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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Sep 16. 2022

나는 나를 사랑하고 싶어요


여름의 마지막 자락에서 조금 앓았다. 그럴 만도 했다. 올여름은 나에게 유난하게 혹독했으니까. 고작 한 계절을 살아내는 동안, 파혼, 부모님과 갈등, 데이트 폭력까지 견뎌내야 했다. 분해. 억울해. 나 그래도 장맛비 정도에는 흔들리지 않고 이 악물고 버텨보려고 했었는데. 정신 차릴 틈도 주지 않고 연달아 몰아치는 태풍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렸다. 돌이켜보면 그 모두가 두 달 사이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 현실감이 없게 느껴져서 허탈한 웃음마저 나온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너무 많이 지쳐버린 나에게는 일상마저 버겁게 느껴졌다. 그저 아침에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세워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내 안에서 끌어올릴 수 있는 에너지의 전부를 바닥까지 박박 긁어서 쓰고 있었으니, 계절이 바뀌기 전에 몸 져 누운 게 이상하지 않았다. 나에게 참 불친절했던 계절을 기념이라도 하듯이 열병으로 뜨겁고 눅눅한 병상에 누워 여름을 정리했다. 그렇게 한 바탕 앓고 나니, 어느덧 새로운 계절이 와 있었다.


눈 부신 햇살, 선선한 바람, 적당한 온도와 습도. 비로소 산책하기 정말 좋은 계절이다. 어디로 걸어도 연인들, 가족들, 사랑하고 사랑받는 반짝이는 기적 속에 있는 사람들을 본다. 아름다운 가을에 잘 어우러지는 따듯하고 오붓한 풍경. 그리고 그 찬란함 속에 목적지도 없이 홀로 걷는 내가 있다. 오늘날 인류가 이렇게 번성한 걸 보면, 태초부터 지금까지 인류는 자연스럽게 사랑을 했을 진대, 어째 나는 돌연변이가 된 기분이 든다. 아니, 어쩌면 나는 어떤 숙명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원래 히어로들은 다 돌연변이잖아. 우리 몸을 구성하는 세포는 적당한 때가 되면 죽어야 한다. 이를 세포사멸(Apoptosis)이라고 한다. 이 프로그램이 잘못되어 예정된 죽음으로 피해 계속 분열하면 암세포가 된다. 개체 수 조절을 위해 인류가 심어놓은 사멸 프로그램이 혹시 나인가? 짝 없이 이렇게 살다 죽는 게 나의 사명?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면서 가을을 걷는다.



개인적으로 힘들었던 여름을 지나면서 건강 말고도 많은 걸 잃었다. 사람에 대한 신뢰도, 사랑에 대한 믿음도. 그리고 무엇보다, 모든 걸 잃고도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지탱해 줄 '나'를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찾은 가장 쉬운 해결책나를 탓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랑을 믿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의지할 곳을 찾지 않았다면 배신당할 일도 없었을 텐데, 내가 위로를 구하지 않았더라면 상처받을 일도 없었을 텐데. 이게 다 사랑을 믿고 의지했고 위로받고 싶어 했던 나약한 나 때문이야. 그래 놓고 밤마다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일에는 집중 못하고, 건강 관리에도 실패해서 시간을 버리고 있잖아. 나를 망친 건 나야. 나 때문에 나는 망가진 거야.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기 비난. 끝내 병들어 누워있으면서도 가만히 있을수록 선명해지는 자기혐오에 몸을 떨어야 했다. 연인에게도, 가족에게도 의지할 곳 없어진 나를 붙들어 줄 수 있는 건, 오직 나 하나뿐이었는데. 벼랑 끝에 겨우 버티고 있는 나를 밀어버린 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나를 채찍질하는 방법은 지난 삼십여 년 간 꽤 효율적으로 나를 성장시켰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문제없이 작동했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였었다. 그 덕에 하고자 했던 공부도 끝까지 해낼 수 있었고, 학위를 얻어 좋은 직장에 안정적인 자리를 잡아 아쉽지 않게 사는 30대의 사회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내가 잘 되기를 누구보다 바랐다. 그리고 나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 너는 더 잘할 수 있잖아, 이까짓 건 능히 해낼 수 있잖아. 그렇게 스스로 되뇌며 나를 몰아세웠다. 그러나, 그건 과연 '사랑'이었나? 슬픔에 빠져있지 말고 당장 일어나라고 채근하고 이 정도로 흔들리지 말라며 다그치는 건 정말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결국 나는 기댈 곳을 완벽하게 잃었다. 나에게도 버려졌으니 나를 붙잡아 줄 손길이 있을 리 없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지금도 이렇게 가장 힘들었던 순간에 내게 모질게 굴었던 나를 책망하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요즘 나는 내가엽다. 그리고 나를 불쌍히 여기는 내가 정말로 싫다. 차라리 내가 타인이었으면 안쓰러워하고 말았을 텐데. 자기 연민에 빠져있는 꼴이 너무 보기 싫다. 자기혐오로 가득 차 있지만, 역설적으로 나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싶다. 동정하고 연민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사랑을 하고 사랑받고 싶었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라도 감싸안는 것이 사랑일진대, 남도 아닌 나를 사랑하는 것도 이렇게나 쉽지 않다. '나를 사랑한다', 라... 문득, 그래서 '나'는 누구인데?라는 자문이 생긴다. 남보다는 많이 알고 있나? 그렇다고 '나'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다. 그래,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랑을 하겠나. 사랑까지는 르겠고 그냥 괴롭히지만 않으면 좋겠다. 


