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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Nov 03. 2022

다시 살아서 죽자

*영화 <빅 피쉬>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별빛
밤하늘에 반짝거리는 이 밤
초라해진 어깨 위에
달빛 나를 비추네
계속 걸어보네
불빛에 취한 이 길을
소리 없이 웃어보네
불빛이 흔들거리네

이 순간 방황은 별이 될 거야
다시 일어나
이 순간 눈물을 삼켜 버리고
다시 살아서 죽자


[96] - 크라잉 넛 노브레인, 가사 중 발췌


크라잉 넛과 노브레인이 함께 부르는 96 무대를 보면 괜히 뭉클해진다. 쉽지 않은 길을 함께 걸어온 친구들이 서로에게 야, 한 번만 더 해보자! 라며 어깨를 툭툭, 거칠지만 뜨겁게 도닥이는 느낌. 다시 살자. 죽을 것 같지만 살아보자. 어차피 언젠가는 죽을 거 다시 살아서 죽자.


고작 두 달 사이에 파혼하고 데이트 폭력 피해자가 되었다. 정신과 치료를 받고 약이 없으면 잠에 들 수도 없는 내 일상은, 가까이에서 봐도 비극이고 멀리서 봐도 비극인 것만 같다. 사실은 그렇게까지 비극이 아니더라도, 트라우마와 우울증은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인다. 나는 낭떠러지 끝에 매달려 있다. 내가 꿈꾸던 서른네 살은 이렇게 불쌍하고 초라하진 않았는데.


팀 버튼 감독의 영화 <빅 피쉬>에서, 마녀의 눈을 보면 자기가 어떻게 죽는 지를 볼 수 있다는 소문에, 어린 시절의 드워드가 구들과 힘께 마녀를 찾아가는 장면이 있다. 친구들은 마녀의 눈에서 자기가 죽는 모습을 보고 기절하거나 좌절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의연하게 '아, 저는 그렇게 죽는군요'라고 말한다. 그리고 18살이 된 에드워드가 꼼짝없이 죽을 것 같은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그는 어린 시절 마녀의 눈보았던 순간을 떠올린다.


나는 이렇게 죽지 않아 (This isn't how I die).



그리고 그는 대범하게 위기를 벗어난다. 그리고 그때부터 많은 도전과 모험을 하며 살아간다. 마침내 마녀의 눈에 보았던 대로 인생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환송을 받으며 생을 마감하는 장면은, 내가 아는 가장 환상적인 죽음이었다.



영화 <빅 비쉬> 중,  And then I realized this wasn't the end of my life. "This isn't how I die."


에드워드는 정말 마녀의 눈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았기 때문에 인생을 용감하게 헤쳐나갈 수 있었던 걸까?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그가 '죽음을 알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특별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번 더 보다 보니, 그는 '죽음에 의연했기 때문에'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마음껏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워드는 구들이 좌절하던 음 앞에서도 덤덤하고 초연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갑작스럽고 공평하지만, 그곳에 닿기까지의 여정은 나의 선택이라 믿는 것. 에드워드의 삶이 '빅 피쉬 (Big fish)'라는 전설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 사는 나는 내가 죽는 장면을 실제로 알 수는 없다. 그건 갑작스럽게, 어쩌면 내가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찾아올 것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가 이렇게 우울과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매번 다짐해도 의지도 약하고 자주 흔들리는 '나'이지만, 그런 '나'에게 아직 남은 믿음이 하나 있다. 나는 나를, 내 인생을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초라하게 끝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을 거라는 믿음. 나는 적어도 이렇게 죽지 않는다. 나는 내게 행복하기를 누구보다 바라며,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애쓸 것이므로.   


수많은 별빛, 환한 달빛, 형형색색의 불빛, 심지어 흔들거리는 물빛 중 그 무엇도 내 것이 없다. 빛이 찬란할수록 나는 더욱 초라하다. 그래도, 다시 살다 보면 별도 되고 달도 되고 불도 되는 날이 오겠지. 그리고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어차피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을 향해 달리고 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다시 살자. 살아보자. 죽을 때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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