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들에게 보여줘야만 했다.

by 명쓰

대학생활은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학창 시절의 공백이 있어서 처음에는 걱정이 됐지만, 사회복지학과의 특성이었을까?

먼저 다가와주는 친구들도 많았고, 선후배관계나 나이를 떠나서 대체로 인간적인 분위기였다. 교수님들도 좋으신 분들이 많으셔서 졸업 이후에도 아직까지 몇 분과는 연락을 이어오고 있다.



여담으로, 한국농어촌공사에 최종합격하고 임용이 된 이후 경기도 연천군으로 인사발령이 났다. 그런데 입사 초기에 점심식사를 하고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 아래 사진처럼 교수님으로부터의 예상치 못한 선물이 내 자리에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점심시간 사이에 내 자리가 바뀐 줄 알았다.


KakaoTalk_20250908_205722056.jpg 학교생활을 잘 못하지는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에는 퇴사를 해서 교수님께 죄송한 마음이 컸다.


다시 돌아와서, 나의 대학생활도 남들과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던 거 같다. 그날 강의가 끝나면 친구들과 모여서 술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늦게까지 놀기도 했고, 다양한 추억거리가 생겼던 대학생활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나도 놀 때는 여느 대학생들처럼 노는 걸 좋아했었던 거 같다. 그렇지만 사람은 쉽게 안 변한다고, 교수님의 강의를 들을 때나 과제를 하거나 시험을 준비할 때는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튀는 면이 있었다.


보통 대부분의 학생들은 강의실에서 교수님의 시선과 질문을 피할 수 있는 음지(?)를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졸업을 할 때까지 나는 어느 강의에서든지 강의실 맨 앞자리를 고수해 왔다.

과제를 할 때에도 발표 역할을 자진해서 나섰고, 시험기간의 내 모습은 당연히 두말하면 입이 아플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전체 수석, 차석도 한 번씩 해보고, 2학년 1학기부터 졸업 때까지 학점이 4점대 밑으로 내려간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사는 생활이 힘들지는 않았다. 사회복지학이라는 학문이 나에게는 잘 맞았고, 강의를 듣고 공부를 하는 것이 꽤나 즐거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등학교 1학년에서 멈춘 나의 학교생활이 이 대학교에서 다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누군가 내게 여태껏 살면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한 게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봉사활동"이라고 말할 것이다. 학부생활뿐만 아니라 졸업 이후에도 이어왔고, 봉사활동은 나의 삶 전반적인 부분들을 바꿔놓았다. 심지어 공기업 취업을 할 때에도 봉사활동경험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때는 2014년. 당시 우리 집 근처에는 시각장애인복지관이 있었다. 처음에는 어떤 봉사활동을 할 수 있을까 우연히 이 복지관을 방문했는데, 그 시기에 시각장애인을 대상으로 검정고시 교육 사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담당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면담 이후 나는 고민 끝에 자원봉사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검정고시 출신이기도 했고, 특별한 경험을 통해 스스로 느끼는 것들이 많을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나는 중졸, 고졸검정고시의 거의 모든 과목을 강의하게 되었는데, 사실 나 스스로 이 문제들을 푸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대상자분들은 약시부터 심지어 전맹이신 분들까지 계셨기 때문에 이 문제들을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이해하실 수 있을지 처음에는 막막한 부분들이 있었다. 게다가 대부분 연세가 꽤 있으신 분들이셔서 난이도가 더 올라간 느낌이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나는 이 봉사활동을 2014년부터 2018년까지 만 4년 동안 꾸준히 이어왔다. 내가 쓰고 있는 이 글의 제목처럼 힘들게 취업한 공기업들은 굉장히 쉽게 수없이 포기해 왔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의 봉사활동을 포함한 다른 봉사활동들은 공기업 근무기간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했다.


그 이유는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에는 굉장히 집중하고 즐기는 반면, 내가 원하지 않는 일에는 어떤 방법으로도 도저히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그 정도가 남들에 비해 조금 더 극단적이었던 거 같다고 지금은 생각이 든다.




어쨌든 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의 봉사활동은 쉽지 않음은 분명했지만, 나는 그분들의 뜨거운 배움의 열정을 외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그분들은 나를 통해 절실하게 이 세상을 보고 싶어 하셨을 것이고, 나는 내가 함께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그분들의 눈이 되어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4년간 많은 분들이 검정고시 합격이라는 성취를 거두셨고, 그분들의 인생에서 배움이라는 큰 갈증을 해소시키는 데 내가 조금이나마 기여했음에 큰 뿌듯함을 느꼈다.




이밖에도 북한이탈청소년과의 1:1 멘토링을 통해 그 아이의 인생이 변화하는 과정을 지켜본 경험이 있다. 처음에는 말을 꺼내고 고개를 드는 것조차 어려워했던 그 아이가 1년간 나와 함께 형과 동생처럼 지내며 학교생활에 잘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꽤나 뿌듯한 일이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으니 벌써 20살이 훌쩍 넘은 어엿한 청년이겠구나. 그 당시에는 팔씨름을 내가 가볍게 이겼었는데, 이제는 이 녀석을 절대 힘으로 이길 수 없겠구나 싶다.



"룡아, 잘 지내고 있지?"





대학교 3학년 때는 사회복지현장실습이 있었고, 데이케어센터에서 주어진 한 달의 시간을 노인성 질환을 앓고 계신 어르신들과 재밌게 보냈다. 내가 기타를 칠 수 있었으니 화이트보드에 어르신들이 아시는 노래들의 가사를 적어놓고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어떤 어르신들께서는 가운데로 나오셔서 리듬에 몸을 맡기시며 왕년의 춤솜씨를 발휘하시곤 하셨다. 벌써 10년 가까이 된 추억이고, 어르신들 대부분 건강도 좋지 않으셨으니 그때 계셨던 분들 중에 많은 분들은 더 이상 뵐 수 없는 분들이 되셨을 거라고 생각이 든다.

그때 어르신들께서 "잘생기고 훈훈한 청년"이라고 많이 칭찬해 주셨는데, 어르신들의 깊은 주름 사이에 새겨졌던 따뜻하고 인자했던 그 미소가 아직도 선명히 기억이 난다.



이렇게 생활을 하며 아래 사진처럼 감사하게도 대한민국국회 표창을 받게 되기도 했다. 사실 표창을 받을 만큼의 깜냥은 되지 않지만, 더 열심히 살라는 의미로 생각을 하고 있다.



국회표창.jpg 내부는 정치적으로 오해가 생길 수도 있어서 일부러 표창장 표지만 첨부하였다.





그리고 2018년 2월 대학교 졸업장을 받고 취업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즐거웠던 4년간의 대학생활은 이제 끝이 났고, 나는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


사실 우리 학교 사회복지학과 동문들은 보통 사회복지 현장으로 많이 가는 편이었고, 취업 연계도 그런 쪽으로 잘 되어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답이 정해져 있었다.



내가 대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우리 형은 우리나라에서도 내로라하는 공기업에 최종합격하여 재직 중이었다.



여태 내 글을 읽어온 그대는 당연히 내 행동과 선택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고, 당연히 형만큼 따라가기 위해 공기업 준비를 시작했다. 자격증도 하나씩 취득하고, 토익성적도 올리고, 대부분의 공기업 취업준비생들이 준비하는 것들을 차근차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뭐, 사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공기업은 원래 다들 준비를 많이 하니까 최종합격만 하면 이후에는 내 삶이 편안해지고 동시에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나의 확실한 착각이었고, 이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기까지는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리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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