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보.자.구
항공사 입사 후 교육을 마치면 본격적인 비행 생활이 펼쳐진다. 그 중에서도 꽃이라고 불리는 건 타지에서 머물며 비행하는 레이오버(Layover) 비행이다. 짧게는 1박, 길게는 3박 혹은 그 이상으로 제주도를 비롯한 다른 도시나 다른 나라의 호텔에서 머물면서 비행하는 것이다. 여행과 업무 그 사이 어디 쯤에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언뜻 들어보면 여행과도 같은 생활 같아서 부러울 수도 있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대부분의 시간은 호텔에서 자거나 쉬는 것도 바쁘기 때문이다. 그래도 첫 레이오버는 설렘 그 자체다. 부기장들의 SNS에는 첫 레이오버때 호텔 거울 앞에서 유니폼을 입고 찍은 셀카가 꼭 한 장씩 걸려있다. 설렘의 상징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그동안 이 순간을 위해 교육 받은 자신에 위로와 기념, 그리고 설렘의 기록이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조금이라도 남은 설렘을 영끌해서 1년차 부기장의 2박 3일 간의 제주도 레이오버를 기록해 보았다. 이 또한 1년차라서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브런치 각을 잡기 위해 이번 레이오버를 기다린 건 안 비밀
이 날의 첫 비행은 새벽비행이었다. 첫 지하철에 몸을 던져도 출근시간 까지 공항에 도착할 수 없었기에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누군가는 불금을 보내는 중이거나 불금을 보내고 잠든 시간이었다. 브런치 각을 잡으려고 준비했던 레이오버 였기에 기왕이면 일출도 잘 보이는 깨끗한 하늘이기를 바랬다. 바람 하나 안 부는 안정적인 기류였지만 그만큼 안개가 낀 새벽이었다. 구름층이 두꺼우면 일출은 못 보는 거였지만, 다행히 구름 위로 해가 솟아오른다. 둥근 해가 아니라 정말 똥글똥글한 해가 솟아오른다.
새벽 첫 비행이나 공항의 마감시간이 가까운 밤 9시 이후의 하늘에는 비행기가 많지 않다. 늦은 밤의 한산한 올림픽대로 만큼 한산한 하늘길이기에 관제사들도 정상적인 루트가 아닌 빠른 길로 안내를 해준다. 조종사들은 Short Cut을 받는다고 이야기한다. 이 날의 첫 비행도 공항에서 가장 빨리 뜨는 비행기 중 하나 였기에 김포에서도 제주에서도 빠른 이륙허가와 Short Cut을 받아 예상보다 빨리 공항에 도착했다.
여담이지만, 새벽에 비행하면 모두가 피곤하기에 조종사들도 관제사들도 교신의 답이 한 박자 느리다.
모두가 밤새 농축된 피로를 걸쭉하게 풀어내며 통신을 한마디씩 이어간다.
띵-똥
시동을 끄고 좌석벨트 지시등이 꺼지는 소리와 함께 첫 비행이 끝났다. 이제부터 부기장의 손가락이 가장 바쁜 시간이다. 이전 비행의 서류작업과 다음 비행을 위한 세팅이 이뤄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작업을 얼마나 빨리 하느냐에 따라 부기장의 쉬는 시간이 달라진다.
'승객분들이 다 내리기 전까지 준비하자'
보통은 승객분들이 내리기 전에 다음 비행 준비가 끝난다. 때문에 다음 비행이 시작될 때까지 15분 동안 쉴 수 있다. 이 시간 동안 밥을 먹거나 스트레칭을 하면서 다음 비행을 준비한다.
사무장님: 기장님 식사 실렸는데, 안으로 가져다 드릴까요?
기장님: 네, 저희는 칵핏에서 먹을게요~ 이리 주세요.
외부 점검을 마친 기장님께서 도시락 두개를 들고 칵핏으로 들어오셨다.
기장님: 요파야, 밥 먹고 하자~ 맛없는 밥이지만 먹구 일해야지. 먹으면서 (출발 전) 체크리스트도 한번 할까?
