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era : Rollei prego90
Film : Kodak Ultramax400 + Colorplus200
밤새 비가 내렸다. 문 밖에 벗어둔 신발이 휩쓸려 내려갈까 봐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대로 자다가 홍수에 휘말리는 것은 아닐까 잠을 설쳤다.
아침이 되니 새가 지저귀었다. 설마, 하고 커튼을 열어보니 비구름이 사라지고 없었다. 제주의 날씨는 변화무쌍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너무 와 닿는 아침이었다. 에어비앤비를 나서면서 오늘 하루 비가 많이 오질 않길 바라보았다.
집 앞 바다에도 들려보았다. 잘 놀다 갑니다.
어디를 갈까 고민을 하다 평대리에 있는 성게국수가 너무 먹고 싶어 졌다. 그래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하늘이 점점 먹구름이 가득했다. 아, 역시 나와 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가. 비가 오니까 갑자기 슬퍼졌다.
평대리 정류장에 내리니 비가 엄청 쏟아지는 것까지는 아니고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내렸다. 이만하면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성게국수를 먹으러 갈까 하다가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았기에, 근처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주 도착할 때 샀던 책을 다 못 읽었기에 책도 읽을 겸, 비 오는 평대리를 즐길 겸.
카페 오길에 갔다. 평일이고 또 태풍이 올라온다고 해서인지 사람이 없었다. 내가 앉고 싶은 자리에 앉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창 옆에 자리를 잡았다. 빗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RM의 Forever Rain을 들으며 빗소리를 즐기기로 했다. '비가 오면 조금은 나 친구가 있다는 기분이 들어, 자꾸 내 창문들을 두드려 잘 지내냐면서 안부를 물어', 라는 그의 가사를 곱씹으며.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쓸어내겠다는 듯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또 한 번 위로를 받았다.
카페에서 배도 채울 겸, 감성도 채울 겸 앉아있다가 비가 그치길래 바다를 보러 나왔다. 평대리까지 와서 바다를 안 보고 가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만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문득 저렇게 평온해 보이는 바다가 태풍을 감싸 안을 정도로 큰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쉽지 않겠지만 바다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모든 화가 나는 일도, 짜증 나는 일도 다 평온하게 감싸 안고 싶다.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하더니 폭풍 비가 쏟아졌다. 급하게 우산을 쓰고 사진을 찍는데 이러다가 비바람에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젖어도 된다 치지만 카메라가 젖으면... 아찔했다. 그래서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예쁜 고양이가 있는 카페였다. 고양이가 날 반겨주는 카페라니, 우연히 들어왔는데 우연히 행복해졌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또 해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공항 근처로 옮겨가야 할 때인 것 같았다. 국제선도 아닌데 3시간 전에는 공항 근처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해 뜨는 평대리를 느끼며, 그래도 잠시나마 해를 볼 수 있어서 감사하며, 버스를 타러 가본다.
평대리를 좋아하는 이유가 세화는 너무 사람이 많아서 복잡하고, 종달리는 바다를 보러 나가기 멀고... 그 중간에 있는 마을인 만큼 적당함이 좋아서다. 처음 평대리에 왔을 때는 아 너무 동네가 조용해서 무슨 사고가 나도 모르는 거 아니야?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근데 몇 번의 방문 동안 그런 일은 없었다. ) 예전에 살던 동네가 생각나기도 했다. 물론 조용한 시골 동네가 다 비슷비슷하겠지만 유독 평대리에 가면 예전에 살던 동네가 생각이 많이 났다. 향수 때문에 더 많이 찾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이곳에서 살고 싶다.
동문시장 근처에서 내렸다. 시장에 들러 생선이랑 고기를 집으로 보내고 그 근처 나만의 핫플레이스를 가기 위해서다. 아 핫플레이스까지는 아니고 그냥 플레이스. 동네 주민들만 가는 맛집인데 제주에 가면 꼭 들리는 곳이 있다. 건강한 음식은 맛이 없어서 좋아하지 않지만 맛있는 건강한 음식 전문점이다. 이러니까 너무 홍보 같으니까 어딘지는 말하지 말아야지.
가장 좋아하는 짬뽕과 맥주 한잔을 시켜놓고 강아지와 놀면서 제주 여행을 회상했다.
곧 다시 오겠지만 그래도 이번처럼 비가 엄청 많이 내린 제주는 당분간 느끼기 어려울 테니까.
퇴근시간이어서 그런지, 비가 내려서 그런지 차가 도통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루했다. 멀미도 할 것 같았다.
이어폰을 꽂고 플레이리스트를 랜덤 재생하는데 귀에 꽂히는 노래가 있었다. 에픽하이의 let it rain이었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노래가 너무 잘 어울렸다. 여기서 뮤직비디오 한 편 뚝딱 완성할 수도 있을 정도였다.
'내리는 이 비에, 아무도 모르는 나의 아픔을 묻어둔 채', 라는 가사를 곱씹으며 이 복잡한 교통체증과 꼬리의 꼬리를 무는 생각들도 같이 묻었다.
태풍이 부는 날, 비가 쏟아지는 제주에 내 모든 고민들도 놓고 간다.
이 비에 다 씻겨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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