다. 아무도 그것을 정의하진 못한다. 그러나 나만은 알고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가난한 삶이 아닐 수 있어야 한다.
삶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그 '무언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