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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Sep 28. 2022

어떤 상처


어떤 상처는, 화내고 울고 혼자 소리라도 지르나 맛있는  먹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보면 아물기도 한다. 시간이 지나고 바쁘게 움직이면 아픈 게 좀 잊히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상처는 나를 완전하게 압도하고 끝내 파괴한다. 나는 도저히 잊히지도, 저절로 아물기를 견디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운 상처를 만났다. 파혼도 인생에 꽤나 타격감 있는 사건이었는데 몇 개월 만에 그 슬픔이 더 큰 슬픔으로 덮일 줄을 몰랐다.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보기 전에는 내 일이 될 거라 상상해 본 적도 없었지만, 그건 누구나 맞닥뜨릴 수 있는 일이었다. 경찰청 조사에 따르면 해마다 1만 명이 데이트 폭력 당한다고 하지만, 아마 신고하지 않는 피해자들도 많을 테니 실제로는 그보다는 더 많을 것이다. 피해 갈 수 있다면 참 좋았겠지만, 나는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인데. 그날 이후로 하루도 제대로 잠이 들지 못했고, 하루도 제정신으로 깨어있기가 어려웠다.


'경험'으로 받아들이면 성장할 기회이고, '상처'받아들이면 트라우마가 된다는 내용의 강연을 듣고, 한 달 정도는 어떻게든 경험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무진 애를 써봤다. 사실은 데이트 폭력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별 것 아닌 해프닝 정도였는데 내가 너무 확대하여 받아들인 것이 아닌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 리 없어. 그렇게 부정도 해봤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수록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장면과 하루에도 수십 번 나를 사로잡는 두려움 때문에 무엇에도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하루 종일 원치 않는 기억에 시달려 고된 몸을 누이면 더욱더 끝도 없이 밀려드는 괴로운 기억 때문에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겨우 잠들었다가도 꿈에서도 반복되는 끔찍했던 장면에 소스라치듯 눈을 뜨고 나면 나는 내가 불쌍해서 견딜 수 없어 어두운 방에서 숨 죽여 울었다.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을 용서할 수 없어 화가 나는데, 미안하다며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그 사람의 연락을 받으면 미친 사람처럼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이 더 혐오스러웠다. 그 사람은 편안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을 텐데, 왜 나는 매일을 악몽에 시달리고 자기 연민과 혐오 사이에 갇혀서 울고 있어야 하는 건지.


그래도 한 달 정도 지나면, 기억이 옅어질 거라고 기대했었다. 조금만 견디면 나의 일상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한 달이 두 달이 되어도 내가 원하지 않는 순간 뇌리에 박히는 기억들은 도무지 지치지도 않고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무엇에도 집중하기가 어려워서 단순한 업무는 물론이고 일상생활을 해내기 위해서는 나의 모든 영혼까지 다 끌어서 써야 하는 기분이었다. 어떻게든 버티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별안간 또다시 그 순간에 사로 잡혀서 입을 꾹 닫고 멈춰 섰다. 계속 외면하고 싶었지만 끝내 트라우마로 남았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일을 없었던 일로 할 수는 없구나. 결국 내게 '경험' 보다는 상처로 남았구나. 다문 입술 위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래도, 나는 내가 제발 행복했으면 좋겠어.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갔다. 내가 원하는 건 그저 평범한 일상생활이었다. 일상을 되찾기 위한 마지막 끈을 붙잡는 심정이었다. 선생님은 근래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화를 내거나 울 기력도 없어서 찬찬히 이번 여름에 내게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파혼했고, 나를 질책하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에서는 위안을 얻을 수 없었고, 새로 만난 사람에게는 데이트 폭력을 당했노라고. 이렇게 말하고 나니 자신이 너무 기구해서 견디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괜히, 파혼한 것까지는 그래도 견딜 만했는데, 하고 말을 더하니 선생님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문진표를 건넸다. 여러 문항들을 작성하다 보니 스스로도 심각한 상태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심각한 우울, 트라우마, 자기 비난. 평소에도 잠을 얕게 자는 편이라서 최근의 수면 시간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불면증이 심각하며 여태 살아있는 것이 신기한 상태라고 했다. 무렵에 나는 몸살을 앓고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라고만 여겼었는데, 마음의 멍이 퍼져서 나를 갉아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울증 치료는 기본적으로 최소 6개월이 걸려요.

수용체를 활성화시키는데 생물학적으로 그 정도 기간이 걸리거든요. 괜찮은 거 같더라도 안정될 때까지는 약물 농도를 단계적으로 올려야 하고요."


네, 알겠습니다. 뭐든 해주세요. 맑고 건강했던 일상을, 행복을 행복으로 느낄 수 있는 나를 되찾을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하기로 했다. 자기 연민에 빠져있는 건 꼴사납지만, 나를 가엽게 여겨도 동정이 아닐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그 후로도 치료는 꾸준히 받고 있고, 몇 개월 만에 처음으로 깨지 않고 6시간을 자고 일어나게 되었다. 회사 업무는 늘 많고 바쁘지만, 집중이 필요한 일은 전처럼 그럭저럭 잘할 수 있게 되었다. 웃음도 되찾았고 나서서 우스개 소리를 할 여유도 생겼다. 새롭고 즐거운 일을 찾아다니기도 한다. 맛을 느끼며 식사를 하고, 눈에 띄게 줄었던 체중도 다시 채워지고 있다. 나를 파괴했던 '어떤 상처'가 나에게 앗아갔던 일상들이 돌아오고 있다. 트라우마로 남았던 사건은 앞으로도 없었던 일이 될 수 없고, 여전히 이따금씩 떠오르기도 하지만 이내 가라앉는다. 언젠가는 그날을 마주해도 아무렇지 않은 때가 오려나. 그때는, 마음 깊이 기쁨을 품을 수 있는 튼튼한 내가 되어 있기를.



하루라도 더 살아서 마침내 행복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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