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만행, 차마 입에 담지 못한 그들의 폭언, 그리고 그것을 무방비로 공격 당한 우리. 그런데 사회에서, 교회에서, 절에서, 자기계발서적에서, TED에서, 우리보고 그들을 용서하랜다. 놔주랜다.
마틴 루터 킹은 "용서는 가끔씩 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영구히 견지해야 할 태도다"라고 말했다. 성경의 마태오 복음서 제18장 21, 22절에 이런 부분이 있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놈의 용서, 용서....
우리는 아직도 우리를 분노하게 만드는 사람을 떠오를 때 이런 생각이 든다. 세월이 약이 아니더라.
용서가 안 되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왜, 그리고 어떻게 용서를 하란 말인가?
'용서는 나를 해친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라는 말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심지어 '용서는 최고의 복수다'라는 말까지. 그러나, 잘 믿기지 않는다. 정말 도대체 용서하면 나에게 무슨 이득이 오는 것일까? 내가 용서하든 안 하든 그 XX는 잘 살고 있을 텐데, 이게 어떻게 최고의 복수가 되는가? 그들은 내가 당한 만큼 똑같이, 아니 그 이상 되돌려받아야 한다.
영화 <어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에서 어린이 프로그램 진행자 미스터 로저스(톰 행크스)는 기자 로이드(매슈 리스)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
1분간 눈을 감고 오늘날 자신이 있기까지 사랑을 준 모든 사람들을 떠올려 보세요
로이드는 평생토록 아버지를 미워했다. 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날, 그의 아버지는 곁에 없었고 곧바로 다른 여자와 함께 있었다. 로이드는 툭하면 술마시고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용서못한다. 그런 그를 로저스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로저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집중하고 기도한다.
미스터 로저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와 관계가 당신이 그렇게 성장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걸 잊지 마요.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만 해도 아찔할 정도로 밉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격분하게 만드는 그 이들이 바로 우리를 성장하게 도와준 '영혼의 벗'이다. <1700년 동안 숨겨진 절대 기도의 비밀>라는 책에서는 이런 부분이 있다: "가장 큰 고통을 느낄 때 가장 큰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용서도 상처와 직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상처는 선택에 따르는 형벌이 아니라 사랑하는 능력을 확인하는 바로미터라고 볼 수 있다."
상처를 받을 수록 더 사랑할 수 있다는 능력이라는 뜻일까?
이게 적용되려면 타인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바라봐야할 것 같다. 비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못한 타인의 '잘못된 행동'은 결코 이성적인 사고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어 뷰티풀 데이 인 더 네이버후드>에서 로저스는 로이드에게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훈계하거나 권유하지 않는다. 로저스는 그저 로이드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경청해주고 그에 따른 로이드의 감정을 인정해준다. 그것이 분노와 증오라도 말이다.
로저스는 타인을 판단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으로 사람을 가르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살라고 부축이지도 않는다. 어린이 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 그는 프로그램에서 죽음, 이혼, 전쟁, 등과 우리 곁에 어두운 면들을 다룬다. 우리 사회에, 아니 우리 바로 곁에 있는 고통과 어두움은 피하거나 외면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로저스는 어두움을 우리는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인간의 위대성을 언급한다:
죽음이란 건 참 묘해요. 많은 사람이 얘기하기 꺼리는 주제죠. 죽음은 인간적인 거에요.
인간적인 건 무엇이든 얘기할 수 있고, 얘기할 수 있는 건 감당할 수 있는 거예요.
엔딩 크레딧에 울려 퍼지는 노래 가사가 참 인상 깊다.
가끔 사람들은 슬퍼해요. 가슴 치며 후회도 해요. 그런 슬픈 사람들이 가끔은 기쁘기도 하죠. 우습지만 사실인걸요. 누구나 그래요 저도 그렇고. 가끔 사람들은 착하게 굴고 해야 할 일을 하기도 하지만 그런 착한 사람들이 가끔은 나쁘기도 하죠.
우리는 나약한 존재다. 성인군자처럼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하다가 한순간에 분노하기도 한다. 이는 미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습이다. 우리는 때로 실수하고, 상처를 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만약 부모를 용서하고, 지난 인연들을 놓아준다면 용서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용서란, 상대방을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저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용서는 삶이 주는 선물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