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태프는 스타가 되면 안 되나요?

과연 스태프 업무의 덕목은 묵묵함일까?

by 애론

나는 소위 있어 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모든 일에 내실을 기하는 것, 중요하다. 겉만 뻔지르르하고 속은 비어있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자고로 빈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다 알지만, 미안하게도 난 있어 보이고 싶다.


학창 시절 나는 축구만 하던 시커먼 아이 었다. 그 덕에 항상 자신이 넘쳤지만 그 외의 것은 소홀했다. 그러다보니 축구는 잘하지만 공부를 포함한 그 외의 것은 그저 그랬다. 하지만 난 운동장에서 최고였고 그거면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던 중, 중학교 시절 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정말 뭐든지 잘했다. 운동, 미술, 공부 어느하나 빠지는 것이 없었다.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면서 나도 그 친구처럼 뭐든지 잘해야지라고 생각했고, 나는 매사에 중간 이상을 하도록 노력했다.


나에게 탑클래스라는 타이틀은 필요치 않았다. 난 그저 쟤 저것도 잘하네? 이 한마디면 좋았다. 덕분에 특별히 하나를 잘하진 못했지만 그럭저럭 대부분의 분야에서 나름 두각을 나타내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무언가를 할 때, 친구들에게 안정된 기대감을 갖게 하는, 강력한 에이스는 아니지만, 범접 불가한 레귤러 멤버 같은 느낌을 갖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대학생활까지 보내고 이후 취업을 준비하면서, 이력서에 나 자신을 멀티플레이어로 소개했다. 뭐든지 잘하는 나는 얼마나 뛰어난 멀티플레이어였던가! (당시 박지성이 유럽으로 진출해서 각광받기 시작하던 시기로, 멀티플레이어로 자기소개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하지만 취업에 성공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과연 내가 뭐든지 잘하고 싶었던 아이였던가 하는 의문이 들게 되었다.




나는 주니어 때부터 지금까지 경영지원 스태프로 근무 중이다. 위에도 언급한 것처럼 나는 내 자신을 뭐든지 잘하는 멀티플레이어라고 생각했고, 이 나의 성향이 지원스태프란 잡과 어울려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동료들을 서포트하는 스태프 업무를 하면서 나는 주역보다는 조연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을 그동안 주연은 아니겠지만, 그 무리에서 항상 2nd 혹은 3rd 즈음은 되었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한참 후순위의 조연으로 역할이 빠지면서 빠르게 동기가 결여되기 시작했다.


잘하면 당연했고, 못하면 욕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동료들을 즐겁게 해줘야지라고 생각했던 나는 동료들의(물론 일부지만) 컴플레인과 시도 때도 없는 그리고 어이없는 요청들이 빈번했다. 특히, 뭐든지 잘하는걸 장점삼던 나는, 뭐든지 잘하는 게 당연한 총무업무를 하면서 점점 더 지쳐가기 시작했다.


사실 직장은 돈을 버는 곳이고, 일하면서 자아를 실현하거나, 즐겁게 일하면서 빛나는 경우는 정말 운이 따라줘야 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이러한 업무 스트레스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버텨내었다. 당연히 돈을 버는 행위는 고통스러운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지금도 많은 직장인들이 그러하리라.


하지만 우연찮게 현재의 회사로 이직을 하면서 나의 잡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스타트업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 기술혁신을 주도하는 IT회사, 모든 이가 관심 갖는 신기한 회사, 영어 이름을 쓰는 수평문화까지, 기존의 내가 다녔던 일반적인 회사하고는 전혀 다른 환경이 제공되었다.


이를 통해 나는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하고 싶었던 일들을 신나게 했고, 나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면서 동료들과 소통을 하였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스태프의 덕목을 얘기하며 제지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나는 스태프의 덕목보다는 나의 성향대로 일을 했다. 나를 감추고 직장인으로 살던 전과 달리, 온전한 나라는 캐릭터가 회사에서 그 성향을 드러내며 일을 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러한 회사의 특수성이 나의 성향과 제대로 맞아떨어지며 다시 한번 내가, 경영지원 스태프임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빛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환하게 빛나게 된 나의 성향은 그동안 내가 자부하던 멀티플레이어의 기질이 아니라, 소위 있어 보이고자 하는 기질이었다.