나: 네 기장님 ~
쾌남 기장님과 아침을 먹는 동안 탑승교를 따라 다음 승객 분들이 들어오신다. 밥도 먹고 체크리스트도 하면서 분주하게 다음 비행이 시작되었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시동을 걸기 전 기장님이 말씀하신다.
가.보.자.고 ~
매 비행마다 가보자고를 외치는 기장님을 보며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앙 다물고 관제소에 연락한다.
(후- 정신이 아주 혼미해)
나: 제주 지상관제소 안녕하세요, ㅇ번 탑승구에 있는 저희 항공기 푸시백 및 엔진 시동 허가 부탁드립니다.
운이 좋으면 이렇게 한라산도 볼 수 있다.
한라산이 내 쪽에서 잘 보이는 날은 개-꿀 �
몇차례의 비행을 마친 뒤 숙소로 돌아오니 몸뚱이가 아주 노곤노곤 하다. 원래대로 라면 미리 찾아본 맛집을 뿌수러 나가는 것은 개뿔... 낮잠을 자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또 자는 것이 레이오버의 National Rule(국룰)이다.
하지만 오늘은 침대와 한 몸이 될 수 없다. 브런치각을 뽑는 것이 이번 레이오버의 목표니까. 노트북을 열고 근처 요가원을 찾아본다. '날씨도 이렇게 좋은데 야외에서 하는 요가원은 없나?' 라고 생각하던 찰나 한 요가원이 눈에 띄었다. 호텔과 아주 먼 거리지만 버스를 환승한다면 갈 만한 거리였다. (요가원 한번 가자고차를 빌리기는 좀 그랬다.)
'체험비가 저렴하지 않지만 브런치 각을 위해 한 번은 가보자.. 그래.. 가.보.자.구'
카카오 지도를 켜고 요가원까지 가는 길을 검색해봤다. 당장 출발하면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시간 30분.... 비행기로는 김포에서 제주를 가고도 남을 시간인데 라고 생각하면서 서귀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던졌다.
가는 동안의 풍경이 지인짜 예뻤던거 같은데~ 오름도 있고~말도 있고~사람도 많고~ 막 그랬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새벽 비행의 피곤이 남아 있는 몸뚱이기에 잠에 들기 바빴다.
서귀포 어딘가에 내려 다음 버스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분명 3분 뒤에 온다는 버스가 오지 않는다. 지각이다. 멀리 보이는 산방산 멍을 하면서 '이상하다' 라는 생각을 한 두 차례 하던 중 깨닳았다. 여기는 서울이 아니라는 것을!!! (제주비하발언 아닙니다.) 수업 시작 시간이 다가올 수록 고민했다. 눈 앞을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탈지. 아니면 히치하이킹이라도 해야 할지... 이 비싼 수업에 지각할 수 없었다. 라고 생각할 때 쯔음 버스가 도착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얌전히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 있는 동안 요가원에서 언제 오냐고 전화가 온건 안 비밀)
다행히 요가원은 버스 정류장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담장 키만한 귤나무에 둘러싸인 요가원은 게스트하우스와 함께 운영되는 모양이었다. 요가복으로 갈아입고 호다닥 수업 장소로 가니 옆은 인센스 향이 느껴졌다. 요가가 좋아서 혼자온 사람들도 있었고 커플여행으로 온 분도 계셨다. (누가 봐도 남자분이 끌려온 듯한 표정이었다.)
수업은 아직 본격적으로 시작하지 않은 분위기라 다행이었다. 선생님은 요가가 처음이 사람들을 위해 오늘 진행할 수업인 인요가(Yin Yoga)에 대해 설명하며서 아이스브레이킹을 이어가고 계셨다. 덕분에 딱 한자리 남은 누가봐도 내 자리일 것 같은 매트 위에 앉았다.
그런데... 잊고 있었다. 내가 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온 사람인 것을. 가만히 엎드려 깊게 이완하는 것이 인요가인데... 내 몸이 이완되기 시작하면서 생리현상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가지가지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미안하고 창피해서 참고 수업을 들으려고도 해봤지만 불가능했다.
부끄러움과 민망함, 그리고 다름 분들에 대한 죄송함을 무릅쓰고 조용히 화장실을 다녀왔다.
