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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Sep 05. 2017

#3. 안대에 새겨진 그림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굉장한 밤이었죠.”


그날 밤을 회상하던 여자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짙은 붉은 립스틱 덕분에 그녀의 올라간 입 꼬리가 더욱 돋보였다.

 

“담배 있어요?”


여자는 나이가 많은 남자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담배를 건 낸 건 그 옆에 앉은 젊은 남자였다. 여자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고, 나이가 많은 남자 쪽으로 길게 내뱉었다. 잠시 침묵이 일었고, 다시 여자는 그날 일을 이어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먼저 접근한 것은 여자 쪽이었다. 그렇지만 그와 단순히 가벼운 일상 이야기나 나누며 한 잔 하려고 했단다. 낯선 그가 어딘지 모르게 여자의 모성본능을 자극했다고. 먼저 취한 건 남자 쪽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의 정신이 더 혼미해져 갔고, 오히려 그런 자기를 그가 챙겨 주더라는 거다. 결국 붉은 립스틱의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경계를 풀게 되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여러 번 그 부분을 반복해서 말했다.


“모든 게 완벽했어요. 솔직히 호감 가는 얼굴에 몸매도 좋은 데다가, 말도 잘 통했죠. 아! 무엇보다 미소가 굉장히 부드러웠어요. 아이같이 천진하게 웃는데 눈꼬리가 처지면서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고. 보조개? 보조개가 있었던거 같은데...... 그렇지만 그 부드러운 미소 너머, 저 깊숙한 곳에서 풍겨오는 고독이랄까? 저보고 채워달라 갈구하는 듯했거든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여자는 지난날의 황홀함을 또 한 번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혼자만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근데 그 남자, 한 가지 이상한 취미가 있더라고요.”


“이상한 취미요?”


젊은 남자가 재빨리 질문했다. 여자는 그에게 시선을 바꾸며, 팔짱 낀 팔을 살며시 풀었다.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톡톡 친 뒤, 다시 그 손을 뒤집어 자신 쪽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젊은 남자는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그녀에게 건 냈다. 여자는 그의 잽 싼 행동에 만족한 듯 빨간 입술을 씰룩 거렸다. 그녀가 건네받은 담배를 입에 물어 불을 붙인 뒤 한 모금 길게 빨더니, 나직하게 즐거운 탄성을 내뱉으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아니, 글쎄. 저보고 그걸 하는 동안 안대를 하고 있으라는 거예요.”




붉은 립스틱의 여자와 헤어진 뒤 젊은 남자는 질문할 타이밍을 살피고 있었다. 한 시간 전의 상황은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여러 가지 가설들을 혼자서 세우다가 내린 명쾌한 결론, 단도직입적 질문을 던진다.


“아니. 왜 아까 그냥 나온 겁니까? 그 여자 연락처라도 받아놨어야죠?”


“…”


“딱 봐도 깊은 관계는 아니란 건 저도 잘 알겠어요. 그래도 언제, 어디서 갑자기 저 여자한테 연락을 할지도 모르고, 다시 또 뭐 그 이상한 취미활동이라도 하고 싶어서 만나기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어.”


“네?”


젊은 남자가 혼자서 내린 가설 속엔 없는 답변이 그로부터 돌아왔다. 다시 한 번 재차 물었다.


“그럴 일이 없다니요?”


“로이가 다시 그 여자를 만날 일은 없다고.”


“왜… 왜죠?”


“로이는 한 번 잔 여자랑은 다시 관계를 맺지 않아.”


“뭐라고요? 아니.. 그럼 왜 저 여자를 만난 겁니까? 어차피 다시 볼일도 없을 사람인데, 뭘 얻을 게 있다고?”


“얻을게 왜 없어?”


“네?”


“내가 남에 요상한 취미활동이나 탐구하려고 저 여자한테 접근 한 줄 아나?”


수트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남자는 젊은 남자에게 자신이 여자로부터 얻은 것을 꺼내 보였다.


“이게 뭡니까?”


그의 손에는 회색의 안대가 들려있었다. 지난밤 붉은 립스틱 여자의 눈을 가리는 데 사용했을 물건이었다. 안대를 뒤집자 아래쪽에 검은색 선으로만 이뤄진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 그림이 욕조 속에 누워있는 해골인지 알아채기 어려울 몹시 작은 그림이다.


“이걸 봐서는 마지막 안대를 소진한 것 같군. 움직이자.”


“네? 어...어디로요?”


“블라디보스톡”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트래블러: 죽음에는 차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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