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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Apr 28. 2023

너의 삶이 쉬웠으면 좋겠어

「괌 여행기-Ep.04」 미혼 여성의 커리어


"네, 네. 알겠습니다. 월요일까지 확인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S가 업무 전화를 받는 소리에 아침잠을 깨었다. S는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다시 잠에 들었다. K도 침대에 누워서 휴대폰으로 업무 카톡을 읽고 있었다. 한국과 괌의 시차는 1시간이다. 괌이 한국보다 한 시간 먼저 시작한다. 여행을 와도 자유로울 수 없는 직장인들은 그렇게 평소보다 한 시간 먼저 업무를 시작했다. 로밍은 태평양 위의 섬에서도 얄미울 정도로 잘 터진다. 심지어 우리는 통신사에서 제공하는 로밍 패키지를 신청했기 때문에 무제한이나 다름없는 30GB를 쓸 수 있다. 관광지와 맛집을 검색하려고 신청한 로밍 서비스인데 아침부터 생생한 업무 전화를 받고 있다니! 에휴, 천장을 보고 바로 누웠다. 계획보다 일찍 깨어났지만 그래도 낯선 호텔 천장 아래 누워있다는 사실이 나쁘지 않다.


우리는 호텔 침대에 뒹굴거리다가 브런치를 먹기 위해 햄버거 전문점 '햄브로스 Hambros' 찾았다. 각자 마음에 드는 버거를 시켜놓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다들 습관적으로 업무 메일을 확인하고, 회사 카톡을 읽는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회사 업무를 보고 있다는 걸 안다. 미간이 찌푸려 있기 때문이다. 주문한 음식이 조금만 더 늦게 나왔다면 미간이 좁아지다 못해 눈썹이 붙어버릴 참이었다. 다행히 금방 햄버거가 나왔고 나지막한 환호와 함께 모두의 미간이 활짝 펴졌다. 크게 한 입씩 썰어먹고 나니 만족스러움에 미소가 번지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햄버거야 한국에도 많지만, 이 버거는 느낌부터 다르다. 왜냐면 회사에서 일할 시간에 출근하지 않고, 괌에서 먹는 버거니까!



우리는 고등학교 친구들이 전공은 전부 다르다. 운 좋게도 다들 전공을 잘 살려서 직업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제는 '연차가 낮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부하 직원들이 생겼고, 뭔가를 책임져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 나와 친구들은 만나면 주로 직장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한다. 어찌 된 일인지 모든 직장의 상사는 무능하고 후배들은 답답하고 동료는 얄미우며 내 위치는 불안정하다. 리적으로 따져 물으면 노처녀가 히스테리 부린다, 여자는 저래서 안된다는 얘기를 듣는다. 그 소리가 싫어서 입을 다물면 무시당하기 일쑤. '미혼 여성'이라는 사회적 위치에 발목 잡히지 않도록 남들보다 더 애써야 하는 현실. 괌에서 브런치를 먹어도 일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돈을 버니까 이렇게 괌에 휴가도 올 수 있는 거라지만, 어째 삶은 갈수록 녹록지 않다.


솔직히 나에게 직업은 돈벌이 수단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파혼 후, 내 삶에서 '일'이 차지하는 비중이 달라졌다. 어쩌면 앞으로도 결혼을 안 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에 결혼한 직장동료는 '결혼하고 나니 나를 받쳐주는 기둥이 일과 가정, 두 개가 된 기분이 들어 안정적'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직업은 미혼 여성의 유일한 기둥이다. 휴가 중에도 업무를 놓지 못하는 우리. 아마 기댈 곳은 나 자신 뿐인 세상을 살아내고 있기 때문일 테지.

 

식사 중에도 업무 연락이 끊이질 않았다. 로밍이 후회되는 순간이다. 나는 그냥 비행기 모드를 해버렸다. S는 식사를 하다가도 업무 전화를 받느라 여러 번 포크를 내려놓았다. 안타까운 마음에는 "야, 그냥 받지 마!"라며 핀잔을 주었다. 역시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엎어두었던 K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나는 너네 삶이 쉬웠으면 좋겠어."

나와 너와 우리의 삶이 쉽길. 가 행복하지 않으면 나도 행복하지 않으까. 그래도 서로를 애처로워하는 친구가 있어서 위로가 된다. 내 인생을 받치고 있는 반석이 하나 더 있다면 친구들이 아닐까.


말없이 짠, 부딪히는 맥주잔 소리가 청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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