P.S. 사실 요가 수업 중에 화장실을 찾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한 두차례 마음의 전쟁을 치루고 온 탓일까. 드디어 수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너무 행복했다. '드디어 요가 타임이다! 가.보.자.구' 라고 생각하며 수업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참고로 인요가는 편안한 한 자세를 아주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이완하는 요가다. 때문에 요가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몸과 마음의 휴식을 위해 시도해보기 좋은 요가이기도 하다.
수업이 끝날 무렵, 선생님은 난로 위에서 따뜻해진 안대를 나누어주셨다.
'사바아사나, 깊은 이완에 들어갑니다'
가이드와 함께 매트 위에 누워 늘어졌다. 버스를 타고 온 시간, 오지 않는 버스 덕에 초조해졌던 마음이 내려가고 휴식 다운 휴식이 이어졌다. 내가 원했던 격렬하고 땀흘리는 요가가 아니어서 아쉬운 마음도 있었지만 이런 휴식 또한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덕분에 기세를 몰아 숙소에서도 깊은 잠을 잤다.
둘째 날 아침, 비행을 마치고 바닷가 산책을 했다. '오늘은 뭐하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제와 같은 하드코어 스케줄을 반복하기 보다는 조금은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어제 겪은 해프닝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책 한권을 들고 자주 들르는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서 빵 한 조각과 커피로 굶주린 배를 달랬다.
노트북에 그동안 읽은 책을 정리하느라 손가락은 분주했지만 잡생각 안 나는 여유로운 오후였다.
오늘은 그렇게 되는대로 살아보기로 했다.
제주말(?)로 놀멍쉬멍 하면서.
한 권의 책이 정리될 즈음,
'오늘은 가까운 요가원 가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가봤던 아난드 요가원의 수업은 너무 늦게 끝나기 때문에 숙소에서 멀지 않은 동네 요가원으로 갔다.
티는 안 내지만 다른 요가원에 방문할 때는 늘 조심스럽다. 내가 남자라서. 필라테스든 요가든 남자 수강생을 달가워하지 않는 곳들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곳에서 하타요가를 들을 수 있었다. 남자 탈의실이 따로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다행히 오늘은 지각하지 않았다. (별표별표)
하타요가는 가수 이효리씨를 통해서 한껏 유명해진 요가다. 몸을 유연하게 만들어서 몸과 마음의 이완을 가져오는... (복잡하고 어려운 설명은 생략한다)
동네 요가원이라 그런지 모두가 친한 느낌이다. 수업이 끝나자 약속을 한듯 사람들이 모여서 요가 이야기, 그냥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부담 없는 분위기도, 넉넉한 마음으로 낯선 육지사람을 받아준 만큼 금빛 태양을 온전히 받아주는 공간도 마음에 들었던 요가원 이었다.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 요가를 하는 것은 생각보다 기분 좋은 경험이다.
'오길 잘했다'
라는 생각 밖에 들지 않는다.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인연이 닿으면 또 오겠지? 라고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10시가 되어서야 늦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동문시장에서 사온 회, 그리고 맥도날드의 신상 스파이시 맥너겟.
밤바다를 보며 맥주 한잔이라도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새벽 출근러는 아쉬운 마음에 탄산음료를 먹기 시작했다.
이제 끝물인 방어를 먹으려던 찰나... 씨...
그렇게 마지막 저녁은 못먹구 버렸습니다.
그래도 재밌고 알찼던 제주살이었어요.
진짜에요.
브런치에 남기기 위해 더 열심히 보내려고 애쓴 비행이었다.
의도한 일은 아니지만 애피소드가 많았고 기억에 남을 시간이었다.
유쾌한 기장님과 비행하면서 나누는 이야기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브런치에 남길만한 이런 저런 해프닝들도, 요가를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며 겪은 시간들도, 방어에서 나온 벌래도 소중(?)했다.
역시 몸이 힘들어도 추억과 좋은 기분이 남으니까
다들 여행하나 보다.
코로나가 끝나가는 듯 하다.
여행의 재미가 모두에게 다시 찾아오기를 바라면서.
다음 비행도 가.보.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