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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아 Dec 12. 2022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난 그냥 나야

「괌 여행기-Ep.03」 미혼으로 살아갈 권리

드디어 괌으로 떠나는 날. 비행기가 가득 찼다. 온통 커플 아니면 가족 단위로 보인다. 인천에서 4시간 10분이면 서태평양에 있는 괌에 도착한다. 비행시간이 길지 않고, 공항과 시내가 가깝고, 면세 쇼핑이 가능하다 보니 '아기를 데리고 가기에 좋은 해외여행지', '태교 여행의 성지'라고 들었다. 과연 괌에 도착해서 보니 이 섬은 사랑과 결혼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이제 막 가정을 꾸린 신혼부부, 아기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 자녀들과 온 가족, 부모님을 모시고 온 가족... 마치 이 세계의 모든 기본 단위는 '가족'이고, '결혼'이 최고 미덕인 섬에 똑 떨어진 기분이었다. 


괌의 대표 관광지인 '사랑의 절벽 Two lovers Point'만 봐도 그렇다. 스페인 장교와 강제로 결혼하지 않기 위해 도망치던 차모로의 연인이 서로의 머리를 묶고 뛰어내렸다는 절벽. 그저 경치가 좋은 절벽일 뿐인데, 사람들은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며 동상을 세우고 괌의 유료 랜드마크로 만들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머리를 묶고 같이 죽자고 뛰어내리는 것이 '사랑'이라면 나는 솔직히 애틋한 마음보다도 거부감이 먼저 든다. 물론 이 아름다운 랜드마크가 못마땅 관광객은 입장료 3달러가 아까운 삐딱한 나뿐이겠지만.


괌, 이파오 해변 Ypao beach


나는 올해 애정운이 더럽게 안 좋았다. 결혼 준비를 하다가 6월에는 파혼했고, 8월에 만난 다른 남자에게는 교제한 지 3일 만에 강제추행을 당했다. 연애를 '많이 해봤다'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제 나는 연애에 아주 질려버려서 그만하고 싶어졌다. 요즘 유행하는 연애 프로그램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면 다들 신기하다고 한다. 강 건너 불구경은 재미있어도 우리 집에 난 불은 하나도 재미가 없는 법이다.  


연애도 질렸고 결혼도 이제 남의 얘기만 같은데, 이 세상은 '사랑하지 않은 자, 유죄!'라는 프레임을 씌워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선을 짓는다. 혼기가 지났는데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일을 열심히 하면 '독하다'는 말을 들어야 하고, 타당하게 불만을 제기해도 '노총각, 노처녀 콤플렉스'라며 수군댄다. 세상 모든 사람이 장점과 단점이 있을진대, 미혼인의 단점은 '저리니까 결혼을 못했지'라며 타당성을 준다. 사랑의 가득 찬 이 이상한 세상에서는 '결혼을 안 해봐서 뭘 모른다.' 느니, '자식이 없어서 이해를 못 한다.'며 가정을 꾸리지 않으면 바보 취급받기가 일쑤이다. 


나도 그래서 주류에 편승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도 흐르는 대로 되지 않았을 뿐이다. 대체 사람들은 사랑하고 연애하고 결혼에 '골인'하여 가정을 꾸리는 걸 어떻게 그리 숨을 쉬듯 자연스러운 일처럼 하는 걸까. 결국 주류가 되지 못하고 비주류에 남은 나는, 연애의 결말이 결혼으로 흐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미혼은 어딘가 하자 있는 사람으로 대해지는 것이 몹시 불만이다. 이렇게 말해봤자 그런 게 결혼 못한 콤플렉스라고 웃음거리나 되겠지만.  



괌에 도착해서 조금 이른 저녁식사를 하고 석양이 짙어지는 해변으로 나갔다. 밀물 시간이라서 호텔 프라이빗 비치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수영하기에는 파도가 약간 거셌지만, 우리는 지체 없이 몸을 던졌다. 붉은 노을을 비추는 바닷물에 피부가 적셔져 붉게 빛났다. 우리는 분위기 좋은 음악을 들으며 태양처럼 부서지는 파도와 바다처럼 일렁이는 일몰을 보았다. 면세점에서 구매한 위스키에 마트에서 사 온 아이스크림을 한 스쿱 턱 얹어 먹으니 맛이 좋았다. S와 K, 그리고 나는 선베드에 비스듬히 누워 타는 듯한 노을이 환상적인 빛깔로 푸르러지는 걸 오래 바라보았다. S가 오래 참던 질문을 내게 던졌다.


