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눈발이 약하게 흩날리던 어느 겨울날, 나는 드디어 대학교 졸업장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대학생에서 취업준비생으로 내 신분 또한 자연스레 바뀌게 되었다.
그렇지만 불안감은 크게 없었고, 일단 계획했던 대로 인턴부터 입사지원을 해보기로 했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나의 7년간의 공기업 생활을 시간순으로 서술하려 한다. 꽤나 오래전 기억들이기도 하고,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다 보니 다소 단편적으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대에게 양해를 미리 구하는 바이다. 그래도 지금 나도 기억을 떠올리며 내 과거의 이야기를 해야 하니, 그대가 같이 내 기억 속으로 함께 동행해 주기를 바란다.
준비됐으면 이제 같이 시간을 돌려보도록 하자!
졸업장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 우연히 채용공고를 보다가 국민건강보험공단 행정인턴을 지원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기도 했고, 그냥 경험 삼아서 한 번 자기소개서나 써보자 하는 마음이었다. 지금 와서 이 자기소개서를 보니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수준이지만, 어쨌든 서류전형에 합격했다. 그리고 이어진 면접전형도 그때 무슨 헛소리를 하고 왔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정말 망한 것 같았지만, 최종합격을 해서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면접을 보기 전에 집에서 부모님께 부탁드려 모의면접을 연습했지만, 부모님은 내 답변을 들으시고는 별다른 말씀 없이 "그냥 밥이나 든든히 먹어라."라고 하셨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렇게 졸업한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첫 번째 공기업에 합격하고 근무를 하게 되었다.
첫 출근날, 아침 일찍 일어나 정장을 차려입고 거울로 비치는 내 모습을 연신 바라보고 있었지만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비록 인턴이었지만, 국민건강보험공단이라는 큰 공공기관에서 근무한다는 사실이 벌써부터 자부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행히 집 근처 지사로 발령이 났고, 나는 건강검진 관련 행정보조 업무를 하게 되었다. 지사 분위기는 꽤 좋은 편이었고, 공공기관 특성상 개인정보를 다루는 업무를 인턴에게 쉽게 맡길 수가 없어서 내가 하는 업무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래서 직원분들의 배려로 NCS 책을 펴고 공부하거나 자격증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도 꽤 있었다.
무엇보다 재밌던 경험으로 기억되는 것은, 당시 지사 내에 통기타 동아리가 운영되고 있었다. 나는 비록 인턴이었지만 조심스럽게 함께 할 수 있는지 여쭈었고, 감사하게도 흔쾌히 허락해 주셔서 퇴근 후에 차장님들, 과장님들과 지사에서 기타를 치곤 했다.
여담으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시작하게 된 이 기타라는 것이 내 인생 전반에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었다. 밴드에서 수년간 활동하기도 했고, 공연도 했던 경험들이 자기소개서나 면접에서 평가위원분들께 다른 지원자들과는 다른 신선함을 어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이직을 이렇게 많이 할 수 있었음에도 유의미한 영향을 끼쳤다고 느끼고, 만약 취업준비생들에게 내가 팁을 줄 것이 있다면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 혹은 취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브랜딩 하는 데 상당한 강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돌아와서, 동아리에서 차장님들, 과장님들과 신나게 기타를 치며 눈에 띄게 되자 어느 차장님께서 흥미로운 제안을 해주셨다. 내용은 당시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는 건강백세운동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함께 경로당에 출장 공연을 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희대의 관종(?)인 나는 이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아래 사진과 같이 즐거운 경험들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공단에서는 정년퇴직 전에 공로연수라는 제도가 있는데, 공로연수식에서 직원분들 앞에서 축하 공연을 하기도 했다. 글을 쓰다 보니 건강검진 관련 업무를 한 것보다 그 외의 것들이 더 많은 것 같아서 살짝 머쓱하긴 하지만,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의 기억들은 이렇게 남아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인턴 이후부터는 계속 NCS 그룹 스터디를 하고 있었다.
아, 여기서 NCS는 국가직무능력표준(National Competency Standards)을 뜻한다. NCS는 공기업과 공공기관 채용 전반에서 적용되는 기준이지만, 공기업 취업준비생들이 NCS를 공부한다고 하면 통상적으로는 필기시험을 말한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나 다른 시험과는 유형이나 접근방법이 다르다고 볼 수 있는 시험이라 처음 마주하게 되면 대부분 당황하는 거 같다.