나에게 가혹하고 다정하지 못한 나. 타인을 대하는 것의 반만큼이라도 했으면 이렇게 사이가 나빠지지 않았을 거다. 하물며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슬프고 힘든 상황 중에 있다고 한다면 고민 없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무리하지 마세요, 상황이 어떻든 당신이 가장 중요해요, 같은 위로의 말들을 해주었을 텐데. 나에게는 다 네 탓이야, 울고 있지 마, 슬퍼하지 말고 당장 일어나, 정신 차리고 상황부터 수습해, 라며 모진 소리만 하고 있다. 이렇게 비난만 하고 상처 주는 사람이 남이라면 절교라도 할 텐데, 나 자신과는 헤어질 수도 없으니 퍽 곤란하다. 남아있는 평생을 함께 해야 할 텐데 이대로라면 고통만이 가득하겠지. 이제는 나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제대로 싸워봐야겠다.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말라고, 나에게 상처 주지 말라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힘드니까 그냥 나를 내버려 두라고 소리라도 질러봐야겠다.


그리고 나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서 남인 듯 나를 바라보며 위로와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다. 하지만 이 당연해 보이는 것이 실제로는 쉽지 않은 것이, 스스로에게 채찍질하던 버릇이 깊이 배어있어서 정신 차리고 보면 또 나를 괴롭히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나에게 따듯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타인에게 건넨 다정한 말을 스스로에게도 해주기로 했다. 우습기는 해도 1+1 행사같이 나를 덤으로 끼워 파는 전략이다. 이렇게라도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의 굴레를 끊어보려는 시도랄까.


사실 나는 타인에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다. 의도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 크다. 대신 해결해주지도 못할 문제를 묻고 싶지도 않고, 복잡 미묘한 관계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야 해서 금세 피로해진다. 그래서 나와 관련 없는 관계의 갈등이나 타인의 문제에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편이다. 특히 최근에는 누군가의 슬픔을 나눠지기에는 이미 내가 짊어지고 있는 슬픔도 버거워서 피하려고 애쓰고 있다. 하지만 그리 아껴서 비축한 에너지를 나를 괴롭히는 데에 쓸 바에는, 차라리 타인을 따듯한 시선으로 살피기 위해 사용하고 덤으로 나에게도 긍정을 적선하는 편이 훨씬 나은 운용방법이지 싶다.


그래서 앞으로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려고 한다. 다만, 다정하게. 일련의 사건들로 사람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렸다지만, 천 명의 사람들은 천 개의 서로 다른 얼굴들을 가지고 있을 테니. 무조건적인 믿음보다는 딥러닝(Deep Learning)으로 나아갈 때이다. 가만가만 들여다보면, 그 천 가지의 얼굴들에서 나도 보이지 않을까. 살아보려고 애쓰는, 작지만 생명력 있는, 가엽지만 대견하고 여리지만 웅장한 내가. 나는, 진심으로 그런 나를 찾고 싶다. 비록 지금은 자책의 늪에 푹 젖어있지만, 나는 여전히 내가 행복하기를 누구보다 바란다. 유독 덥고 비도 많이 와서 재해 소식이 끝이지 않던 여름도 때가 되면 지나가고 이토록 찬란한 가을이 오듯이. 그렇게 내 안에도 평화가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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