"대체 갑자기 왜 그렇게까지 결혼을 하고 싶었던 거야?"


S와 K는 나를 오래 알아왔던 만큼, 내가 결혼하려고 했던 것 자체를 신기하게 여겼다. '그만큼 사랑했으니까'라는 나의 대답에 그녀들은 더 기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누가 봐도 아니었어, 너는 조상신이 도왔는 줄 알아야 한다며 이제라도 정신 차려서 다행이라고 다그쳤다. 나도 지나 놓고 보니 그와 결혼하지 않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너는 금방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라는 친구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아무와도 연애하고 싶지 않을 거 같아."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하다. 연애하고 결혼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나이에 연애를 하고 싶지 않아도 되는 걸까? 연애사가 복잡한 나와 다르게 S와 K는 연애에 관심을 놓은 지 오래되었다. '너네는 연애할 생각이 없어?'라는 나의 질문에 그녀들은 꽤나 단호하게 답한다.


"가끔 주말에 데이트도 하고 놀러 나가고 싶다가도, 지난 연애들을 떠올리면 힘들었던 기억이 더 많이 나서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려."

나는 지난 연애를 금방 잊는다. 아픈 기억은 특히 떠 빨리 잊으려고 한다. 그래서 다시 또 누구를 만나고 또 사랑을 하고 또 상처를 받고, 때로는 상처를 주면서 이 짓을 반복한다. 이번에는 다르겠지, 라는 마음 보답받지 못면서도 여전히 버리지 못한다. S는 지난 연애에서 좋았던 것보다 힘들었던 게 더 많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습득 능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친구들은 나에게 '너는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 알아?'라며 답답해한다. 그런가 봐, 나는 먹어봐야 알아.   


"내 마음에 드는 남자는 어차피 이 세상에 없을 것 같아."


K 다운 말이다. 그녀는 물건 하나를 사도 꼼꼼하게 비교하고 온갖 후기를 다 찾아보고도 일 년이 넘게 고민한다. 확실히 그녀의 이상형을 들어보면 이 세상은커녕 다른 세상에도 없을 것 같긴 하다. 솔직히 한 때는 그녀가 눈이 너무 높아서 '문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현실에 맞춰 기준을 낮추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나의 기준을 고수하는 것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결혼하고 싶으면 현실을 직시해, 눈을 낮춰.'라고들 하지만, 그건 다른 말로 바꾸자면 '혼자 살 용기가 없으면 너를 내려놔.'라는 말이다.


결혼 적령기가 지난 미혼 여성으로서 사랑이 미덕인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건 사뭇 용감해야만 한다. 나를 화려하게 꾸미면 까다롭고 눈이 높아서 결혼을 못한 거라고 손가락질하고, 가꾸지 않으면 저러니까 결혼을 못한 거라고 혀를 차는 사람들을 이겨내야 한다. 까다롭지 않으면서 자기를 꾸밀 줄 알아야만 할 수 있는 것이 결혼이라면, 그리고 내 기준을 버려야만 할 수 있는 것이 결혼이라면, 그런 결혼은 왜 해야 하는 걸까. 


결혼에 실패했다는 좌절감, 주류에서 멀어졌다는 불안감, 하지만 과연 결혼이 내가 정말 원하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사랑에 눈이 멀었던 어리석은 선택이었을 뿐인지 모르겠다는 혼란함이 나를 채우고 있었다. '사랑의 절벽'에서 같이 죽자고 머리를 묶고 뛰어내린 차모르 족의 연인이 될 뻔했던 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미덕이라면 나는 나를 내려놓고 깎아내서라도 사랑을 찾아야 하는 걸까. 나의 이야기를 듣던 S와 K는 내게 말했다.


"너는 그 사람들을 만나기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에겐 똑같은 너야.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너는 그냥 너야. 
앞으로도 전처럼 우리랑 재미있게 놀러 다니면 돼."




그래, 맞아. 나는 그냥 나야. 세상의 미덕이 '사랑'이고 가정을 꾸려야 '주류'가 된다고 해도. 사랑하지 않고 비주류인 나는 그래도 나야. 괌에서 보는 첫 일몰에 마음을 뺏겨 오래도록 보고 있다 보니 어느덧 어스름이 내리고 있었다. 괌의 태양은 높게 떠 작렬할 때는 눈 부시게 아름답고, 석양이 되어 질 때는 근사하고 화려하다. 그리고 다음날 또 맑은 얼굴로 떠오른다. 나의 실패는 요란했지만 이제는 다시 솟아나서 나의 길을 가면 돼. 태양이 매일 제 갈 길을 가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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