나는 매주 카페에서 스터디원들과 모여서 NCS 모의고사 문제를 풀고는 서로의 방법을 공유하면서 스터디를 이어갔다. 당시에 고정 멤버는 7명으로 기억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소식이 끊긴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기업에 최종합격했다. 우리 중에 가장 먼저 합격한 스터디원은 나와는 동갑내기 친구이고, 현재까지 쭉 한국전력공사 계열사에서 근무 중이다. 나에게 "너 또 이직했냐?"라고 잔소리를 가장 많이 했던 친구 녀석 중 한 명이다. 잔소리라고 표현을 하긴 했지만, 그만큼 나에게 관심을 많이 가져주고 걱정해 주는 친구 녀석이라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이라는 곳에 정규직 채용공고가 떴길래 큰 기대 없이 원서접수를 했고, 당시에 최종 경쟁률은 398:1로 확인했던 기억이 난다. 서류전형-필기전형-면접전형으로 이어지는 채용과정이었는데, 서류전형은 부적격만 뜨지 않으면 별도의 심사가 없었기에 사실상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필기전형에 응시할 수 있었다. 필기전형은 NCS와 한국사, 영어로 이루어진 문항들이었고, 나는 필기시험에서 헷갈리는 문항들이 많았었기에 당연히 불합격할 줄 알았다. 그래서 필기전형결과를 확인하며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제는 면접만 통과하면 나도 드디어 공기업 정규직이 되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말을 결코 잘하는 편이 아니다. 조리 있게 말을 똑 부러지게 하지 못하고, 당황하면 말을 자주 더듬기도 하는 어리바리한 면이 있다. 심지어 혀가 짧고, 말하는 속도도 빨라서 발음이 굉장히 안 좋은 편에 속한다(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바보가 따로 없군). 그럼 어떻게 이렇게 면접에서 계속 붙었냐고 한다면, 이 부분은 내 향후 밥벌이가 될 수도 있으니 지금 당장 공개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면접전형은 면접관 다수와 면접자 다수로 이루어진 다대다 면접이었다. 면접에는 토의면접이 포함되어 있어서 토의주제에 대해서 우리가 토의하는 모습을 면접관분들이 유심히 지켜보고 이후에 인성면접과 상황면접 등이 이어지는 형태였다. 우리 그룹에서는 토의를 시작할 때 내가 자진해서 사회자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토의 이후에 과연 우리가 잘한 걸까, 못한 걸까 떠올릴 새도 없이 면접관분들의 폭풍질문을 받게 되었다. 역시나 나는 처음 겪어보는 정규직 면접의 면접관분들의 포스에 굳어버렸고, 면접관 한 분에게는 거의 혼나듯 날카로운 지적을 받았다. 지금에서야 이것이 '압박면접'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때는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나는 정말로 울었다.
사실 합격은 2019년 하반기에 이미 최종합격을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위의 사진처럼 2020년 여름이 되어서야 임용이 되고 임용장을 받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전 세계인 모두가 아는 사건이 있었다.
혹시 눈치챘는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코로나19(COVID-19)
당시 갑작스레 코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퍼지게 되었고, 지금 생각해도 정말 재난 그 자체였다고 느껴진다. 마스크 대란이나 이런 상황들은 현시점에서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다 겪었을 것이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임용이 되어야 하는 시기에 코로나가 퍼지게 되어 당시 나를 포함한 한국산업인력공단 신입직원들은 임용대기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8개월 정도 기간을 백수인데 백수가 아닌 상태로 신나게 돈을 쓰고 놀고 지내다가 연수원에 입소하라는 공지를 받았다.
울산에서의 연수원 생활은 굉장히 재밌었다. 물론 연수원 교육을 바탕으로 평가하는 시험이 있었지만, 동기들을 만나게 된 것들도 그저 반가웠고, 그날의 교육이 끝나면 모여서 맥주 한 잔 하며 친분을 쌓는 그 과정 자체가 좋았다.
그렇게 연수원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나는 전체 신입사원 중에 시험성적 1등으로 연수원을 수료했다.
이후에는 강원도에 있는 지사로 배치가 되어 처음으로 자취를 하게 되었다. 평소 편하게 어머니가 해주신 밥을 먹다가 객지에서 혼자 자취하며 직장생활을 하는 것이 처음이기에 걱정이 꽤 컸다. 그래도 뭐 이런 것도 다 겪어야지! 하면서 합격한 것도 감사한 상황이기에, 분홍색 꽃무늬 벽지가 붙어있는 허름한 내 원룸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실제 업무를 하게 되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상상 이상의 어려움들이 있었다. 인턴일 때는 몰랐던 문서 기안하기, 결재라인, 문서검색, 심지어 전화받는 방법까지 모든 게 새로웠지만,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사실 지금에서야 나름 경력이 쌓여서 돌이켜보면 당시 내 업무는 굉장히 단순하고 쉬운 편에 속하는 업무였다. 만약 그 업무를 지금 나에게 하라고 한다면, 조금 과장해서 표현해서 연신 하품을 하며 '이렇게 월급 받아도 되나...'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도무지 업무파악이나 지사 내에서 적응이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거의 매일 저녁 부모님, 친인척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과 통화하며 너무 힘들어서 퇴사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당연히 100이면 100 모두 어떻게 들어간 공기업인데라며 만류했다.
