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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Sep 16. 2017

#9. 마린스키 극장

당신의 몰입을 이끌어내는 이야기


로이는 코트를 벗었다. 일관된 굳은 표정의 여자는 로이의 코트를 받아 든 뒤 무심히 열쇠고리를 건 냈다. 공연이 끝난 뒤 맡겨두었던 자신의 물건을 찾으러 올 때 교환할, 나무에 새겨진 두 자리 숫자의 번호표다. 번호표를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고는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 3층을 이용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1층의 관람석이 훤히 보인다. 아직은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공연장 안으로 다 들어오지는 않은 듯했다. 무대는 생각보다 높이 솟아있지는 않았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벙커가 보인다. 그 안쪽에 오케스트라 팀들이 빼곡히 악기와 함께 들어가 공간을 채우고 있다.


천장의 밝은 조명 아래 웅장한 무대와 아직은 다 채워지지 않은 넓은 객석 사이를 연결하는 그 비좁은 공간이, 위에서 내려다볼 때 그리 조화롭지 않게 느껴졌다. 공간의 불균형. 그러나 그 사이로 조화로운 음률이 흘러나온다. 곧 더욱 풍성한 울림으로 연주가 시작될 것이다.


 ‘이곳에서 다음 달에 폭탄이 터진단 말이지.’


로이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지난날을 떠올렸다. 공간을 울리는 음악소리는 그의 생각을 과거로 데려가 놓았다.




“어우씨. 깜짝이야. 누구야? 오웬이야? 오줌 지릴뻔했네. 언제부터 거기에 서있었어?”


로이는 어둠 속에 실루엣만 보이는 한 남자를 보고 사뭇 놀랬다. 그 검은 형체의 인기척에 막 잠에서 깨어 신경이 예민해진 참이다. 실내에 조명이 서서히 들어오자 누워있던 하얀 그물로 엮인 해먹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마지막 문장?”


로이는 늘 자기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오웬에게 한 가지 확인을 한다. 그와는 다르게 시간대를 자유롭게 트래블하는 오웬이다. 가끔씩 과거의 오웬이 로이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와 친구가 된 후부터 마치 스파이를 구분하기 위한 암호와도 같이 지금 눈 앞에 있는 그가 동 시간대의 오웬인지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함께 있다 헤어지기 전에 공유했던 마지막 한 문장을 묻는 거다. 과거에서 온 오웬이라면 분명 다른 문장을 뱉어낼 테니까.


“행복할 때 약속하지 말고, 슬플 때 결정하지 마라. 일곱 시간 전 나눈 문장.”


“일곱 시간 전? 내가 낮잠을 일곱 시간이나 잤다고?”


로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밤 열 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너 아까 낮에 영화보다 옛날 생각난다고 징징댔지. 대낮부터 술 처먹고…… ”


“제 시간대로 돌아왔네. 근데 꼴은 왜 그래?”


로이는 서둘러 오웬의 말을 막으며, 잠이 덜 깬 눈을 비벼댔다. 그제야 제대로 눈을 뜨고 동 시간대의 오웬을 바라보았다.


“로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로이 앞에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 오웬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했다. 어깨선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막 잠에서 깬 로이는 알아채지 못했다.


“뭐야. 갑자기 그 진지한 표정은. 밥은 먹었냐? 배고프다. 뭐 좀 먹고, 서핑이나 하러 가자!”


“앞으로 2년 뒤에 여기, 이곳에서 폭발물이 터질 거야.”


오웬은 세계지도가 그려진 벽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한 지점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그의 때 묻은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연해주의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톡이었다.


“러시아? 폭탄? 설마……지금 그곳을 다녀온 거야?”


로이의 두 눈이 커졌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


오웬은 잽싸게 아이폰을 꺼내 에어드랍으로 로이에게 여러 장의 사진을 전송했다. 검은색 반팔 티에 베이지색 면바지 차림, 그리고 바지보다 짙은 갈색의 옥스포드화를 신은 젊은 한 남자의 사진이었다. 오웬이 보낸 여러 장의 사진은 모두 동일한 남자를 포착하고 있었다.


“2017년 12월 24일 저녁 8시 35분. 앞으로 정확히 2년 3개월 후야. 여기 이 블라디보스톡에서 폭탄테러가 있을 거야.”


“크리스마스이브에 폭탄테러라니? 이 남자가 용의자인가?”


오웬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전부터 이 남자를 추적했어. 과거로 돌아가 몇 가지의 패턴을 바꿨지만……”


“미래가 바뀌지 않았다?”


“응. 그 시간대로 다시 돌아가 확인해도 여전히 똑같이 그 남자는 나타났고, 극장에는 폭탄이 터졌어.”


“극장이라고?”


“마린스키 극장이야. 오페라 카르멘 공연 마지막 4막이 시작된 후 정확히 13분 후에 폭탄이 터져.”


“헉. 부상자는?”


“현장에 있던 연기자, 오케스트라, 스탭, 관람객 1,756명 전원 사망. 물론 용의자도 현장에서 사망해.”


오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고, 그의 갈색 눈동자의 초점이 허공을 응시하는듯했다. 로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언가를 결심한듯 입을 열었다.


“오웬. 네 말대로, 과거로 돌아가서 그 자를 미리 막는다고 해도 미래는 바뀌지 않을 거야. 그 자가 아니더라도 2년 뒤 크리스마스이브에 카르멘을 보러 간 사람들을 겨냥한 제3의 테러리스트가 있을 거라고.”


“아니야. 분명 바꿀 수 있어. 패턴을 바꿨더니 폭탄이 터지는 위치가 바뀌었어. 그런데 여전히 극장 안에서야. 뭐지?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놓치고 있는 건 뭘까? 어쩌면 그날 그곳에서 테러가 실패하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오웬의 떨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칠어졌다.


“진정해. 유감스럽지만 1,756명? 그 사람들은 그게 운명이야. 안타깝지만 그걸 받아들여야 돼. 너 같은 타임 트래블러들이 균형을 깨면 깰수록 세상은 더 복잡해진다고.”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네가 방법을 찾는다고 해도. 난 못 도와줘. 솔직히 그 꼴을 하고 나타나서 미친놈처럼 떠들어대는 거도 더 이상 못 보겠다. 분명 본부에서도 너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작년일 잊었어?”


“도와줘. 로이.”


오웬은 지금 순간 그 누구보다 간절했다.


“그만해.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이 사건을 파헤치느라 그동안 갑자기 사라지고 그랬던 거야? 네가 그렇게 날 뛴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너도 잘 알잖아.”


“꼭 바꿔야 돼. 반드시……”


오웬은 로이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 네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


로이는 핸드폰에 저장된 용의자의 사진들을 전부 선택했다. 마지막 휴지통 아이콘을 누르려던 찰나였다. 그의 뇌리를 스친 불길한 생각 하나가 그의 손가락 움직임을 저지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오웬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오웬이 슬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로이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생각해낸 것을 입 밖으로 차마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확인을 해야 했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카르멘 공연장에... 에지가 있었구나?”


오웬의 갈색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는 이내 떨리는 음성으로 로이의 물음에 답했다.


“우리 셋 다 그날 그곳에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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