모든 일에 대하여 전략적으로 판단하자. 어찌되었건 명분이 제일 중요하다, 명분을 만들고 세련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자. 루틴한 업무보다는 프로젝트에 집중하자. 비용이 들더라도 고급스럽게, 비용을 못쓰면 흉내라도 내자. 긍정적인 효과가 크다면 밀어붙이자, 작은 부작용은 감수할 수 있다. 동료들에게 도움을 줄 거면 티가 나게 도움을 주자. 전사 공지는 은연중에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감성을 추가하는데 주저하지 마라.


내가 업무를 하면서 1차적 기준으로 삼았던 사항들을 나열해보니, 멀티플레이어여야하는 조건들은 특별히 없었다. 특이하게도, 오히려 내가 잘하는걸 가치로 삼기보다는,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대하여 가치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굉장히 남의 눈을 의식하고, 남들에게 나 자신이 인정받고 멋있는 사람이기를 원했던 허세와 껍데기 위주의 인간이었다.




흔히들 경영지원업무는 안 보이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말한다. 스태프가 든든하게 서포트를 하면, 현업에서 다른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업무에 몰입할 수 있다. 이를 위하 스태프는 후방에서 지원 업무에 로스가 없도록, 최선을 다해 티를 내지 않고 일을 해야한다고 말을 한다.


원론적으로 현업이 업무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동의한다. 하지만 다년간 업무를 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거쳐가면서 온몸으로 얻은 나의 결론은, 이제는 스태프의 업무 스탠스가 바뀌어야 한다이다.


스태프 면접에 들어가보면 항상 물어보는 질문 중에 하나가, 경영지원 업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이 질문을 하게되면, 후보자들은 대부분 똑같은 답변을 한다.


"스태프 업무는 매우 중요한 업무다. 당장은 티가 안 나지만 우리가 없다면 그들이 불편해 효율이 떨어질 것이다. 현업이 업무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항상 묵묵히 지원해줘야한다. 비록 중요하지 않은 허드렛일 같이 보여질 수도 있으나, 우리가 도움을 주고 고맙다 말해주면 난 거기에서 보람을 느낀다."


다 이해한다. 나도 그랬었다. 일반적인 회사에서 스태프로 근무하면서 느꼈던 나의 포지션은, 필수이긴 하나 중요도는 뒤로 밀리는, 묵묵히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게 덕목인, 전문성은 떨어지고 대체 가능한 인력이었다.


하지만, 조금 자유로운 회사에서 나의 성향대로 근무를 하면서 느꼈던 새로운 스태프 포지션은, 전략과 명분을 통해, 충분히 존재감을 갖고 빛날 수 있는, 묵묵히 도와주는 존재가 아닌, 전방에 나서서 충분한 지원과 즐거움을 줄 수 있는 포지션이었다. 그를 통해 회사에 대한 만족도를 극대화하여, 다니고 싶은 회사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 자체가 스태프의 캐릭터가 되고, 그 캐릭터를 통해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이러한 업그레이드된 회사 내의 포지션을 통해, 그동안의 스태프 특유의 패배감과 무력감을 이겨낼 수 있었고, 늘 입에 달고 살던 회사 가기 싫다라는 말을 거의 10년 동안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위의 나의 이야기는 뻔한 성공기들과 같다. 개인이 잘한것보다는 상황이 운 좋게 흘러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잘한 것은 운 좋게 그때 환경을 바꾸었고, 그냥 주어진 업무를 맘대로 한 것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기업과 진보적인 기업에서 지원업무를 수행하면서, 그 간극과 긍정적인 변화의 모습을 너무나도 뼈저리게 느끼었기에, 그 경험을 모든 스태프 업무를 하는 동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조금이라도 우리 스태프들의 업무 스탠스가 바뀌었으면 하는 욕심이 들게 되었다.


물론 현재 각자 회사의 문화가 다르기에 당장은 바뀔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보수적인 회사, 진보적임에도 스태프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회사, 예산 사용에 제한이 있는 회사, 정말 다양한 제약들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미래에도 스태프는 여전히 묵묵히 일하는 조연이며, 우리의 후배들도 이 고민을 갖고 의욕을 잃고 자신이 직접 선택한 이 일을 후회하며 탓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뀌어야 한다. 비록 요란한 빈수레가 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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