정규직으로 입사한 공기업을 내가 사직원에 직접 서명하고 포기했고, 이 사실에 대한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의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나 또한 내가 포기한 것에 대해 자괴감을 느꼈고, 무엇보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이번 사건을 만회할 기회를 얻기 위해 다시 NCS책을 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을 퇴사하고 경기도의료원도 마찬가지로 서류전형-필기전형-면접전형을 거쳐 최종합격자 2명 안에 포함되게 되었다. 보통 일반적으로는 이직을 할 때 새로운 직장에 합격을 하면 그때 퇴사를 한다고 하는데, 나는 반대로 항상 쌩퇴사(?) 이후에 백수 상태에서 무작정 준비를 했다. 그런데 나도 신기한 점은, 퇴사를 하고 이직을 할 때 단 한 번만을 제외하고 모든 기관들을 3달 안에 최종합격했다. 그리고 그 단 한 번은 6개월 만에 최종합격했는데, 그곳은 이후 8번째로 등장할 한국농어촌공사이다.
경기도의료원을 지원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근무지가 집에서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나도 내가 공공병원 행정과에서 근무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하필이면 코로나가 심각하던 2020년 12월 겨울이었고, 당시 병원 대표번호가 내 내선번호로 되어있어서 쉴 새 없이 전화가 왔었다. 하지만, 내 주된 업무는 전화를 받는 것보다는 병원 행정업무였기에 업무인수인계받아야 할 것들도 쌓여있었고, 조직 분위기도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큰 혼란을 겪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을 포기하고 빠르게 새로운 공공기관으로 재취업을 해서 그랬을까? 그래서 나는 내 공기업 이력상 최단기간인 14일 만에 기록적인 퇴사를 하게 된다. 정말 누구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근무이력이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굳이 감출 필요도 없는 사실이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는 거 같다.
그런데 세상이 굉장히 좁고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내가 퇴사한 이후 경기도의료원의 내 자리로 온 후임자를 이후 9번째로 등장할 내 마지막 공기업인 국민연금공단에서 동기로 만나게 된다. 국민연금공단 연수원에 입소한 내 동기들은 총 160명 정도였는데, 우연히 그 친구와 인사하고 대화하다가 경기도의료원의 내가 근무했던 자리에서 같은 업무를 하다가 퇴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친구는 경기도의료원에서 근무할 때 전자결재 문서함에서 내가 퇴사 전에 기안했던 문서들을 보고 '이 사람은 누굴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놀라움과 신기함으로 서로 이야기를 계속하다가 공감할 수밖에 없던 에피소드를 공유하게 되었다. 당시 내가 근무했을 때 병원 원장실에 조직도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고 해서 나는 100명이 넘는 직원들의 사진과 담당업무를 일일이 출력해서 가위로 오려서 원장실 벽 한편에 붙여야 했다. 다른 업무도 많은 상황에서 이 일은 시간이 상당히 많이 걸리는 번거로운 일이었고, 심지어 보수적인 분위기로 인해 원장님이 계실 때는 조직도를 붙일 수가 없어서 늘 상사분들께 원장님이 원장실 안에 계신지 체크를 해야 했다. 그렇게 원장실이 비어있을 때 직원 4~5명의 사진과 업무를 잽싸게 붙이고 원장님이 오시기 전에 빠져나오는 것을 반복했던 기억이 난다.
국민연금공단 연수원에서 만난 동기이자 경기도의료원 후임자인 이 친구 역시 이 작업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조직도는 4년이 넘도록 완성되지 못했다고 한다.
어쨌든, 세상 참 좁다.
의정부지방법원은 행정인턴으로 채용이 되었다. 서류전형과 면접전형으로 이루어진 채용과정에서 최종 2명을 뽑는 자리였는데, 면접전형에만 37명이 참석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그 당시 추운 대기실에서 꽤 오래 기다린 후에 면접을 보았다. 앞선 직장들에서 면접을 조금 경험해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예상되는 질문들이 있었고, 준비한 대로 답변을 하여 최종합격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원래는 행정인턴이라 행정업무를 수행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나는 뜬금없이 보안관리대 소속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같이 근무하는 선배들은 대부분 경호나 무술을 전공하신 분들이었고, 유단자가 아닌 분들이 없었다. 그래서 법원 배지가 달린 검은 양복을 입고 법원 주요 입구를 같이 지키고 있어도 나는 어린애 느낌이 났다. 당시 내 업무는 민원인들이 출입 시 소지품 등을 탐색해서 위험한 물건을 분류하거나, 당시에도 코로나가 유행이었기에 법원 내에 출입 시 체온측정기계로 체온을 측정하게끔 민원인들을 안내하는 등이었다.
업무 자체가 내가 지원하려 했던 행정 쪽과는 거리가 멀어서 3개월을 채우지 못하고 퇴사를 했다.
지금까지 근무했던 4곳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 5곳이나 더 남아있다. 사실 퇴사에 대한 이유는 핑계에 불과하고, 당연히 근성 없고 MZ스러운 모습으로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보아도 그러하고 실제로 그랬으니 말이다. 어찌 보면 치부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이지만, 이 글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지켜봐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대가 이 글을 통해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을 나눠준다면 나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다.
안개가 걷히면 이 길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비로소 알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